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필자 개인적 단상의 글로 전대협 동우회의 입장은 아님을 밝혀 둡니다. 또한 기억을 더듬어 쓰다보니 사실관계가 약간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정청래(전대협동우회 부회장)



"임수경은 요즘 뭐하고 지냅니까"

 "남조선 어디에서 왔어요?" 내가 가슴에 찬 금강산 관광증을 보여주며 "전대협동우회에서 왔습니다" 라고 말하자 "임수경은 요즘 뭐하고 지냅니까"라고 곧바로 물었다. 난 잠시 멈칫거리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공부를 하다 귀국한지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최근의 소식 한가지를 전한다면 남북방송교류추진위원회 자문위원직을 일주일 전에 맡았는데 아마 북에서는 처음 아는 소식일지도 모르겠네요."라고 대답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남쪽에서는 임종석이겠지만 우리 북쪽에서는 임수경이 최고지요. 그 때 대단했습니다."
"근데 말입니다. 학생위원장은 어떻게 뽑히신 겁니까?" 나는 양순철씨에게 물었다.
"선거로 뽑혔습니다"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아니 북에도 선거를 합니까? 그럼 선거 운동을 하셨겠네요?"
"선거 운동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러면 뭘 보고 뽑습니까?"
"평소에 행실을 보고 뽑지요. 그 사람의 평소 생활 태도와 행동을 보고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뽑습니다." 주변을 살피며 가볍게 웃으며 한말이다.
"그럼 학생회 활동은 대체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약간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매주 일요일은 대학생의 날입니다. 일요일날 웅변 모임이나 강연 모임을 조직화합니다. 과학 소조 활동도 하고요. 그리고 어떤 주에는 구기종목을 조직화하는 체육의 날도 있는데, 이러한 활동은 주로 방과후에 진행되는 것들입니다."

“근데 정 선생은 뭐하십니까?”
“예 잘 아실지 모르지만 학원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학교 보충학습기관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비교적 자세히 설명했지만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겠다.
“학원은 서울 어디쯤에 있습니까?”
“예 서울 상암동 월드컵 메인스타디움 근처에 있습니다. 월드컵 아시죠?”
“월드컵 잘 알죠”
“지금 남쪽은 1년 앞으로 다가온 월드컵 개최준비로 국가적으로 힘쓰고 있습니다. 알고 계시죠?”
“처음 듣습니다.”
나는 남쪽에서 월드컵이 열린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 적잖이 놀랐다. 연세대 기여입학제나 부평대우차 노동자 사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것과는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누군가가 일어서서 술잔을 채우고 건배를 제안한다. `조국통일을 위하여`의 선창에 맞춰 `위하여` 건배사는 남과 북이 한 종류였다. 그런데 내 옆에 앉은 김대송씨(경제학부)는 룡성 배사이다만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술을 잘 못하십니까?"
"예 저는 술을 잘 못합니다."
"아 참, 시시하군요"
"시시하다니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이 말을 어떻게 설명할 지 잠깐 망설였다.
"약간 용기도 없고, 소극적인 사람을 보고 남쪽에서는 시시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술 한 잔도 못하니까 시시할 수밖에요."

"시시하고만요"

이 말이 끝나자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다 내 앞자리에 앉아있던 남쪽의 김태경(한국의 미래, 제 3의 힘)씨가 잠깐 자리를 바꾸자며 한총련 소속 여학생을 데려왔다. (이번 행사 기간내내 우리는 남한, 한국이라는 용어를 자제해야했다. 따라서 `한국의 미래`가 우습게도 `에이치의 미래`로 표기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한총련 여학생은 T-셔츠에 한총련 로고가 선명히 그려진 옷을 입었으므로 북쪽의 학생들은 한총련을 금새 알아보고 반겨 맞았다) 한총련 여학생을 보자 기존의 나를 대했던 태도보다 훨씬 더 반가움을 표현하며 술 한잔을 권한다. 이 여학생이 배사이다를 먹는 김대송씨에게 건배를 제안하자 나에게도 평양술(40도)을 권한다.

"저는 독한 건 잘 못합니다. 그냥 맥주 마시면 안될까요?"
"시시하고만요. 맥주가 술입니까? 음료수지."
좌중은 일시에 웃음꽃이 터졌다. 김대송씨는 한총련 여학생의 제안에 과감한 결단을 하고 술 한 잔을 마셨다. 한총련 여학생이 동석한 후 자연스레 통일 운동에 관한 화제로 질문과 대답이 계속되었다. 리광석(생물전공)씨는 "백만학도가 앞장서 통일운동의 앞길을 열어 제쳐야 한다."는 요지로 힘주어 말했다. 식사시간 말미에 평양 냉면이 배달되었다. 말 그대로 냉면맛이 감칠 맛나게 혀끝을 감돌았다. 냉면을 먹으려 젓가락을 대는 순간 양순철 위원장이 냉면 먹는 방법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수령님께서 냉면 먹는 방법을 이렇게 일러 주셨습니다. 자, 먼저 젓가락으로 냉면을 뜨시고, 그 위에 식초를 뿌리세요. 자, 면발에 식초가 젖었으면 면발을 내려놓으시고 간장과 겨자를 국물에 떨어뜨리세요. 그리고 젓가락으로 휘저으세요. 이렇게 냉면을 먹으면 더욱 제맛이 납니다."

나는 양순철씨가 가르쳐주는 대로 저어서 냉면을 먹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맛있는지 어떤지는 내 입맛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냉면을 맛있게 한 그릇 먹고 나서 에스키모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있는 김대송씨가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한 그릇 더 하시라요."
"배불러서 더는 못 먹겠습니다."
"아니, 내가 먹을 테니 접대원 동무에게 한 그릇 더 갖다 달라 하시오."
"어이 접대원 동무! 여기 정 선생이 냉면 한 그릇 더 먹고 싶다니 한 그릇 더 갖다 주시오."
접대원이 다가와 "정말 한 그릇 더 하시겠습니까?" 옆에 있는 김대송씨가 눈을 깜빡이며 빨리 주문하라고 해 "한 그릇 더 갖다 주세요."라고 말하자 접대원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드셔야 합니다. 다짐할 수 있지요?" "예."라고 대답을 하고 당연히 김대송씨가 더 먹으려고 했기 때문에 별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문제였다.

접대원이 가져온 냉면 한 사발을 놓고 약간의 실갱이(?)가 벌어졌다. 김대송씨와 나 사이에 마치 `형님 먼저 드세요 평양 냉면. 아우 먼저 들게나 평양 냉면`의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를 본 접대원 김은숙(29살)씨가 판관이 되어 나에게 명령했다. "이건 정 선생님 드시라고 가지고 온 거니 정 선생님이 다 드셔야 합니다." 나는 북쪽 사람의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고, 갑자기 위의 양을 늘릴 수도 없고 난감한 상황에 빠져버렸다. 남들은 후식으로 과일과 아이스크림(에스키모)을 먹고있는 사이 나는 꾸역꾸역 냉면 한 그릇을 더 먹어야 했다. 아마 조금만 더 먹었으면 상상하기에도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으리라. 덕분에 나는 후식을 하나도 먹지 못했다. 괴로웠지만 평양 냉면을 한 그릇이라도 더 먹이려는 북쪽 사람들의 호의에 나는 감사했다. 
 

▶남북의 청년학생대표들이 연회장에서 여흥을 즐기고 있는 모습.
[사진 - 정청래 통신원]

술이 한 순배 두 순배가 지나가고 거나하게 술이 오른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자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음주가무의 여흥시간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북쪽에서 `토장의 노래`, `휘파람`, 그리고 음악 무용 대학 전영란씨가 부른 `밀양아리랑`이 약간은 간드러진 하이소프라노로 좌중을 압도했다. 이에 질세라 남쪽 한총련, 범청학련 출신 너댓명이 나가 `바위처럼`, `청춘`, `손잡아보자` 등의 노래를 경쾌한 율동과 함께 부르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흥분한 남쪽의 어느 교수는 갑자기 일어나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가곡을 부르고 있었다. 즐거운 여흥 시간이 계속되자 호텔 앞 광장에서 시간이 늦었으니 빨리 내려오라는 재촉이 성화같다. 자리를 일어나서 나오는데 방금 전 냉면을 한 그릇 더 갖다 준 김은숙씨가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남쪽 어디에서 왔시오?"
나는 습관처럼 가슴에 건 금강산 관광증을 내보이며 "전대협입니다."라고 말하자 "임수경은 잘 있지요? 요즘 뭐합니까?" 하여튼 나는 전대협이라는 말만 하면 곧바로 임수경을 떠올리는 북쪽의 사람들을 보며 임수경이 북쪽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으며 임수경을 얼마나 높고 깊이 생각하는지를 행사 기간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임수경은 영원한 통일의 꽃입니다. 남쪽에서도 열심히 활동해 불씨가 되길 바랍니다." 김은숙씨는 나에게 눈을 마주치며 정 선생도 꼭 같이 하라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놓아주었다.
 
호텔 로비에 마련된 간이 무대에서 북측의 축하 공연이 시작되었다. 기타, 아코디언 연주자 2명과 남자 2명, 여자 2명의 가수들이 `성주풀이`, `고향의 봄`, `휘파람`, `반갑습니다` 등을 멋드러지게 불렀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남쪽의 가수 문희옥씨가 나왔는데 문씨는 반주가 없어 `휘파람`, `반갑습니다`를 약간은 어색하게 불러야 했다. 뒤이어 자신이 준비해 온 반주 테이프에 맞춰 `울고넘는 박달재`등을 불렀다.  가수 김원중씨는 `직녀에게`를 불렀는데 행사장 분위기에 딱 맞는 노래였기에 많은 박수를 받았다. 청년 학생측 좌석에는 아침부터 북한의 TV카메라 기자들이 열심히 촬영을 했다. 
 
금강산 온천

다음 순서로 평양 모란봉교예단의 공연이 있어 부랴부랴 차를 타고 온정각 옆의 금강산 문화회관으로 이동해 가는 도중 교통 정리를 하려 나왔는지 `교통단속`이라는 남한으로 치면 패트롤카가 평양 넘버를 달고 대기하고 있었다. 아마 평양에서 지원 나온 차량이지 않을까 짐작이 갔다. 회관안에는 남과 북이 한자리 건너 건너 앉았는데 내 옆에는 직총(조선직업총동맹) 통일부장이라는 사십대 중년의 남자분이 반가운 인사를 건네며 아는 척을 한다. 내가 직업을 물어보자 전임이라며 통일사업만 한다고 말하였다.

교예단은 서른 네명의 남녀로 구성되어 있는데 평양 교예단 다음의 실력이라고 누군가 전해주었다. 모란봉 교예단의 연기는 예술의 경지를 넘어 환상 그 자체였다. 한 시간이 넘게 눈을 뗄 수 없었고, 손을 펼 수 없었다. 원통 위에서 공 굴리기, 원통 위에서 360도 회전하여 공치고 받기, 안대하고 공치고 줍기, 국제 교예대회에서 특별상을 받았다는 남자 두 명이 한 조가 된 공 던지고 받기, 국제 예술 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장대 예술, 그네를 발판 삼아 30여미터를 날아가는 장거리 비행 시범, 특히 네 명이 한 조가 된 곤봉 돌리면서 서로 주고 받기, 철 접시 받기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임선실(여) 1인 연기인 컵 네 개에 물을 담고 긴 막대기를 입에 물고 공중에 매달려 중심 잡는 연기와 공중 곡예는 사람들의 오금을 못 펴게 했다. 간간이 들려 오는 긴장된 음악은 사람들을 더욱 압도하며 감탄에 감탄을 연발하게 했다. 나는 이러한 예술적 경지의 곡예 공연이 무엇이든 노력하면 될 수 있다는 인간의 한계 상황을 한 단계 넓혀 놓은 초인적 힘의 발현이라 생각했다. 이 공연을 보며 사람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선동으로 역할하기에 너무나 충분한 소재라고 생각했다.  또한 북쪽의 전문성과 어릴 적부터 가능성을 보고 국가가 한 사람의 장래를 장기적으로 준비시킨다는 계획성을 아울러 느낄 수 있었다. 
 
이번 행사의 또 하나의 의미있는 자리가 각 부문별 대표의 간담회였다. 청년 학생은 청년 학생대로 남과 북의 자주 교류를 얼굴을 맞대고 허심하게 의논할 수 있는 귀중한 자리가 이어졌다.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의 봉원익 조직비서를 대표로 네 명의 북측 대표와 한청 전상봉, 한국청년연합 김형주, 전대협 동우회 정명수 회장 등은 온정각 식당에서 8·15 이전 남북 청년 교류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일정한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시간 금강산 온천을 즐길 수 있었다. 이 금강산 온천은 무색무미의 중탄산 나트륨 성분의 온천수로서 피부병과 피부미용은 물론 심장 부담 감소, 소화 불량, 신경통, 류마티스 질환, 근육통, 만성 스트레스에 효능이 대단하다고 한다. 천 년 전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도 이 온천을 다녀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피부염에 걸린 세조도 이 온천을 다녀갔다 할만큼 금강산 온천은 매우 질이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번 행사에 참가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강산 온천탕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풀고 있었다. 탕 안에는 남녀 대중탕과 게르마늄 온탕, 맥반석 한증탕, 옥돌 보행탕, 폭포탕, 련주탕, 노천탕 등이 있었는데 나는 모든 탕을 순회하며 한 번씩 몸을 담궈 봤다. 특히 게르마늄 탕에 앉아 앞을 보니 멀리 금강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을 필두로 세존봉, 채하봉, 집선봉 등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앉아서 보는 것이 좀이 쑤셔 노천탕으로 나가 알몸으로 금강산을 알현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많은 사람들이 부끄럼도 없이 노천탕에 나와 같은 방향에 서서 금강산을 맞이하고 있었다.
 
탈의실에 나와 옷을 주섬주섬 입고 있는데 옷장 위에 덩그렇게 놓인 갓 한 점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최신식 온천 시설 위에 500년을 이어온 고풍스런 갓 한 점(아마 민족 종교인이 쓰고 온 것이리라)이 절묘하게 과거와 현대를 이어주는 민족의 정서로 다리를 놓고 있었다. 탕 안에는 `붙이면 관절이 웃습니다’라는 대화제약 케바논 파스 광고판이 걸려 있고, 밖에는 라끄베르 화장품 선전물도 걸려있는 모습이 금강산 온천탕 또한 서울의 고급 목욕탕을 옮겨 놓은 듯한 인상이었다. 온천탕 2층에는 남북정상회담 1주년 사진전 `만남, 그 가슴 벅찬 순간들...`이 현대 아산 주최와 국정 홍보처 후원으로 열리고 있었는데 거기에 게시된 사진들 덕분에 내가 이렇게 금강산 온천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사진들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온천을 마치고 온정각에 가서 식사를 하니 각 부문별 남북 간담회가 끝나고 각자의 성과를 공유하느라 분주했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도중 가이드는 교예단 공연을 어떻게 보았냐고 물어보았다. "교예단 공연 때는 박수를 열렬히 쳐야 합니다. 북쪽 사람들은 박수가 혈액 순환에 좋은 보약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믿고 몇 달전에 어느 아주머니 한 분이 반지에 박힌 싯가 900만원짜리 다이아몬드 알이 빠지는 것도 모르고 열렬히 박수를 쳐 우리 가이드 모두가 그 다이아몬드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버스에 탄 8조 참가자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북한 방문 이틀째를 마감하고 있었다.
 
청년 학생 간담회 성과에 대한 토론을 마치고 새벽 3시에 숙소로 돌아가 잠을 청하려는데 밖에서 `반갑습니다` 노래가 들려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가 보니 노래소리는 들리지 않고 고요함이 우리 숙소를 에워싸고 있었다. 다시 들어와 베개에 머리를 대니 다시 `반갑습니다` 노래소리가 들려 다시 밖으로 나가 보니 역시 사방은 조용했다. 일종의 환청이었다. 아마 거짓말을 조금 보태 이틀동안 `반갑습니다`라는 노래와 말을 백번은 넘게 듣다 보니 내 귀가 조건반사를 일으키고 있었다. 환청이라도 이렇게 반가운 통일에 대한 소식이 자꾸 들려왔으면 좋겠구나라는 바람을 안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3일차 - 수려한 금강산, 탐승노정
 
이제 금강산이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용계리 닭알 바위를 지나고 있다. 오른쪽으로 천불상, 바리봉, 매바위 등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금강산은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는 지금 금강산 초입, 해금강을 스쳐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술기너미 고개를 넘어 신계천을 지나 창터 솔밭에 이르는 동안 빽빽한 미인송의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창터 솔밭에는 신계사터가 남아있는데 유점사, 장안사, 표음사와 더불어 금강산의 4대 사찰인데 지금은 절터만 남아있다.

▶산행 이후 남측이 준비한 점심을 먹으면서 북측의 축하공연을 함께
즐기고 있는 남북대표들의 모습.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창터 솔밭은 빽빽히 들어선 미인송들로 비행기에서 식별이 불가능하므로 솔밭에 창과 방패를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미인송은 늘씬한 미인의 다리를 닮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금강산과 백두산 시베리아 일대에서만 자라는 재질이 좋은 소나무라 한다. 이 미인송은 옛날 임금님이 죽으면 관으로 쓰여졌고, 조선시대 양반 댁 집을 지을 때 기둥 재료로 주로 쓰였으며 일본 목불상의 재료로 사용되리만큼 그 재질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있단다.

우리가 산행할 금강산 코스는 세존봉과 옥녀봉 사이 구룡연 계곡으로 구룡폭포 계곡으로 알려져 있는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평사면의 계곡이다. 금강문을 거쳐 올라가면서 해설원의 친절한 해설이 뒤따른다. 옥류동은 구슬같이 맑은 물이 흘러 내린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고, 무대 바위는 선녀들이 하강해 춤추며 노래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천화대는 붉게 물든 단풍이 하늘을 물들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나는 어제 나의 짝꿍이었던 장 학생과 초입부터 만나 반갑게 인사했는데 어느새 장 학생은 남쪽 사람들에 있어 가장 인기있는 스타가 되어 있었다. 장 학생과 김일성종합대학 최학철(역사전공)씨와 셋이서 담소를 나누며 금강산을 즐기고 또 즐겼다. 해설원이 잠깐 걸음을 멈추란다. 세존봉 꼭대기에 올라앉은 커다란 바위가 각도를 달리하며 여러 가지 형상을 자아내고 있었다. 독서하는 모습, 화장하는 모습, 아이를 돌보는 모습 등의 다양한 모습을 띠며 우리의 한발짝 한발짝 걸음에 맞춰 변신하고 있었다. 금강산의 기기묘묘한 바위의 형상과 갖가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금강의 절경에 인간의 세치 혀가 얼마나 짧은지를 절감한다. 

이어서 비봉폭포(139미터)가 나타났는데 북쪽도 가뭄이 심해 물의 양이 많지 않았다. 이 비봉폭포는 봉황새가 꼬리를 흔들며 승천하는 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무봉폭포와 봉황새 바위를 지나 산행을 하고 있는데 해설원이 갑자기 나에게 약간 불만스럽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은 왜 탐승노정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십니까?"
"탐승노정이 뭐예요?"
"탐승노정도 모르십니까?"
나는 잠깐 탐승노정 고사성어를 한자 풀이해 보고 머리를 굴려 재차 물었다.
"아 금강산 올라가면서 탐구하는 길과 과정을 얘기하는 거지요?"
"예 맞습니다. 이 금강산 탐승노정은 1947년 김일성 수령님께서 처음 와보시고 이같이 수려한 금강산은 모든 인민들이 와서 보고 가야 할 귀중한 재산이므로 이에 길을 닦을 결심을 하셨답니다. 이 탐승노정은 1948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전쟁 후 완성된 것입니다."

우리는 무용교 앞에서 해설원의 해설을 또 들어야 했다. 작은 계곡과 계곡을 잇는 구름다리였는데 이 다리가 출렁거려 마치 사람들이 춤을 추는 것 같다 하여 김일성 주석이 무용교라 이름지었다 한다. 무용교 옆 은사류(은처럼 가느다랗게 흐르는 완만한 경사의 작은 물줄기) 옆에는 김일성 주석이 김정일 위원장 탄생 50돌을 경축하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백두산 마루에 정일봉이 솟아있고
 소백소 푸른 물은 굽이쳐 흐르누나.
 광명성 탄생하여 어느덧 쉰 돐인가
 문무 충효 겸비하니 모두다 우러르네
 만민이 칭송하는 그 마음 한결같아
 우렁찬 환호 소리 하늘 땅을 뒤흔든다
     1992. 2. 16
    김   일   성
 
구룡폭포
 
수심 6미터 주렴폭포를 지나 드디어 대망의 구룡폭포에 다다랐다. 구룡폭포는 물이 없을 때에 82미터, 물이 많을 때 120미터의 기다란 폭포인데 세계적으로 큰 가치가 있는 것은 구룡폭포를 중심으로 통바위가 150미터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구룡폭포 위에는 작은 연못들이 여덟 개나 있다하여 상팔담이라 부르는데, 상팔담에서 머금었다 뱉는 물이 구룡폭포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다. 이 구룡폭포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김일성 주석은 구룡폭포 앞에 적당한 눈높이로 관폭정을 1991년 지었다고 한다.

구룡폭포 중간 지점에 세로로 미륵불( 彌勒佛)이라 새겨져 있었는데 한자 불자의 마지막 획이 13미터를 타고 내려 왔다. 이는 일제시대 일본인이 새긴 걸로 13미터는 구룡연의 수심 13미터를 의미하고 조선의 정기를 말살하려 구룡폭포 주위의 통바위를 깎아 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설원은 금강산의 십대 미(美)를 설명했는데 나는 세 가지밖에 받아 적지 못했다. 그 세 가지를 해설(?)하자면 금강산은 우리 선조들의 재능을 보여 주는 건축 조각미, 세계의 아름다운 색의 집결체인 색채미, 금강산의 명물인 안개와 구름이 계곡과 봉우리들을 감도는 풍운조화미라고 설명했다. 나는 나머지 일곱 개를 다시 설명해달라 하자 이 해설원은 다음 번에 금강산에 오면 가르쳐 줄테니 다시 꼭 오라고 신신 당부했다.

또한 이 해설원은 금강산의 물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금강산의 물은 떨어지면 폭포요, 누워 흐르면 비단필이요, 떨어져 흩어지면 구슬이요, 고이면 담소요, 마시면 약수’라고 기염을 토했다. 하산 길에 이 해설원은 어느 시인이 금강산에 와서 읊었다며 다음과 같이 주절주절 잘도 외웠다.
 
 높이 솟은 세존봉은
 동남으로 안아막고
 부르기 좋은 옥려봉은
 서북으로 빗겨섰는데
 앞에 보는 천화대야
 뒤에 보는 서옥녀야
 뾰족하거든 곱지나 말거나
 험준하거든 기특하지나 말았으면
 그 앞에 희맑게 내려드린
 숫돌같은 한 장 바위는 옥소반 같고
 그 우로 흘러내리는 흐르는 물은
 구슬이 굴러 내리는 듯
 그 앞에 담긴 물은 넓거든 깊지나 말거나
 깊거든 맑지나 말았으면
 어쩌면 이다지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풀어헤쳐 주는 것이냐

제3의 힘 김태경씨가 가르쳐 줘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 詩는 유홍준 교수의 북한문화유산 답사기에도 실린 것이라 했다. 금강산 산행은 그 자체만으로 감탄을 절로 자아내지만 남북의 만남이 있기에 더욱 주체할 수 없는 감동으로 와닿았으리라. 아쉬운 것은 승선 시각 때문에 서둘러 하산해야 한다는 사실이 금강산에는 예의 없는 불손한 스케줄이었다.  

1달러와 4달러
 
하산길에 소변을 보러 위생실을 찾아갔는데 미화 달러를 내야한다고 했다. 소변은 1달러 대변은 4달러였다. 나는 금강산에 와서 가장 비싼 소변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위생실 앞에는 북쪽 근무자가 지켜 서서 돈을 받고 있었다. 북쪽 사람들은 공짜라고 했다. “북쪽 사람도 돈을 냅니까?” 이 근무자는 얼버무리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남쪽의 한 젊은 여성이 다가오자 “소변입니까? 대변입니까?” 이 근무자는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나와 간밤에 술 한잔을 해 잘 알고 있는 처지에 민망한 상황에 놓인 이 여성은(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어쩔 수 없이 “저기요. 어∼대변이요” “그럼 4달러입니다.” 아 나는 이 기막힌 광경을 보고 말았다. 지켜보고 있으니 이 근무자는 북쪽 사람들에게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위생실 출입을 허용하고 있었다. 달러가 모자라 용변비용을 받는 지 어쩐지는 상상하지 않았다. 다만 좀더 여성들의 부끄럼을 피할 수 있도록 세련되게 배려했으면 하는 방법이 빨리 개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 하산에 동참했다.

화장실 현황(?)을 파악하느라 약 15분쯤 지체했을까? 금강산의 또 다른 파트너 최학철씨가 없어져서 나는 하산 인파를 헤집고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는데 다람쥐 한 마리가 길옆에서 열심히 과자부스러기를 먹고 있었다. 인기척이 있어도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금강산 다람쥐는 아직 험한 꼴을 보지 않아 사람 무서운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금강산은 그 수려함과 빼어난 미모를 품고 있는 데다 순수함까지 보듬고 있었다. 여느 다른 산들의 질투심을 유발 할 수 있는 필요 충분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말 그대로 천하 제일의 명산임에 손색이 없었다.
 
“아니 어데 갔댔습니까?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리....” 최학철씨가 서운한 투로 묻는다.
“아 예 누구하고 얘기좀 하느라구요.” 나는 에둘러 변명했다. 많이 미안했다.
“근데 정 선생님, 요즘 전대협에서는 어떤 통일사업을 합니까? 전에는 굉장했는데 요즘은 잘 안들립니다. 청년 학생이 앞장서서 조국통일 해야지요.”
“아 예 졸업후에는 전대협 출신들이 각 영역에 퍼져 각자 맡은바 역할에 충실하고....”
“한총련 많이 도와주세요. 한총련 학생들의 영웅적 투쟁 소식은 잘 듣고 있습니다.”

최학철씨는 김정숙 휴양소에서 있은 이별식 자리에서 사인 한 장 부탁하자 내 명함 뒷면에 이렇게 적어 주었다.
‘한총련 학우들의 투쟁에 영광 있으리, 다시 만날 날까지 힘있게 투쟁하자’
나에 대한 개인적 글귀를 기대했던 나로서는 약간 실망스러웠지만 어쩌겠는가? 아마 내가 전대협 시절에 방북을 했다면 이들로부터 한총련과 같은 사랑을 받았으리라 위안하는 수밖에.  ‘내가 말이야 왕년에 어쩌구 저쩌구....’ 나는 이미 술집운동권을 거부한 상태니까 아무렇지도 않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은 유효하다.

700여명이 금강산을 훓고 내려오는 길은 많이 비좁았다. 비좁은 틈을 타고 북쪽 한 여학생이 “걸어가는 모습 예쁘게 찍어 주세요.”라며 슬로우 비디오처럼 걸어간다. 새침스런 표정으로. 남이나 북이나 예쁘게 보이려는 여인의 바람은 똑같구나. 허허 이 당연한 진리를 왜 새삼스레 읖조리고 있는지 나 원참.
 
점심식사시간이다. 도시락은 현대측에서 준비한 것이라 했다. 구룡연 계곡에 700여명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앉아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금강산 역사상 이런 광경도 최초이리라. 멀리서 손짓을 하는 장 학생이 보였다. “선생님 어디 계셨어요. 한참 찾았네요.” 챙겨주는 장 학생이 예쁘기도 하다. 등산을 막 시작하려 할 때도 북측에서 준비한 금강산 샘물 한 병과 과자 한 봉지를 가져다 주기도 했다. 우리는 4∼5명이 도란도란 얘기도 하고 즐겁게 사진도 찍고 계곡 바위에서 환송식 노래도 들으면서 한시간 후면 헤어져야 할 아쉬움도 먼저 달래고 있었다.
 
“장 학생, 공부 열심히 하세요. 훌륭한 사람되세요.” 반 농담조로 말을 붙였다. 그 말에는 대답을 않고 “또 오세요. 통일된 조국에서 다시 만나야지요.”

"북의 형제 여러분 남쪽에 한번 오십시오"
 

▶김정숙 휴양소 앞 운동장에서 아쉬운 작별을 나누고 있는
남북청년학생들.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이별식장. 가이드는 자신도 2년 동안 김정숙 휴양소는 처음이라 했다. 휴양소옆 붉은 게시판에는 김일성 주석 대형 사진이 걸려있고 흰 글씨로 빼곡히 무언가가 실려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그 앞에서 열심히 읽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뛰어가려는데 시간이 촉박하다며 남쪽 실무자가 길을 막는다. 에라 모르겠다. 빠른 걸음으로 뿌리치고 접근자세를 보이자 이 친구는 뛰어와서 제지한다. “이러시면 안됩니다.” 단호하다. 구룡폭포 밑에까지 접근하려다 시간이 없으니 하산해야 한다며 제지했던 바로 그 친구가 또다시 내 앞길을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사실 먼저 올라간 참가자들은 폭포 밑에서 손도 적시고 했다.) 미지에의 호기심이 있었다 치더라도 실무자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수고한 실무여자여 용서하시구려.  

11층 높이의 휴양소에는 대운동장이 있어 700여명이 운집하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위대한 김정일 동지를 수반으로 하는 혁명의 수뇌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는 현관 정문앞 운동장 단상에 남북 대표들이 줄지어 섰다. 운동장에는 남과 북의 구분 없이 오직 하나가 되어 손에 손잡고 우리의 소원을 목청껏 불렀다. 왼쪽 손엔 장 학생, 오른쪽 손엔 최학철씨, 노래를 부르다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여학생들, 금방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청년들, 감격과 환희를 접고 다시 남으로 북으로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이돈명 변호사는 “행사기간 동안 더 많이 먹이려고 더 많이 잘해주려고 애쓰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번 토론회는 남북이 갈라진 후 최초의 일입니다. 내가 즉석에서 제안 한가지 하겠습니다. 북의 형제 여러분 남쪽에 한번 오십시오.”불쑥 방남 초정 제안을 하자 운동장의 한민족 성원들은 열렬한 박수로 누구라도 주저함 없이 찬동의 화답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소원을 몇번씩 반복해 부르면서 우리는 작별을 아쉬워했다.

운동장 한켠에는 서로의 마음을 눈물을 매개로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카메라를 매고 취재에 열을 올렸던 어느 여기자도 벌겋게 운 흔적이 역력했다. 비장한 북의 석별의 노래 “잘가세요, 잘있어요....우리 다시 만날 날.....”이 울려퍼지는(정말 울고 있었다. 노래가) 가운데 남쪽은 버스안에서 북쪽은 버스밖에서 손을 흔든다. 이별식을 하기에는 너무도 짧은 30분이 훌쩍 가버리고 우리는 다시 분단의 현실로 갈라져 돌아서야 했다.
 
성과가 많았던 ‘역사풍년’의 금강산 민족대토론회. 청년학생에게는 더욱 큰 의미를 가진 행사였다. 오는 8월 15일 통일축전 이전에 ‘해 내외 청년학생 평화통일 한마당`을 열기로 대체적인 의견 접근을 보았다. 만나서 무릎을 맞대니 어렵게 느껴졌던 일들도 수월하게 풀릴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남북 해외의 모든 한민족 청년, 학생이 민간교류의 물꼬를 트기 위한 통일대회 실무회담을 갖기로 하였다.
 
다시 남쪽으로 향하는 설봉호에 감격을 가슴에 묻고 몸을 실었다. 2박 3일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너무도 긴 여운으로 남아있을 화려한 축제였다. 선상 호프집에서는 흥겨운 노래 소리가 터져 나오고 남남단결의 가능성에 또한 축배를 들었다. 단체별로 부문별로 간단한 결산모임은 긍정과 낙관, 희망과 신심으로 어우러져 거나하게 취하고 있었다.

몇 가지 단상들

그러나 냉철한 문제는 숙제로 남기고 있다. 남과 북이 50년간 헤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르다’는 점을 현실의 문제로 받아 안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것을 다르지 않다고 우겨도 안되고 다르기 때문에 헤어져 살아야 한다고 억지를 부려도 안 된다. `다름의 미학`을 인정하고 다른 것이 합쳐지면 더 커질 수 있다는 넉넉한 가슴이 더욱 필요하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옳고 그름의 차원을 떠나 북의 일사불란함과 남의 다양성, 그것이 현실이다. 그 일사불란함과 다양성이 충돌하지 않고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지혜로움을 찾아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헤어져 있던 기간동안 혹 상호 비방한 부분이 있었기에 "이제 서로 남은 북을 북은 남을 고무찬양 해야 한다"고 `민족대단결`을 호소하시던 문익환 목사가 갑자기 떠올려지는 건 무슨 연유일까? 방에서 혼자 몰래 빠져 나와 갑판에 서서 북이 사라질 때까지 상념에 잠긴다. 금강산에서 젊은이 못지 않게 산을 오르시던 류금수 선생이 하신 말이 귀가에 쟁쟁하다.“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빨리 통일이 돼야 해. 더 오래 살아서 그 꼴을 봐야 할텐데....”
  
많은 흥분과 감동을 그리고 아쉬움과 민족적 과제를 싣고 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설봉호가 서서히 궁치를 틀며 어머니 자궁처럼 두 겹으로 360도 둘러싸서 물결도 잔잔한 천혜의 장전항구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장전항을 에워싼 낮은 산들은 영토를 침범하려는 외적의 거친 파도를 막아서는 민족자주의 수호신처럼 듬직하게 보초를 서고 있었다.  공해를 빠져나온 배 뒷머리가 수직으로 뱃길을 꺽으며 고동을 울리자 희파란 물보라도 수직으로 방향을 꺽으며 우리를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 물살위로 정감 넘치는 이별식장의 마지막 환송사가 포개지고 있었다.

“건강한 몸으로 통일된 그 날 다시 만납시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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