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징이 울리는 원시인의 광장으로부터 한 사회에 살면서 끝내 동료인 줄도 모르고 생활하는 현대적 산업 구조의 미궁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광장이 있다.” 빛나는 4.19혁명의 혜택을 받은 작가 최인훈이 소설 『광장』의 서문에 적은 것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 이명준마냥 인간은 누구나 광장(廣場)을 찾고자 한다.

◆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광장은 해결이 안 되고 있다. 서울시청앞 광장(서울광장)을 둘러싼 시민들과 정부당국과의 갈등을 보면 그렇다. 국민들은 6월항쟁 22돌을 맞아 광장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당국은 폭력시위가 될 우려가 있다며 예단을 해서 불허하고자 했다. 우여곡절 끝에 10일, 서울광장에는 10만명의 시민들이 운집해 ‘6월 항쟁 계승, 민주회복 범국민대회’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문화제’ 행사를 비교적 순조롭게 치렀다. 광장사용을 금하고자 하는 어떤 이유도 군색할 뿐이다.

◆ 광장 논쟁의 촉발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본격화됐다.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 기간과 영결식 때 보여준 국민들의 애도와 추모의 물결은 결국 이 나라에 ‘정부-민간’ 소통의 문제를 제기했다. 국민들은 이명박 정부의 국정기조 전환을 요구했고 그 원인을 ‘소통부재’에서 찾았다. 국민장 기간 내내 분향소가 있는 덕수궁 대한문 주변과 그 맞은편에 있는 서울광장을 전경버스로 삥 둘러싼 ‘차벽’은 전형적인 소통부재의 상징이었다.

◆ 그런데 말이 좋아 ‘소통부재’이고 ‘국정기조 전환’이지 엄밀하게는 ‘독재’와 ‘정권 타도’라 할만하다. 사실 불법적으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는 후자 표현을 사용했다. ‘소통부재’ 하니까 지난 부시 미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두고 통상 ‘일방주의’라고 표현한 것을 상기시킨다. 일방주의란 독재주의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아마도 정치학자들은 미국이라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독재’, ‘독재자’라는 표현을 쓰기가 뭐해서 ‘일방주의’라고 불렀던 터다.

◆ 굳이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광장의 순수성과 효용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특히 우리의 경우 1987년 6.10항쟁, 2002년 월드컵응원 그리고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 등이 서울광장을 중심으로 타올랐다. 이 엄청난 국민적 에너지를 살려야 한다. 광장을 내주지 않는다는 것은 넘치는 국민적 에너지를 막는 것이다. 광장을 찾아 남과 북을 나선 이명준은 결국 광장을 찾지 못하고 제3의 중립국을 택한다. 지식인이자 한 개인이야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라의 주인인 국민에게는 광장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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