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이계환 대표, 김치관 기자
정리 : 박현범 기자
사진 : 김익흥 기자
동영상 : 조정훈 기자(통일TV)



▲ <통일뉴스> 방북취재단은 지난 12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최근 <신동아>에 의해 납치설이 제기된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을 단독 인터뷰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익흥 기자]

“한마디로 이것은 날조이고 흰 것을 검은 것이라고 하는 궤변입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완전히 조작된 음해, 중상이고 모략이라고 말합니다.”

흰 머리칼에 유난히 짙은 눈썹, 외모에선 여든 살의 풍상이 넉넉히 묻어났지만 말문이 한 번 터지자 그의 눈빛과 어투는 젊은이 못지않게 또렷해졌다.

지난 12일 오전 10시 30분 <통일뉴스> 방북취재단은 월간 <신동아>에 의해 납치설이 제기된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을 평양 인민문화궁전 면담실에서 단독 인터뷰했다.

남측 언론에 보도된 사안에 대해 북측 인사가 직접 반박성 인터뷰에 나선 것은 전례 없는 일로, 기존 북 관련 보도에 있어서 ‘아니면 말고’ 식의 보도관행이 깨지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1997년 8월 입북한 오익제 전 교령은 현재 북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하 편의상 천도교 관련 직책을 따 오익제 고문으로 호칭한다)

오익제 고문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하니, 불쾌한 소식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며 “<신동아>를 비롯한 일부 남조선 출판물들이 제가 납치된 것처럼 보도했다는 그 소식을 듣고 저는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가지 않는다”고 자신의 납치설 보도를 알고 있음을 밝혔다.

<신동아>는 올 10월호에서 전 조선노동당 통일전선사업부 요원이라고 주장하는 탈북자 장철현 명의로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 자진월북 아닌 납치... 공작원이 쓴 가짜 가족편지로 유인”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오 고문이 북에 있는 가족을 미끼로 유인당해 사실상 납치당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오 고문은 “저는 장철현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그 이름조차 모른다”며 “이런 사람하고 제가 어떤 시비를 가리는 것 자체가 저는 수치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자신의 월북 동기와 과정에 대해 털어놨다.

▲ 오익제 고문은 납치설을 전면 반박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익흥 기자]
오 고문은 ‘장철현이라는 탈북자는 선생님께서 단둥과 신의주 간 열차를 탑승했는데, 거기서 부인과 딸을 상봉하던 순간에 열차가 국경을 넘어갔고, 북측에서는 미리 준비한 '조선중앙통신사 보도자료'를 보여주면서 기자회견을 하라고 했고, 오 선생님은 기차 안에서 외신기자가 없는지 소리를 질러가며 찾았다고, 끌려가고 있다는 식으로 외신기자를 찾았다고, 일반이 봤을 때 굉장히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부인하고 “나는 안경호 국장을 만난 일도 없고, 또 나의 아내와 딸은 평양에 와서 한 보름 만에야 만났다”고 반박했다.

오 고문이 입북 후 보름이 지나서야 가족과 상봉했다는 내용은 <신동아>가 납치설을 제기하기 전인 지난해 입북 10년을 맞아 출판된 오 고문의 자서전 ‘위인과 나의 운명’에도 똑같이 담겨있다.

오 고문의 입북과정을 그의 입을 통해 엮어보면 “미국에 간다는 핑계로 서울을 탈출했는데, 1997년 8월 4일날, 이도천이 죽은 8월 4일을 기해서 서울을 탈출해서 미국을 거쳐서 평양으로 오게”됐고, “미국에서 딸의 집을 찾고 싶었지만, 딸을 찾게 되면 딸이 평양을 못 오게 방해를 놓을 것 같아서 저는 연락도 안했다. 곧바로 김운하 씨를 찾아서 중국 베이징으로 가는 비자 신청을 했고, 그리고 가능하면 안내를 해 달라, 비지니스 차원에서 안내를 해 달라고 요청”했고, “김충자 씨의 안내를 받아서 나는 베이징까지 오게 되고, 베이징에서 택시를 불러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으로 좀 가자고 해서 대사관을 찾아서 나는 영주 의사를 밝히고 평양으로 오게 된 것”이다.

오 고문은 이처럼 평양행을 결심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1978년 8월 4일 이도천 천도교 춘천교구장이 평양을 향해 통일행진을 하다 가로막히자 통일을 외치며 분신자살을 한 사건과 1994년 갑오농민전쟁 100돌 남북 천도교 공동행사가 남측 정부에 의해 무산된 사건 등을 들며 “‘김영삼 정권하에서는 안 되겠다, 도저히 합법적인 방법으로 그 어떤 통일행사도 남조선에서는 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남조선을 탈출해서 북조선에 가서 통일운동을 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사실 오 고문의 이같은 과거 행적 때문에 오 고문의 ‘자진 입북’에 대해선 그간 별다른 의문이 제기되지 않았고, 오 고문을 잘 아는 지인들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로 여겨왔다.

‘오씨의 북한행 이후 북측 당국의 참관 없이 그와 만난 남측 인사는 찾을 수 없었으며, 오씨는 남북 천도교 교류 행사에서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정도로 남측 인사들과의 접촉에 제한을 받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신동아>의 주장에 대해서도 베이징공항에서 남측 기자들이 있는 가운데 만담가 조철호 씨를 조우한 사례와 남측 인사들을 만난 다양한 사례에 대해 증언했다.

오 고문은 “조철호도 단독으로 만나보고, 기자들도 단독으로 만나보고, 또 양각도 호텔에서 통일행사 있을 적에 장승학이도 만나보고, 이자현이도 만나보고, 또 진관 스님도 만나보고, 법타 스님도 만나보고, 여러 사람을 저는 개별적으로 호텔에서 만난 일이 있다”며 “그런데 남쪽 인사를 못 만나게 차단했다고 하는 것도 거짓말이 아니냐”고 반박했다.

세간의 논란을 일으켰던 1997년 대통령 선거 직전 김대중 후보에게 편지를 보낸 이른바 ‘안기부 북풍공작설’에 대해서는 “나는 김대중 씨에 대한 존경심과 또 의리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다”고 전제하고 “본의 아니게 김대중 씨에게 피해를 줬는지 모르겠지만, 능히 저는 김대중 씨의 정치적인 능력으로 봐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저는 마다하고 평양을 방문하게 된 것”이라며 “나는 김대중 씨의 대통령 당선을 그때도 축원했고, 또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통일뉴스>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남측 언론과의 인터뷰에 응해준 오익제 고문의 뜻을 존중해 인터뷰 내용을 가급적 가감없이 전제함으로써 진실 여부를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고자 한다. 다만 명칭이나 호칭, 두음법칙 등은 남측 표기로 손질했음을 밝혀둔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 이계환 <통일뉴스> 대표 인사말

▲ <통일뉴스>와의 인터뷰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됐고, 북측에서는 <통일뉴스> 취재를 지원하는 안내원만 배석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익흥 기자]

이렇게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는 남측 인터넷 언론사인 <통일뉴스>에서 왔습니다. 저희가 선생님을 뵙고자하는 이유를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알고 있기로는 선생님께서 1997년 8월경에 북쪽으로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남쪽에서는 선생님의 이른바 ‘월북’ 건을 두고서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남측에서는 대통령선거가 있었습니다. 그때 야당에서는 김대중 씨가 후보로 나왔는데, 그 당시 국민회의라는 당이었거든요. 선생님께서 국민회의의 발기인이자 고문으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거 중에 김대중 씨가 북풍사건에 휘말려서, 나중에 물론 대통령이 되기는 했지만, 무척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거기에 선생님께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11년이 지난 최근에 남측 월간지인 <신동아>에서 선생님의 월북 건을 두고서 자진 월북이 아니라 북측에 의해서 납치되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11년이 지났는데 선생님께서 또 남측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습니다. 11년 전에 자진월북이냐, <신동아>에 나온 북쪽에 의한 납치냐는 사실이 다릅니다. 하나는 참이고 하나는 거짓이라고 봅니다. 언론의 역할은 진실을 밝히고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저희가 선생님을 만나고자 한 이유는 당사자로, 논란의 와중에 무척 곤혹스러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진실을 알려야 되는 입장에서 선생님 말씀을 직접 듣고자 왔습니다. 이것이 취지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을 해 주시고, 자세한 것, 부족한 것은 질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오익제 北 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 고문 모두발언

▲ 오익제 고문은 20분 정도 자신이 입북하게된 배경과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익흥 기자]

먼저 여러분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통일을 위해서 헌신하는 여러분에게 저는 존경해 마지않습니다.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제 나이 이제 80입니다. 흔히 말하듯 인생을 총화할 그런 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60 청춘, 90 환갑’을 구가하는 공화국에서는 보시다시피 저는 노당익장(老當益壯)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사무실에 출근하니, 불쾌한 소식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동아>를 비롯한 일부 남조선 출판물들이 제가 납치된 것처럼 보도했다는 그 소식을 듣고 저는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가지 않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해서 국군포로니 여간첩이니 인권문제니 떠들면서 별의별 모략을 꾸며대더니 이제는 이 오익제까지 납치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니 기가 막히고 이러한 너절한 음해와 모략을 꾸미는 자들이 과연 어떤 놈들이냐, 치솟는 분노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다 알다시피 고향이 평안남도 회창군 대곡리입니다. 본의 아니게 서울로 나간 저는 그동안 언제나 고향이 그립고 또 부모처자가 그리웠습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와서 남조선 언론에서는 북조선 붕괴설이 떠돌면서 매일과 같이 북조선에서는 고난의 행군으로 헐벗고 굶주리고 있다는 소식이 신문지상을 어지럽혔습니다.

그러나 애당초 붕괴설을 믿지 않았습니다. 고대 로마가 망한 것이 식량이 모자라서 입니까? 장개석이 중국본토에서 쫓겨나서 대만으로 쫓겨 간 것이 무기가 모자라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정신도덕적인 부패 때문에 망했지, 역사상 식량난이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망한 예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붕괴설을 믿지 않고, 오히려 북의 고향이 있는 부모, 처자도 어려움을 겪고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더욱 고향이 그립고 살아도 같이 살고 굶어도 같이 굶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향을 찾아서 북으로 오게 됐습니다.

다른 또 하나는 천도교에서 말하는 ‘신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천도교에서는 인내천(人乃天)을 종지로 하면서 그것을 실천하려면 신인간(新人間)이 되어야 한다, 신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높은 도덕적 수양을 쌓을 뿐만 아니라 애국애족의 넋을 지내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저는 김일성 주석의 불후의 고전적 노작 ‘세기와 더불어’를 접하게 됐습니다. 거기서 저는 그 회고록을 읽고 또 읽으면서 위대한 김 주석을 흠모하게 되고 ‘통일의 성지는 평양이구나’, 김 주석의 회고록에서 저는 신인간이 될 수 있는 모든 정답을 찾게 됐습니다. 그래서 회고록을 거듭 읽는 과정에 저는 북조선에 대한 그리움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공화국의 인민들과 함께 땀 한 방울이라도 흘리고 또 마음을 합쳐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동기의 하나는 1978년 8월 4일로 기억이 됩니다. 저는 그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날 천도교 춘천교구장 이도천이라는 사람이 임진강가에서 분신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는 평양을 향해서 통일행진을 하다가 임진강가에 이르러서 반통일 분자에 의해서 저지를 당하자 그 자리에서 경건하게 통일기원 기도를 올리고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자살했습니다. 그는 불에 휩싸이면서도 꼿꼿이 선 채로 통일을 염원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쓰러지면서 ‘통일! 통일!’ 하면서 외치면서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대서특필해야 할 언론은 무관심 했습니다. 1단 기사로 축소보도한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 노동운동을 하다가 영웅적으로 분신자살한 전태일에 대해서는 대서특필한 언론이 통일에 대한 몰지각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어떤 압력에 의해서 축소보도한 것이냐? 어떻든 이것은 언론의 무책임한 자세입니다. 따라서 저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 때 이도천의 뒤를 따라야, 나도 뒤를 따라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러나 언론의 무관심으로 인해서 내가 이도천의 뒤를 따른다고 해야 누가 그것을 알아주며, 누가 통일의 불길을 지펴 올릴 수 있겠는가? 저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통일을 위해서 몸 바치려면, 영웅이 되려면 누가 알아주건 말건 서슴없이 몸을 내 던져야 하는데 저는 공명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저는 비겁한 사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부터 통일을 위해서 한 몸 바치겠다는 생각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대서특필로 ‘통일을 위해서 오익제가 돌아갔다, 희생했다’는 통일의 불길을 지펴 올릴 수 있는 그런 큰 계기를 마련해야겠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1994년이 갑오농민전쟁 100돌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이 100돌 기념행사를 남북의 천도교인들이 공동으로 기념행사를 하되 판문점에서 하자는 합의를 천도교청우당 류미영 위원장과 합의를 봤습니다.

합의를 보고 기쁜 마음으로 서울로 돌아가서 합의내용을 당국에 통보하면서 판문점 공동기념행사를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분서주하면서 그때 안기부장으로 있던 외국어대학 교수 김덕도 만나보고, 외무부 장관이었던 한승수도 만나보고, 통일원 장관이었던 한완상도 만나서 남북 천도교의 갑오농민전쟁 100돌 기념행사를 성사시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다 ‘OK’했습니다. 다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청와대 정종욱 안보수석비서가 ‘NO!’ 안 된다고 했습니다. 왜 안 되냐? 김영삼 정권이 ‘핵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북조선과 악수할 수 없다, 모든 남북관계는 차단이다’ 이런 명령을 내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김영삼 대통령 하고 만나서 담판을 하자고 상면을 요청했습니다. 그 전에 김영삼이 대통령되기 전까지만 해도 저를 찾아와서 ‘무엇이든지 제기하십시요, 다 들어주겠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 것도 없다. 청와대를 개방하라, 내가 만나고 싶은 때 언제든지 응해달라’ 이런 요청만 했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후에 제가 면담을 요청하자 딱 거절하는 겁니다.

이런 배신자와는 그 후에 상종할 생각이 안 들었습니다. ‘김영삼 정권하에서는 안 되겠다, 도저히 합법적인 방법으로 그 어떤 통일행사도 남조선에서는 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남조선을 탈출해서 북조선에 가서 통일운동을 할 수밖에 없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계시는 통일의 성지는 평양이다. 평양으로 가는 길 밖에 없다는 이런 생각을 더욱더 굳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양으로 가는 길을 모색하던 끝에, 처음에는 중국을 통해서 평양방문을 하려고 김포공항에 나갔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안기부 당국에서 출국정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김포공항에서 여권을 빼앗겼습니다. 참 기가 막힌 일이죠.

돌아와서 저는 진정서를 냈습니다. ‘안기부장 권영해, 여권을 돌려 달라. 미국의 딸을 만나기 위해서 미국에 가봐야겠다. 그러니까 여권을 돌려 달라’ 진정서를 냈더니 권영해가 여권을 돌려줬습니다.

그래서 여권을 돌려받고 서울 탈출의 기회를 노리다가 1997년에 와서 북조선 붕괴설이 떠돌고, 고난의 행군이 매일처럼 신문지상을 어지럽힐 적에, 북조선이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을 적에 저는 평양방문을 실현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미국의 딸을 보기 위해서 미국에 간다는 핑계로 서울을 탈출했는데, 1997년 8월 4일날, 이도천이 죽은 8월 4일을 기해서 서울을 탈출해서 미국을 거쳐서 평양으로 오게 됐습니다.

평양으로 올 적에 그때 김운하 씨와 김충자 씨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 후에 소식을 들으니까 우익깡패들이 김은하 씨의 사무실로 몰려가서 돌팔매질을 하고 사무실의 유리창을 깨는 난동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인권을 존중한다고 하는 미국 땅에서 이러한 파쇼적 난동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저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에 있는 내 딸도 무사하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도 하고, 또 인권 부재인 서울에서 우리 아들, 딸들이야 더 말할 나위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돼서 참으로 처절한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오익제 고문은 팔순 고령에도 불구하고 건강했으며, 몇 해전 다리를 다쳐 걷기가 약간 불편하다고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익흥 기자]

저는 북조선에 와서 여러 곳을 돌아봤습니다. 처음 느낀 것은 뭣이냐? 파란 하늘입니다. 그때 기자가 첫인상이 뭐냐고 물어봤을 때 “파란 하늘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파란 하늘'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창창한 미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막혔던 숨이 확 풀리고 살맛나는 세상을 느끼게 됐습니다.

저는 북조선에 와서 방방곡곡을 다 돌아봤습니다. 농촌도 돌아보고, 도시도 돌아보고, 강원도 금강산, 함경도 칠보산, 경성도자기공장, 주을온천 지금은 온천군이라고 하죠. 거기까지 가봤습니다.

가는 곳마다 모든 인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위대한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 두리에 일심단결하고 장군님을 따라서 굳게 뭉쳐 있는 것을 보고서 저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장군님께서 선군정치를 펼치고 계시는데 이 선군정치야 말로 그 어떠한 어려움도 대적도 물리칠 수 있는 보검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따라서 지금 북조선은 세계 유일 초대국이라고 하는 미국과 당당히 맞서서 핵보유국의 지위에 올라서게 되고,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성대국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공화국에 와서 여러 가지 장군님의 배려와 믿음을 받아 안게 됐습니다. 저는 김일성상을 비롯해서 조국통일상, 국기훈장, 수령님의 존함이 새겨진 금시계, 모든 사랑과 배려를 받아 안게 되고, 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 고문으로 일할 수 있도록 배려를 받게 되고, 제가 일흔 살이 됐을 적에는 칠갑 생일상도 장군님께서 보내주시고, 그리고 궁궐 같은 살림집과 최고급 승용차를 배려받게 됐습니다. 그리고 명절 때마다 선물을 받아 안고, 또 저는 장군님에게 감사의 편지를 여러 번 올렸는데, 그때마다 장군님께서 감사하다고 하는 친필답신도 받아 안았습니다.

이리해서 저는 공화국에 와서 방방곡곡을 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무엇이냐? ‘모든 사람이 선남선녀(善男善女)가 되었구나’, 천도교에서는 가장 이상으로 하는 인간상이 뭐냐 하면 신선입니다. 지상신선(地上神仙). 신선이라는 것은 뭡니까? 선남선녀입니다. 공화국의 모든 남녀노소가 선남선녀가 돼서 무병장수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이것은 장군님이 펼치시는 선군정치가 안아온 결실입니다.

저는 이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겠지만, 여생을 깡그리 장군님의 높은 통일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장군님을 받들어서 여생을 통일운동에 바치고자 합니다.

저는 남쪽에 있으면서도 통일을 위해서는 과연 어떠한 방도가 있겠는가, 많이 모색하고 모대겨 왔습니다. 그러나 똑똑한 방도가 없었습니다. 다만, 저는 창조적 통일론, 남과 북이 어떤 합의를 봐야 하지 않겠느냐? 합의를 보려면 어떤 절충이 필요하다. 그러나 절충은 모방이다. 물론 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좋지만 모방만 가지고는 안 된다. 창조적인 통일이어야 하는데 그게 어떤 것인지 미처 다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6.15 통일선언을 통해서 정답을 얻게 됐습니다. 우리 민족끼리, 연방제와 연합제를 절충한, 그러니까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연합제를 합치는 거기에서 명답을 찾게 되고. 장군님이야 말로 통일의 구성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됐습니다. 따라서 저는 남은 여생을 장군님을 받들어서 이 한 몸 깡그리 바칠 결심과 각오입니다.

제가 한마디로 공화국의 영주하게 된 것은 일시적인 충동이나 순간적인 어느 누구의 권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의 결심으로 이것이 굳어져서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 질문 답변

▲ 오익제 고문은 <통일뉴스>의 질문에 답하며, 납치설에 대해 중상 모략이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사진 - 통일뉴스 김익흥 기자]

□ 통일뉴스 : 질문은 모두 월간 <신동아>에 나왔던 내용을 그대로 전해서 여쭤보는 것입니다. 월간 <신동아> 10월호에 자신을 통전부 요원이었다고 자칭하고 있는 장철현이라는 탈북자가 기고글을 썼습니다.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오 선생님께서는 부인과 딸의 편지를 전달받은 뒤, 가족을 만나게 해주겠다며 오 선생님을 중국으로 유인했고, 여기에서 다시 중국에 가봤더니 가족이 없어서, 다시 안경호 조평통 서기국장이 비밀리에 오 선생님을 만나 북-중 국경 지역에서 가족이 기다리고 있으니 만나게 해주겠다며 유인했다는데 사실입니까?

■ 오익제 : 어처구니가 없구만요. 거짓말도 어지간히 비슷하게 말해야 하는데. 저는 장철현이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그 이름조차 모릅니다. 이런 사람하고 제가 어떤 시비를 가리는 것 자체가 저는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날조이고 흰 것을 검은 것이라고 하는 궤변입니다. 한 마디로 이것은 완전히 조작된 음해, 중상이고 모략이라고 말합니다.

□ 통일뉴스 : 구체적으로 반박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장철현이라는 탈북자는 선생님께서 단둥과 신의주 간 열차를 탑승했는데, 거기서 부인과 딸을 상봉하던 순간에 열차가 국경을 넘어갔고, 북측에서는 미리 준비한 '조선중앙통신사 보도자료'를 보여주면서 기자회견을 하라고 했고, 오 선생님은 기차 안에서 외신기자가 없는지 소리를 질러가며 찾았다고, 끌려가고 있다는 식으로 외신기자를 찾았다고, 일반이 봤을 때 굉장히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 오익제 : 전혀 그런 일이 없습니다. 저는 안경호 국장을 만난 일도 없고, 또 저의 아내와 딸은 평양에 와서 한 보름 만에야 만났습니다. 저는 그동안에 묘향산에 갔다가 평양에 오니까 ‘지금 아내와 딸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평양에 와서 한 보름만에야 만났는데 이것은 완전히 날조이고 거짓말입니다.

□ 통일뉴스 : 그러니까 선생님께서는 중국에서 평양으로 오는 과정에서 가족을 만난 적이 없다는 것입니까?

■ 오익제 : 네, 없습니다.

□ 통일뉴스 : 선생님께서는 북에 와서 서울로 보내달라고 단식에 들어가고, 부인과 딸이 손수 만들어 준 음식도 먹지 않고, 음식을 거부하다가 북측 정부로부터 거의 사형수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고 이 사람은 증언하고 있는데 사실입니까?

■ 오익제 : 저는 보시다시피 남조선에 있을 때부터 고혈압과 또 당뇨병을 앓았는데 여기에 와서 최상급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그동안에 저는 눈이 나빠져서 레이저 수술을 해야겠다고 해서 제가 1998년인가 1999년에 베이징에 가서 안과수술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때 비행기 안이 1등칸이었지만, 여러분 조철호라고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만담가. 나이 많은 분인데. 만난 것 아시죠? 그 분이 취재차로 기자들과 함께 비행기 안에 같이 타 있더만요. 그래 내리면서 “조 박사 웬일이요. 나 모르겠소?”하니까 그 양반이 “아이고 선생님이 웬일입니까?”해서 “나 지금 베이징 갔다가 수술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요” 이렇게 이야기한 일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기자들에게 “당신들 뭘 하오? 특종감 아니오? 찍으시오, 얼마든지 찍으시오”하면서 비행에서 내리면서 그때 조철호와 같이 사진도 찍은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남조선 기자나 또, 탈출하려면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많았지만, 저는 지금 말하다시피 그런 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공화국에 지금 영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완전히 날조입니다.

□ 통일뉴스 : <신동아>에서는 선생님께서 북으로 오신 후에 남측 인사들을 접촉하는 것을 제한시키고 있다는 이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 오익제 : 그것도 날조입니다. 저는 얘기했다시피, 조철호도 단독으로 만나보고, 기자들도 단독으로 만나보고, 또 양각도 호텔에서 통일행사 있을 적에 그때, 여러분 장승학이라고 아는지 모르겠네, 장승학이도 만나보고, 이자현이도 만나보고, 또 진관 스님도 만나보고, 법타 스님도 만나보고, 여러 사람을 저는 개별적으로 호텔에서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남쪽 인사를 못 만나게 차단했다고 하는 것도 거짓말이 아닙니까?

□ 통일뉴스 : 안 여쭤볼 수가 없는데,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후보에게 편지를 보내서 이것이 ‘안기부의 북풍공작이다’ 이렇게들 선전을 했는데요.

■ 오익제 : 저는 김대중 씨에 대한 존경심과 또 의리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도, 그때도 마찬가지지만. 본의 아니게 김대중 씨에게 피해를 줬는지 모르겠지만, 능히 저는 김대중 씨의 정치적인 능력으로 봐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저는 마다하고 평양을 방문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저는 김대중 씨의 대통령 당선을 그때도 축원했고, 또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다만 분열이 되면 승산이 없다, 그때 김종필 씨와의 연대성을 이루면 능히 승산이 있다 하는 것을 강조했었습니다.

□ 통일뉴스 : 말씀을 쭉 해 주셨는데 딱 한 부분이 지금 비어 있습니다. 결행을 해서 미국까지 가신 말씀을 했는데, 미국에서 어떻게 해서 평양까지 들어오셨는지만 간략하게 말씀해주십시요.

■ 오익제 : 미국에서 딸의 집을 찾고 싶었지만, 딸을 찾게 되면 딸이 평양을 못 오게 방해를 놓을 것 같아서 저는 연락도 안했습니다. 곧바로 김운하 씨를 찾아서 중국 베이징으로 가는 비자 신청을 했고, 그리고 가능하면 안내를 해 달라, 비지니스 차원에서 안내를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김충자 씨의 안내를 받아서 저는 베이징까지 오게 되고, 베이징에서 택시를 불러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으로 좀 가자고 해서 대사관을 찾아서 저는 영주 의사를 밝히고 평양으로 오게 된 겁니다.

▲ 인터뷰를 마치고 인민문화궁전 앞에서 대기한 차량에 오르고 있는 오익제 고문.
[사진 - 통일뉴스 김익흥 기자]

□ 통일뉴스 : 선생님 가족들은 잘 지내고 계십니까?

■ 오익제 : 예. 여기 와서 처도 만나고 또 딸도 만나고. 그런데 처는 몇 해 전에 돌아갔습니다. 지금 딸하고 같이 삽니다.

그런데 저는 늘 생각합니다. 불교에서는 백팔번뇌라고 있습니다. 백팔번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해탈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나는 해탈이라는 용어보다도 속세를 벗어나기 위해서 백팔번뇌를, 잡념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이 사사로운 감정을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해방이 돼야 된다. 민족해방, 계급해방에 앞서서 나 자신이 해방이 돼야 된다. 모든 정신적인 잡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해탈이 돼야 된다. 말하자면 해방이 돼야 한다. 이걸 말하고 싶습니다.

□ 통일뉴스 : 이제 인터뷰는 다 끝났습니다. 남측 지인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십시요.

■ 오익제 : 저는 파란 하늘, 살맛나는 평양에 와서 하늘은 푸르고 길가에는 꿩이 퍼덕이고, 새가 우짖고, 토끼와 다람쥐가 춤추고, 살맛나는 세상을 만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지성인들에게 꼭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인간화라고 아시죠? ‘인간화’. 지성인은 지금 현대인은 인간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인간화는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일연이 쓴 단군신화에 의하면 하늘에 있는 환웅천황이 인간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늘나라에 사는 것에 싫증을 느끼고, 땀 냄새 나는 인간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인간화입니다. 그리고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이것이 인간화입니다. 그러니까 야만이 문명한 인간이 되기를 원했고, 신선이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이것이 인간화입니다.

원시인들이 불을 발견하고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로 지금 오늘날 인간은 인간성 상실로 말미암아 비인간화, 서구문명의 오늘의 현실은 비인간화 시대입니다. 이 비인간화 시대로부터 벗어나려면 인간화를 촉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홍익인간(弘益人間), 홍익인간의 이념을 되살려야 합니다. 남조선에는 홍익대학이 있죠? 그럼 홍익이란 뭐냐? 여기에 대한 깊은 연구가 지금 전혀 없습니다. 이것을 연구해야 합니다. 홍익인간이라는 것은 뭐냐? 이건 사사로운 개인의 이익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개인의 이익이 아닌 공익, 말하자면 사회적인 이익이 홍익입니다.

그러면 사회적 이익은 어디에서 실현할 수 있는가? 그때에는 사회라는 용어도 없었고 개념도 없었지만, 사회주의만이 홍익인간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홍익인간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인간화 시대를 되찾기 위해서도 우리는 사회주의를 따라야 합니다.

□ 통일뉴스 : 이렇게 나와 주셔서 인터뷰에 응해 주신 것 다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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