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遭遇)

▲2008년 5월 2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1만 2천여 개의 촛불이 타올랐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몇 명이야?"
"굉장히 많습니다."

"많으니까 몇 명? 5천 명?"
"잘모르겠는데요, 5천 명, 아니 1만 명은 넘어보이는데요"

"1만 명? 확실해? 제대로 안 불러?"
"자..잘 모르겠..는...데....요.."

휴대폰으로 들려오는 데스크의 질문에 힘없이 기어가던 목소리, 2008년 5월 2일 청계광장이었다.

난 당시 2주도 되지 않은 신입 기자였다. 대수롭지 않게 가보라고 한 선배들의 말에 영문도 모른 채 현장에 도착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 들린 촛불의 물결에 적지 않게 당황했었다.

'뭐야, 이건? 왜 이렇게 많아?'

기자는 유난히 '촛불'과 인연이 없었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미선이, 효순이를 추모하는 촛불집회가 한창이었던 2002년, 노 전 대통령의 탄핵 반대로 거리로 나온 2004년에도 군인 신분이었던 나는 이따금씩 뉴스 화면을 통해 대수롭지 않은 눈길로 쳐다봤을 뿐이었다.

"어디 있어? 몇 명인지 옥상 위로 올라가서 한번 세 봐"
"이걸 다요? 헉..."

신입 기자의 시덥지 않은 보고에 답답함을 감추지 못하고 나온 선배 기자는 고심 끝에 데스크에 1만 2천 명을 불렀다.

동아일보 사옥과 주변 건물 1층을 지키고 있던 경비 아저씨들에게 몸을 배배 꼬며 겨우 사정사정해 올라갔던 건물 10층.

그 곳에서 본 촛불은 한데 어우러져 광장 자체가 하나의 등처럼 환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철거민들의 울음을 삼키며 대답없이 흐르던 청계천 위로 보름달 마냥 환한 불빛의 무리가 떠 다녔다.

그렇게 2008년 '촛불'의 대 서막이 올랐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전 국민의 '무한도전'이 시작됐다. 그리고 벌겋게 상기된 한 새내기 기자의 취재 수첩도 빼곡해지기 시작했다.

촛불과 함께 한 새내기 기자. 누군가는 나더러 '촛불둥이'라고도 했다. 태평로 일대는 1년 동안 이른바 내 '나와바리'가 됐다.

'국민MT'를 다녀오다

▲ 6월 10일,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 '명박산성'에서 '국민MT'가 펼쳐졌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일시... 2008년 6월 10일부터 11일까지 (1박 2일)
장소... 태평로 (사정에 따라 청와대로 변경될 수 있음)
대상... 전 국민

2008년 6월 10일, '명박산성'에서 '국민MT'가 시작됐다. 도시락도 준비된 전세버스도 없었다. 더위를 피해 물놀이를 할 수 있는 바닷가도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서울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 도로 가운데를 막아선 대형 컨테이너 박스 인근에는 '국민MT' 참가자들로 가득했다.

MT 장소가 워낙 넓었지만, 만남의 장소는 정해져 있었다. '명박산성', 누군가 붙인 이름은 MT 참가자들에게 어느덧 공식명칭으로 통용됐다.

준비한 프로그램도, 식사 시간도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저마다의 밤샘 MT를 즐겼다. '명박산성'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군데군데 모여 '깨소금'처럼 밤샘 이야기를 하는 이들의 얘깃거리는 '선배의 뒷담화'가 아닌 'MB의 뒷담화'였다. '명박산성'을 소개한 어청수 경찰청장도 '뒷담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 태평로 일대를 수놓은 70만 촛불의 물결. [통일뉴스 자료사진]

87년 6월 항쟁이 벌어졌던 날로부터 21년이 지난 이날, '국민MT'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한층 성숙된 방법으로 보여 주었던 날로 기억된다.

70만이 넘는 인파 속에서도 비폭력을 외치던 시민들, '명박산성'에 흰 국화꽃을 꼽던 소녀들의 손길은 잊지 못할 '국민MT'의 추억으로 남았다.

2008년 대한민국을 바꾸는 주문

'비비디 바비디 부~' 생각대로 된다는 어느 회사의 휴대폰 광고처럼 2008년, 세상을 바꾸는 '주문'이 있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조문은 노랫말로 바뀌었다. 그리고 심장 박동 수처럼 엠프 진동으로 바뀌어 지난해 태평로 일대를 요동쳤다. '헌법 제1조'는 더 이상 사회를 규정하는 '명제'가 아니었다.

기존의 질서에 대해 반항심이 발동해 한번쯤 거꾸로 생각해 보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청소년기의 중고등학생들이 외치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주문(呪文)'은 "과연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가요?"라는 물음처럼 들려와 마음이 착잡했다.

이 노랫말은 국민의 요구를 외면하는 '소통 부재'의 정부를 향해 외치는 국민들의 '주문(注文)'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광장에서 또는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이유이자 희망이 됐다.

국민이야말로 이 나라의 진정한 '헌법기관'임을, "국민을 이기는 정부는 있을 수 없다"라는 사실을 알려준 이 두 마디의 주문은 2008년 대한민국을 바꿨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민주주의가 이런 것이라면 배우지 않겠어요"라고 당차게 말하는 어린 학생들에게서 무기력한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속 마음이 들킬까 불안하기도 했다.

그렇게 촛불은 아래로부터 피어올랐다. 어린 '촛불소녀'로부터,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지난해 8월 중반까지 100여 일이 넘는 기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됐던 '촛불'의 힘은 사회 모순에 대한 욕구를 표출하려는 '민심'이 아래로부터 위로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론 < 여론

"인터넷 시작 페이지를 <다음>으로"
"사랑해요, <MBC>"
"조중동은 자폭하라"

여론은 무서웠다. 촛불집회를 통해 언론의 '약점'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촛불집회를 한 쪽에 치우쳐 방송한 지상파 방송, 촛불집회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려는 최대 부수 신문, 여론 조작을 시도했던 인터넷 최대 포털 사이트 등에 '촛불'은 환한 불빛을 비추며 검은 그림자를 '폭로'했다.

새내기 기자인 내가 가지고 있던 언론에 대한 생각도 '촛불'이 진화하면서 바뀌어 갔다. 언론은 단지 '게이트키퍼(Gate Keeper)'의 역할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고민으로 커져갔다.

'조중동 불매운동'과 광고사 항의전화는 더 이상 언론이 기득권 층이 아닌 국민의 목소리를 온전하게 담아내야 한다는 '경고'였다.

▲ 촛불시민들이 <조선일보>와 <서울신문>의 1면을 비교해 살펴보고 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어느 신문 기자예요?"
"인터넷 신문 통일뉴스 입니다"

"보수예요? 진보예요?", "통일교 재단이예요?"

갑자기 경계하면서 피하려 드는 시민들에게 명함을 주면서 따라붙는다. 언론에 대한 시민들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것을 알기에 자세한 설명도 덧붙인다. 이따금씩 취재를 거부하는 시민들을 만나면 힘이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생각들이 공존하는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생각을 담아내기에는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칠 때면 기자로서의 책임감이 밀려왔다.

'촛불'과 함께 한 1년, 새내기 기자는 거리에서 여론을 느낄 수 있었다.

'빡쎄게, 대열정비'

▲'국민이 준 힘으로 누구를 지키는가' [사진-통일뉴스 자료사진]

▲촛불집회에 대한 경찰의 진압방식은 언제나 위압적이었다.[사진-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쿠쿵~" 경찰이 방패를 내려놓는 소리는 매번 들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때가 있다.

새벽, 태평로 일대에서 경찰의 대규모 강제연행이 시작될 때마다 시민들의 저항은 더욱 더 또렷해진다. "니네가 국민의 세금을 받는 경찰이냐", "폭력 경찰 물러가라"

경찰의 무전기로 들리는 음성은 공권력이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암호'였다. 그러나 경찰 병력들이 줄을 지어가며 외치는 '빡쎄게, 대열정비'라는 말을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경찰의 진압은 시민들의 저항처럼 창의적이거나 자발적이지 않았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 지로 모른 채 앞 사람의 뒷통수를 보며, 물러나는 시민들의 발자국을 마냥 쫓아가기에 바쁘다.

인도 위로 흩어진 시민들을 보며 '짜식들, 진작에 말을 들을 것이지'라고 하는 듯 미소를 짓는 경찰의 모습은 기자의 눈에도 위압적으로 비춰질 때가 많다.

그들이 말하는 '현행법'은 거리에서 밤을 꼬박 새운 '촛불'에게만 '빡쎄게' 갖다댔다. 아니 지난 2일, 명동에서 보여준 일반 시민에 대한 무자비한 연행은 경찰의 '폭력성' 역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국민이 준 힘으로 누구를 지키는가'

촛불 1년, 다시 거리로 나온 시민들이 똑같은 피켓을 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AGAIN 2008 민주주의 지키기, 참 쉽죠잉~?'

 

▲ 지난 2일, 촛불 1주년을 맞아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다시 광장으로 진출했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스텝 원, 띠리~ 5월 2일이 촛불 1주년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서울 청계광장에서 1만 2천 명의 시민들이 처음으로 촛불을 들고 세상을 놀라게 한 2008년 5월 2일, 1년이 지난 뒤에도 다시 모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달력에 표시를 해 둔다. 주변사람들과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 놓으면 금상첨화.

스텝 투우, 띠리~ 청계광장과 시청광장 주변에서 촛불을 들고 기다린다.

경찰이 청계광장과 시청광장을 원천봉쇄하고, 시청역 모든 출구를 막으며, 지하철이 시청역을 무정차 통과할 지라도 삼삼오오 모여 이 일대에서 기다린다. 경찰의 원천봉쇄에 항의하는 것은 필수.

스텝 뜨리이, 띠리~ 시청광장을 원천봉쇄한 경찰을 비웃기라도 하듯 깃발을 들고 시청광장으로 들어간다.

'하이서울페스티벌' 거리 퍼레이드에 맞춰서 거리로 진출한다. 퍼레이드를 따라 경찰의 포위가 풀린 시청광장 안으로 진입한다. 민주주의 지키기, 참 쉽죠잉~?

▲ 경찰의 탄압은 촛불 1주년이 지난 지금, 더욱 더 심해졌다. [통일뉴스 자료사진]

5월 2일은 촛불 1주년이었다. 당초 "광장을 내주지 않겠다"는 정부 당국의 기류를 반영하듯, 청계광장과 시청광장은 오전부터 경찰 차량으로 완벽하게 봉쇄됐다.

이 일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광교와 프레스센터 인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300여 시민들이 '하이서울페스티벌' 거리 퍼레이드 시작과 함께 거리로 나왔다. 경찰의 '광장 봉인'이 풀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시가 주관한 행사 때문이었다.

1천여 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시청광장으로 들어가 촛불 1주년의 의미를 되새겼다.

비록 경찰의 진압으로 지난 해처럼 광장에서 목청 터지게 구호도, 불만도 터뜨리지는 못했지만, '촛불은 살아있다'라는 것을 확인시켜 줬던 순간이었다.

이날 몇 명이 모였는지, 이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은 1년 전 새내기 기자 때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러나 이들이 외치려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무엇 때문에 1주년을 기념하려 했는지는 1년이란 시간을 '촛불'과 함께 보낸 기자로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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