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의 경우 첫 인상이 중요하다. <통일뉴스>의 이번 세 번째 방북취재(12월 10일-13일)는 첫날부터 평양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도착한 첫날 평양순안공항에서 숙소인 보통강려관으로 가는 도중 지난 두 차례의 취재 때와는 달리 다소 ‘이례적인’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평양시내에 차량이 많이 보인 것이다. 다소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자동차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둠 속에서 차들의 헤드라이트는 거리 양 옆의 살림집이나 상가의 불빛보다 강렬했다. 평양은 보통 칠하지 않은 아파트와 불빛 적은 밤거리, 시민들의 칙칙한 옷차림 등으로 회색도시로 불린다. 게다가 지금 계절이 겨울 초입이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저녁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물론 아직 전반적인 분위기는 그렇다. 그간 몇 차례의 방북으로 평양이 ‘긴장된’ 에너지난에서 점차 호전되고 있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이번만큼은 매우 실감나게 다가왔다.

다음날 아침부터 취재차 돌아다닌 평양 시내는 잘 정리 정돈되어 있었다. 북한은 지난 2002년부터 짧게는 올해 9.9절 60돌에 맞게, 길게는 2012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시기에 맞게 ‘평양시 개건.현대화 사업’을 진행해 왔다. 올 여름만 해도 평양 시내는 궤도전차의 레일을 중앙에서 양 옆으로 옮기는 공사로 인해 온 거리가 파헤쳐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대부분의 도로는 포장됐고 궤도전차가 새로 만든 길로 운행하고 있었다. 보도블럭도 교체돼 있었고, 대동강변 ‘유보도’(遊步道)도 말끔히 정리돼 있었다. 어느 구간엔 살림집과 주요 문화시설들이 깨끗하게 리모델링 돼 있었다. 평양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양시내 약동의 징표는 단연 류경호텔 재공사다. 평양시내 어디에서나 고개만 들면 105층 높이의 이 피라미드형 건물이 보였다. 공사가 중단된 채 방치돼 있을 때 그건 하나의 흉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재시공중. 바깥 면에 붙기 시작한 유리창이 햇빛에 부딪칠 때마다 물고기 비늘마냥 빛을 발했다.

평양 시내는 바쁘고 부산했다. 시민들의 발걸음은 활기찼다. 거리엔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고, 군고구마나 솜사탕 매대에는 줄지어 있었다. 버스나 궤도전차 정류장엔 인파로 붐볐으며, 대중교통수단은 항상 ‘만원’이었다. 특히 점심시간 때 옥류관 앞은 인파로 붐볐다. 대연회장은 평양냉면을 드는 시민들로 꽉 찼다. 이 광경은 묘했다. 보통 남측에서 대규모 방북단이 올 경우 이곳은 남측 손님들의 독차지였다. 그래서 옥류관 대연회장은 남측 방북단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처럼 북측 식객들의 것이었다! 평양시 일대에 전력을 공급하는 평양화력발전소와 동평양화력발전소가 굴뚝에서 연기를 내뿜으며 가동됐다. 평양 거리의 부산함을 한층 더해주는 것은 앞에서도 밝혔듯이 많은 차량들이다. 거리엔 자동차 행렬이 이어졌고, 관공서 주차장도 ‘만차’다. 차량과 더불어 약동하는 평양을 느낄 수 있는 광경은 운동선수(?)들의 달리기다. 패션풍의 칼라풀한 운동복을 착용한 선수들이 평양시내와 우리가 묵었던 보통강려관 일대를 뛰어다녔다.

북한은 지난 세기 말, 1990년대 초반부터 불어 닥친 사회주의 나라들의 몰락, 미국의 대북 고립압살정책, 김일성 주석 타계에 따른 대국상(大國喪), 그리고 자연재해에 따른 식량난 등 온갖 어려움 속에 ‘고난의 행군’을 겪었다. 아직 그 고통과 피해가 말끔히 거셔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평양이 매우 안정적으로 탈바꿈을 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평양은 미국과의 핵협상에 관계없이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고 또한 남측의 도움 없이도 건설하고 있었다. 이런 참에 남측에서 일부 대결론자들의 인도적 대북지원이 되어야 할 식량의 지렛대 사용이나 6자회담에서 ‘행동 대 행동’을 벗어난 대북 중유제공 중단결정 등은 부질없어 보였다. 남북관계 경색과 북핵 협상의 교착국면 속에서도 평양은 아랑곳하지 않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방북취재 마지막 날, 평양순안공항을 향하다가 둘러본 류경호텔은 북측 인부들의 외벽 유리창 부착공사로 한창이었다. 기자들이 탄 차가 커브를 틀며 공항으로 향할 때 그 유리창들이 한 순간 햇볕을 받아 일제히 합창하듯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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