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는 것을 위하여 변하고 있다.”

▲ 『변하지 않는 것을 위하여 변하고 있다』 표지. [사진제공 - 삼인출판사]
역설이라면 역설인 이 말을 여느 평범한 사람이 했다면 그저 그렇게 넘길 수도 있겠지만, 20여년을 감옥에서 보내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끝내 굽히지 않은 ‘비전향장기수’의 이 한마디는 천근의 무게로 다가온다.

신현칠 선생,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1917년 생이니 이제 구순을 훌쩍 넘겨 이 세상에 별반 미련조차 없을 법한 그가 그간 “끼적인 것”을 모아 『변하지 않는 것을 위하여 변하고 있다』(삼인)는 책을 냈다.

선생 스스로도 “그런 나이에 책을 낸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실로 망령된 일임에 틀림없다”고 했지만 주로 8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선생이 틈틈이 쓰고 기고한 글들과 편지글 등을 보면 천상 선생은 ‘글쟁이’임에 틀림없다.

이 책은 선생이 여러 곳에 기고한 글들이나 서신들을 주로 모아 엮은 것인 만큼 형식이나 주제 면에서 다양하고 연대순으로도 일관되지 않지만, 선생이 주요하게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에게 스스로 내면화시키기 위해 힘써온 알맹이들은 하나로 일관돼 있다.

그것은 바로 책 제목이 시사하듯 어떤 시대와 어떤 환경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을 스스로 지키고 풍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모색해온 흔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선생의 ‘변하지 않는 것’은 사상으로서의 코뮤니즘(공산주의)이자 인간으로서의 신념을 간직한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일 것이다.

특히 80년대 말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실패로 귀결되고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선생의 심경을 담은 글들은 변화의 시기를 살아가는 코뮤니스트가 ‘변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내면화, 신념화 해가는지를 손에 잡힐 듯이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사적 심경을 정리한 글이지만 귀한 역사의 기록으로 읽힌다.

“도대체 엘친 같은 자, 또 그 추종자들도 한때 공산주의자였단 말인가”, “오늘의 소련 사태의 직접적 원인 제공자가 고르바초프라고 한다면, 그 원인 내지는 근본원인은 스탈린의 공과 가운데 과오 쪽 사태의 누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이제는 진정 그 뼈아픈 부정적 경험을 똑바로 자각 극복하는 노력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를 고수해야한다”...

선생은 결국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가 다시 회복, 발전되고 신생되는 길이 인류사의 방향일 것을 믿고 오늘을 살아가는 수 밖에 없다”고 결론짓지만 이같은 결론이 가볍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선생이 20여년의 혹독한 감옥살이에서도 ‘비전향’을 고수해온 내적 자기 성찰의 힘 때문일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물으며 서슬푸르게 살아보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심지어 ‘나는 공산주의자다’라고 공언하고 살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형무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전위로서 나아가 죽지 못하여도 물러나 죽어야 할 죽음이 나에게 올 때에 의연히 맞으리라는 생각이 되풀이 하여 스스로에게 기약하고 있었다”...

[사진제공 - 삼인출판사]
일제시기 태어난 선생은 양반 출신의 아버지로부터 논어 등 한학을 배웠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일본말로 된 책을 더 많이 읽었고, 심지어 이론적 사색도 일본말로 할 정도로 불행한 지적 체험을 한 사람이었다”고 고백하듯이 우리와는 다른 시대를 헤쳐온 탓에 글들이 다소 거리감 있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선생은 철저히 우리 민족의 해방과 통일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왔다.

사실 책 맨 끝에 배치된 <4부 엄혹의 시대>를 먼저 읽어야 비로소 비전향장기수로서의 선생의 일대기를 이해할 수 있을 터이지만 굳이 이를 앞세우지 않은 것은 “사는 날까지 나의 소중한 것에 대해 정성을 다하고, 만일 허용된다면 언제까지나 현역의 정신으로 살아 마칠 것을 가만히 외워본다”는 선생의 소신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 한용운의 시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자신의 경험과 외적 비판, 그리고 다시 엄중독거 속에서의 치열한 자기 사색 끝에 “한용운은 패배주의요!” 한 마디를 출옥하는 후배 동지에게 전해준 일화는 선생이 어떤 사람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다른 비전향장기수 선생들만큼의 극적인 삶을 살거나 역사적 비중을 지닌 인물은 아닐지라도 2000년 비전향장기수 송환 대열에 합류하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수의 몸이지만, 죽는 날까지 남쪽에 남아 분단의 아픔을 겨레와 함께하고 싶은 소박한 소망”을 품고 생의 마지막까지 책을 펴낸 선생의 투혼이야말로 이 책의 모든 미흡함을 덮어주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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