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16일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면담에 성공했다. 지난 10일 방북한 이래 현 회장은 다섯 차례나 방북 일정을 연장했다. 5전6기의 배짱과 뚝심을 보여 주었다. 어쩌면 이번 현 회장의 방북에는 김 위원장과의 면담이 확실하게 잡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측에선 대개가 김정일-현정은 면담을 기정사실화했다. 현 회장 일행이나 북측으로서도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하루 연장에 이어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날 때 낙관과 비관이 교차했다. 그런데 어쨌든 만났다. 이로써 미국, 남측 당국과 남측 민간 등 북한과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 세 축이 모두 북측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여기서 드러난 것은 미국과 남측 민간은 북측과 대화를 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데 비해 남측 당국만이 딴청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일-현정은 면담과 관련 아직 정확한 내용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조선중앙통신> 16일 보도에 의하면 면담 주체는 김정일 위원장이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태위)의 초청에 따라 평양을 방문하고 있는 현정은 남조선 현대그룹 회장과 그의 일행을 접견했다”는 것으로 보아 현대아산과 아태위로 국한됐고, 면담 내용도 김 위원장이 “현대그룹의 선임자들에 대하여 감회깊이 추억하면서 동포애의 정 넘치는 따뜻한 담화를 했다”는 것으로 보아 현대가(現代家)와의 인연에 국한된 것으로 보인다. 이어 오찬을 한 것으로 보도가 되었는데 그 대화내용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어쨌든 중요한 건 현 회장이 금강산관광사업 재개든 개성공단사업 정상화든 무엇이든 간에 이악스럽게 달라붙어 북측 최고 지도자와의 면담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미국도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이후 북한과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 앞서 북한에서 두 여기자의 석방 문제와 관련해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을 요구하자 오바마 행정부가 이를 허락한 점부터가 인상적이다. 민간인 석방을 위해 전직 대통령이 과감히 움직인다는 점에서 어떤 진정성을 느끼게 해 준다. 북한은 클린턴 특사를 맞아들여 두 여기자를 특사로 석방함과 아울러 북미관계 개선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 몽골과 베트남을 방문 중에 있는 김영일 외무성 부상은 연일 노골적으로 미국과의 대화 용의를 공식 표명하고 있다. 이에 맞춰 오바마 행정부도 클린턴의 1차 방북보고를 받고 난 후 특히 핵심 사안인 ‘비핵화’ 조치와 관련한 대북 언급에서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북한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측 당국만이 딴청을 피우고 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통해 대결적인 한반도 분위기가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다. 게다가 현정은 회장의 방북으로 137일간 억류되어 있던 현대아산 직원 유성진 씨가 석방됐다. 미국 당국의 역할과 남측 민간 현 회장의 활약에 힘입어 한 순간에 한반도 정세에 훈풍이 돌면서 남북관계에 어떤 변화의 조짐을 잡을 수 있는 기회의 창(窓)이 열렸다. 8.15경축사가 그 기회였다. 북측도 이를 의식한 듯했다.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의 이행을 약속하거나 또는 ‘조건없는 대화’ 정도만 제의했어도 북측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사실상 선핵포기에 입각한 ‘비핵 개방 3000’을 요구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철지난 레파토리만 되뇐 것이다.

그런데 새로운 기회의 창이 열렸다. 김정일-현정은 면담이 성사된 것이다. 이로써 공은 다시 남측으로 넘어 왔다. 현 회장이 김 위원장으로부터 어떤 대남 메시지를 가져올지는 모르지만 그에 관계없이 17일부터 시작되는 한미간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합동군사연습을 하루 앞두고 면담이 이뤄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비핵 개방 3000’(8.15경축사)과 “침략전쟁행위”(을지훈련) 상황에서는 만남 자체가 메시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직 남북관계 개선의 기회는 있다. 이명박 정부가 진정으로 북측과의 대화를 원한다면, 아니 한반도 정세 변화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을지훈련이 종료된 직후 어떤 방식으로든 6.15와 10.4선언 이행 의지와 관련한 대북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기회의 창이 하나하나 닫힌다는 건 남북 모두에게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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