지난 9~13일 북한 영변의 핵시설을 방문하고 돌아온 헤커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국제안보협력센터 소장의 “영변 경수로의 우라늄농축 설비에 2000개의 원심분리기가 구축돼 있다”는 발언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헤커 소장은 자신이 직접 들르고 본 영변 경수로와 우라늄농축 시설 현장에 대해 20일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보고서를 통해 자세히 묘사했다. 그 요지는 “경수로 건설 현장과 우라늄농축 원심분리기 설비는 말 그대로 충격적(stunning)이었다”면서 “특히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1000개가 넘는 초현대적 원심분리기는 상상을 초월했다”는 것이다. 헤커 소장이 받은 ‘충격’이 전 세계를 강타한 이유는 간단하다. 공개된 영변의 우라늄농축 시설은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시설로서, 북한이 핵무기 연료로 사용되는 고농축우라늄(HEU)을 연간 40kg(우라늄탄 2개 제조 분량)까지 농축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우라늄 핵폭탄은 거의 모든 면에서 종전의 플루토늄 핵폭탄보다 훨씬 위협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보즈워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20일 한국, 일본, 중국과 북한의 우라늄농축에 대한 방안을 협의하기 위해 급히 아시아로 날아온 것도 당연하다. 오바마 행정부의 황망함은 노련한 외교관 보즈워스 특별대표의 입에서도 나온다. 방한 중인 보즈워스는 22일 북한이 고농축우라늄 제조에 사용될 수 있는 원심분리기를 공개한 것과 관련, 한편으로 “이 프로그램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짐짓 여유 있게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이는 북한이 그동안 보여 온 일련의 도발행위 중 하나”라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당했다는 얘기는 그만큼 손발이 안 맞고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는 정황이다. 남측 당국자도 “정밀 분석이 필요하지만 북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심각한 위협인 것은 사실”이라며 뒤늦게 맞장구를 쳤다. 이제 와서 한미 관계자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미국의 대북정책인 ‘전략적 인내’와 남한의 대북정책인 ‘기다리는 전략’이 파탄을 맞은 것이나 다름없다. ‘전략적 인내’는 ‘전략적 한계’와 ‘전략적 허점’을 노출했고, ‘기다리는 전략’은 ‘기다리다 날 샌 전략’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은 빈말이 아님을 증명했다. 지난해 4월5일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와 유엔안보리의 대북 비난 등으로 맞설 때 북한은 4월14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자체 경수로 발전소 건설을 적극 검토할 것”이라고 일성(一聲)을 날렸다. 2주 후인 4월29일 다시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내 “경수로 발전소 건설을 결정하고 그 첫 공정으로 핵연료를 자체 생산하기 위한 기술개발을 지체 없이 시작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후로도 “(경수로) 핵연료 보장을 위한 우라늄 농축기술 개발이 성과적으로 진행돼 시험단계에 들어섰다”(6월13일, 외무성 성명), “우라늄농축 시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결속 단계에 들어섰다”(9월3일, 유엔 안보리의장 앞 서한)고 알렸다. 올해 들어서는 3월29일 조선중앙통신 해설을 통해 “‘기다리는 전략’에 우리는 두 차례의 핵시험과 광명성 2호의 성공적 발사로 대답하였다”면서 “2010년대에는 주체철과 주체솜에 이어 머지않아 자체의 핵연료로 꽝꽝 돌아가는 경수로 발전소가 우리의 대답으로 될 것이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지난해 4월 이후 북한이 내놓은 경수로(우라늄농축) 관련 발언들이 마치 잘 짜인 각본에 따라 나온 것처럼 정교하다.

북한이 ‘우라늄농축 카드’를 꺼내든 의도는 명백하다. 미국과 대화를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미국이 “북한의 우라늄농축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나 9·19 공동성명에 모두 배치된다”면서 ‘추가 제재 가속화’ 운운하는 것은 발가락이 가렵다고 구두코를 긁는 격이다. 게다가 여기서 더 기다리거나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도 위험하다. 북한이 고농축우라늄을 생산하고 추가 핵실험을 강행할 경우 북한의 핵무기 위력은 커진다. 나아가 경량화가 가능한 우라늄탄 핵물질의 이전도 가능하다. 미국의 대북정책이 기로에 섰다. 다행히도 그 답을 헤커 소장이 갖고 왔다. 헤커 소장은 체제안보 불안이 해소되기를 원하는 북한 당국의 분위기를 전하면서 ‘북한 정부 고위 인사’가 “클린턴 행정부 당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북한 방문으로 이어졌던 지난 2000년 10월의 북미 공동코뮈니케가 문제 해결의 좋은 출발점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북한이 미국 고위급 인사의 방북이나 6자회담 재개를 기대하는 메시지로 읽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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