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광장은 해결이 안 되고 있다. 서울시청앞 광장(서울광장)을 둘러싼 시민들과 정부당국과의 갈등을 보면 그렇다. 국민들은 6월항쟁 22돌을 맞아 광장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당국은 폭력시위가 될 우려가 있다며 예단을 해서 불허하고자 했다. 우여곡절 끝에 10일, 서울광장에는 10만명의 시민들이 운집해 ‘6월 항쟁 계승, 민주회복 범국민대회’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문화제’ 행사를 비교적 순조롭게 치렀다. 광장사용을 금하고자 하는 어떤 이유도 군색할 뿐이다.
◆ 광장 논쟁의 촉발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본격화됐다.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 기간과 영결식 때 보여준 국민들의 애도와 추모의 물결은 결국 이 나라에 ‘정부-민간’ 소통의 문제를 제기했다.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의 국정기조 전환을 요구했고 그 원인을 ‘소통부재’에서 찾았다. 국민장 기간 내내 분향소가 있는 덕수궁 대한문 주변과 그 맞은편에 있는 서울광장을 전경버스로 삥 둘러싼 ‘차벽’은 전형적인 소통부재의 상징이었다.
◆ 그런데 말이 좋아 ‘소통부재’이고 ‘국정기조 전환’이지 엄밀하게는 ‘독재’와 ‘정권 타도’라 할만하다. 사실 불법적으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는 후자 표현을 사용했다. ‘소통부재’ 하니까 지난 부시 미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두고 통상 ‘일방주의’라고 표현한 것을 상기시킨다. 일방주의란 독재주의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아마도 정치학자들은 미국이라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독재’, ‘독재자’라는 표현을 쓰기가 뭐해서 ‘일방주의’라고 불렀던 터다.
◆ 굳이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광장의 순수성과 효용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특히 우리의 경우 1987년 6.10항쟁, 2002년 월드컵응원 그리고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 등이 서울광장을 중심으로 타올랐다. 이 엄청난 국민적 에너지를 살려야 한다. 광장을 내주지 않는다는 것은 넘치는 국민적 에너지를 막는 것이다. 광장을 찾아 남과 북을 나선 이명준은 결국 광장을 찾지 못하고 제3의 중립국을 택한다. 지식인이자 한 개인이야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라의 주인인 국민에게는 광장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