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환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


▲ 통일뉴스 신간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 표지. [자료사진 - 통일뉴스]
지난주에 충청남도 홍성에서 제법 눈 밝은 고등학생들과 왜 통일을 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토론하고 왔다. 아니나 다를까 통일문제를 얘기할 때면 꼭 나오는 질문이 이 날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남과 북의 차이가 커지고 있기 때문에 ‘민족’이라는 개념을 붙들고 통일을 추구해가는 건 어렵지 않겠냐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책 소개를 부탁받고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통일뉴스)를 받아보자마자 그 학생의 질문을 떠올린 건 아마도 그날 ‘대답’이 여간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자평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대답의 요지는 이랬다.

“남과 북의 민족적 공통성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대단히 뿌리가 깊습니다.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게 아니란 얘기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말에 ‘넋 나간 사람처럼 왜 그래?’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들으니 사람이 죽으면 혼과 몸이 분리된다는 중국식 혼백(魂魄)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우리 민족은 예부터 망혼(죽은 사람의 넋)뿐 아니라 전생혼, 부혼(떠다니는 넋)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을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언어로 표현되는 정신세계의 공통성이 긴 시간 분단되어 있어도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으니 이러한 뿌리를 기반으로 통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천만다행으로 홍성에 가기 며칠 전에 우리 민족의 ‘기층문화’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학자에게 ‘술자리 가르침’을 받은 덕분에 그나마 이 정도 얘기할 수 있었지, 그렇지 못했다면 아마도 남북이 아직 말이 통하고, ‘단군 신화’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민족이라는 수준의 대답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던 이유는, 첫째, 좀 더 다양하고 풍부한 사례(누군가에게 듣고 미처 사실 여부를 제대로 확인해보지도 못한 사례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절실하게 생각하고 공부해서 확인한 사례)를 제시할 수 없었다는 안타까움 때문이고, 둘째, 민족이나 민족주의 개념이 통일문제를 풀어 가는데 별 소용이 없다는 ‘꽤 널리 퍼진’ 주장들을 좀 더 이론적으로 반박(물론 질문한 학생이 아니라 그 학생에게 그런 주장을 했을 이에 대한 반박)할만한 식견이 부족한 탓에 이론적인 논의는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입시에 찌든 또래들보다 조숙했던 그 학생들도 분명 아쉬웠을 것이다.

만약, 이 책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를 두 주만 일찍 만났다면, 또는 정수일 선생님의 글 「민족과 민족주의, 그 재생적 담론」만이라도 읽고 홍성에 갔더라면, 아니 이 책을 함께 지은 ‘21세기민족주의포럼’에 참가해서 그 어떤 보석보다 소중하고 빛나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면, 아마 홍성에서 만난 그 학생들에게 큰 기쁨과 보람을 안겨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지은 쌀과 채소로 ‘우리 식’ 밥상을 차려 먹으며 공부하던 그 학생들에게, 민족의 경제적 공통성이란 경제제도나 경제수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기층구조’(농업이나 공․상업), ‘경제생활’(주로 의식주),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자연지리적 조건’(기후와 부존자원 등)이라는 3대 요인의 공통성을 가리킨다는 정수일 선생님의 논의를 소개해주면서, 남북의 음식문화가 아직도 얼마나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찬찬히 이야기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 책을 늦게 받은 것이, 정수일 선생님의 명철한 민족론을 늦게 접한 것이, 그리고 무엇보다 ‘21세기민족주의포럼’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안타깝게 다가온다.

소개글을 쓰기까지 허락받은 시간이 많지 않아 주요 내용만 일별해본 탓에 조심스럽지만, 감히 평해본다면 이 책은 세계화 시대에 민족 담론은 구시대적 유물이라는 주장, 남과 북은 더 이상 같은 민족이 아니라는 주장, 따라서 탈민족 시대에 지향해야 할 최상의 가치는 ‘평화 공존’이라는 주장 앞에서, 요즘 유행하는 광고 카피를 빌면, “남북은 하나의 민족이고 그래서 통일해야 하는데, 통일은 우리 민족에게 정말 좋은 건데,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네”라며 주눅 들던 이들에게 분명 ‘가뭄 속 단비’처럼 큰 위안과 힘이 될 것이다. 또한 자신의 배움과 깨달음만이 세상이치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겸손치 못한 서생(書生)들에게도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라 믿는다. 무엇보다 자신의 뿌리를 망각한 채 반민족․반북에 매달리고 있는 ‘새로운 오른쪽’ 인사들이 이 책을 읽고 회심하기를 바란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은 이론적인 입론, 반론에 집중하느라, 진실로 남북이 한민족임을 확신시켜 줄 언어, 정서, 감성, 생활문화 등의 공통점들이 이 책에 충실하게 소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탈민족 담론’이 마치 세련된 지성의 장식물처럼 여겨지던 부박한 시대야말로 이제는 과거가 되고 있다. 때마침 나온 『재생의 담론, 21세기 민족주의』는 민족이라는 화두를 놓지 않고 살아가는 수많은 민족 구성원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뿌리 깊은 나무에 알찬 열매가 열리듯 언젠가는 이 책의 뒤를 이어 21세기 우리 민족의 실체를 보여 주는 책도 세상에 나오리라 기대해본다. 『21세기 우리 민족』 정도면 책이름으로 어울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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