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기축(己丑)년 소의 해다. 그런데 우보천리(牛步千里)의 해에 웬 ‘속도전’이 한창이다. 12일 정부와 여당 고위당정협의회에서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최고위원은 작년에 대통령을 만나서 한반도대운하 사업으로 의심받는 4대강 유역사업 등과 관련 “국정운영의 기본이 속도다, 속도전이다”면서 “전광석화처럼 착수하고, 질풍노도처럼 몰아붙여서 국민들이 KTX를 탄 듯한 속도감을 느껴야 한다”고 건의를 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명박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들과는 달리 지난해 말부터 부산스럽게 정부 부처 새해 업무보고를 받으면서부터 시작된 ‘속도전’이 이번에는 해가 바뀌면서 ‘전시상황’까지 더해졌다. 이 대통령이 지난 5일 경제 살리기를 위한 ‘비상경제정부 체제’를 본격 가동하기 시작했는데 청와대 지하벙커에 비상경제상황실을 둔 것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경제난을 잡는다면 좋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데 있다.

원래 ‘속도전’이란 그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있다. 속도전이란 대화와 합의 과정을 거쳐 의견일치가 된 집단에서 소기의 성과를 내기 위해 전 집단적으로 빠른 속도로 일하는 사업방식이다. 따라서 속도전이 한번 시작되면 그 가속도 때문에 어떤 멈찟이나 중도반단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정부는 속도전을 편다면서 자꾸 속도전이란 말을 반복한다. 속도전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정부 잘못이다. 속도전 사업을 하기 이전에 정지작업을 했어야 했다. 앞길을 방해하는 난관이나 걸림돌을 미리 제거하지 않은 채 속도전 하고 소리만 치니 제대로 속도를 낼 수가 없다. 속도전을 잘못하면 당연히 폐해가 생기기 마련이다. 지난해 말 국회에서 여야가 붙은 이른바 1차 ‘입법전쟁’이 그렇다. 여당은 언론관계법 등의 법안들이 들어 있는 이른바 ‘MB법안’을 속도전으로 통과시키려했다가 국민과 야당의 거센 역풍에 좌절됐다. 국민적 합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2월 임시국회에서 제2차 입법전쟁을 앞두고 제2의 속도전을 꾀하고 있다.

‘속도전’ 하면 북한이 뒤질 수 없다. 원래 속도전이란 북측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다. 속도전의 저작권이 북쪽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북측에서 속도전이란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촉진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다. 북한의 총적 좌표는 사회주의강성대국건설이다. 북한은 강성대국건설의 마지막 관문이 경제강국건설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난해 12월 24일, 1950년대 말 천리마운동의 발원지였던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했다. 이어 “전후 천리마대고조를 일으키던 그때처럼 온 나라 전체 인민이 당의 두리(주위)에 한마음 한뜻으로 굳게 뭉쳐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기 위한 진군의 나팔을 불며 총공격전을 과감히 벌려나가야 한다”고 ‘속도전’과 ‘공격전’을 밝혔다. 이어 북한은 올해 신년공동사설에서도 2012년 강성대국의 문패를 달기 위한 모든 전선에서 역사적인 비약을 이룩하자며 ‘속도전’을 연상시키는 ‘천리마대고조’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북한도 새해부터 속도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그리고 미국과의 기나긴 ‘전시상황’ 등으로 인해 용어에 있어 혁명적 언어나 군사적 표현이 많다. ‘속도전’도 그중의 하나다. 그런데 남측 정부는 북측이 쓰는 용어는 그게 옳든 그르든 간에 터부시해 왔다. 아무리 맞는 용어라도 북측에서 쓰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 왔다. 그런데 지금 북측에 저작권이 있는 ‘속도전’ 단어를 마구 써대고 있다. 남측 경제상황이 급하긴 급했나 보다. 어쨌든 상황에 맞고 필요하면 쓰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북측 용어에는 ‘속도전’ 말고도 남측 정부가 쓸 것이 많다. 6.15공동선언의 이념인 ‘우리 민족끼리’가 그렇고, 남북의 통일방안인 ‘연방제 통일방안’이 그렇다. 이들 용어도 우리 민족의 진로와 통일론에 맞으면 쓰면 되는 것이다. 단, 정명론(正名論)처럼 용어는 그 이름에 맞게 사용되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우선, ‘속도전’이라도 그 개념과 의미에 맞게 잘 사용해야 한다. 반대자를 설득시키고 국민적 합의를 이루라는 것이다. 그러면 ‘MB법안’이든 뭐든 일치단결된 힘으로 ‘속도전’을 못 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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