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태 (남북치의학교류협회 상임대표, 수필가)

이 연재 글은 치과의사인 이병태 원장이 지난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3박4일간 ‘평화3000’(이사장 신명자)이 주최한 북측 지원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참관했다가 쓴 방북기이다. 이 방북기는 평양-백두산-묘향산-청천강의 순서로 7회에 걸쳐 연재될 것이다. 현재 이병태 원장은 치과의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아울러 치의학 관련 남북교류사업도 하면서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 편집자 주

백두산(4) 백두산을 오르면서

▲ 백두역과 산악궤도차. [사진-이병태]

나는 백두산(장백산)을 중국 쪽으로 열 번은 넘고 스무 번은 안될 만큼 올랐다. 열 번까지는 헤아렸지만 그 이후는 그냥 다닌다.

공통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어서 좋았다. 지금 중국은 장백산 관광특수를 누리고 있다. 거기는 중국 거대 인민적 인구 때문에 이어지겠지만 한계가 있다고 본다. 반면에 지금 내가 본 삼지연 공항  백두산역  향도역까지의 접근 구간은 한산하기 그지없다. 적절히 활용하면 이 하찮은 한 개인의 눈에도 유람객과 참관단, 그리고 산악인이 무수히 찾을 것이라고 느꼈다.

삼지연공항은 평양순안공항과 직결되며, 백두산에 접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항로이다. 백두역은 삼지연공항에서 소형버스로 1시간여 정도 가면 있다. 고원지대를 달리고 벌판 같고 사막 고원 같은 지대에 있는 궤도열차(북측 용어로는 궤도식 삭도) 출발역이 있다. 백두역이다.

여기서 45도 경사로 궤도가 1.3Km 직상(直上)하듯 오르면 향도봉(2,712m) 정상 바로 밑에 하차한다. 여기가 백두산상 향도역이다. 우리 모두는 버스를 타건 삭도를 타건 향도역 또는 그 고산지대 주차장에 내리는 것이다. 이 향도봉에서 남서쪽 1.1Km 지점에 백두산 정상 백두봉이 있다.

백두산(5) 나의 공상, 실버관광 그리고 청소년수련장

▲ 백두산 정상에 있는향도역. [사진-이병태]

적당한 비탈은 스키 슬로프, 삼림 중간 중간은 청소년의 심신단련을 위한 야영캠프와 통나무집, 실버노년들의 휴양지 등에 알맞은 지역이 허다했다. 장백산보다 유리한 남향 기슭이 내 가슴을 터지도록 반겨주었다.

적당한 곳으로 궤도전차, 케이블카를 건설하여 자연과 어울리게 하면 4계절, 365일 내내 이 백두산을 찾는 사람들이 그치질 않을 것을 확인했다.

난개발, 마구잡이로 파고 깎고 하는 파괴적 건설이 아니라면 조금은 황량해 보이는 현재 정상부근의 현황과 환경은 뛰어난 경관, 감격과 추억을 주는 명승지가 될 것을 확신했다. 자연에 안기는 것처럼 좋은 일은 없기 때문이다.

비바람이 불어도 곳곳에 아늑하게 또는 편히 쉴 수 있도록 시설하면 된다. 때로는 폭풍설이 치고 거센 풍우가 몰아친다 해도 대피소에서 지낼 수 있어야 하고 안전요원을 배치해서 모두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한다. 여기 백두산 고원지역에 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고1 때(1958) 지리산 노고단을 없는 길을 찾아 오르던 길이 지금은 고속도로로 변했다. 이 고요한 백두산 고원이 웃고 있음을 보았다. 왜 그렇게 평온한지. 그리고 깨끗한지.

백두산(6) 백두영봉에서

▲ 천지. 앞에 비류봉, 천지 건너 승사하, 오른쪽 제일 높은 중국측 천문봉이 보인다. [사진-이병태]

나는 백두산 정상에 올랐다.

이런 식이면 서울서 당일치기(일일) 백두산 구경이 가능하다. 행정의 99.9%를 비행기와 차를 타고 오른 것이다. 그야말로 날라리 유람이다. 하지만 내 나이와 현재 남북관계를 따져보면 어찌 날라리라고만 하겠나.

나는, 중국땅에서 올랐던 천문봉, 천활봉, 승사하 등을 우리 땅에서 중국 쪽을 향해 응시하고 있었다. 감회가 다르다. 관면봉, 철벽봉, 와호봉 등을 바라보는 위치가 바뀌었다. 좌우, 그러니까 동서가 바뀐 것이다. 중국에서는 오른쪽에 있던 봉우리들이 왼쪽에 있는 것이다. 나는 주변 몇몇 사람들에게 봉우리 이름을 일러 주었다. 어쩐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봉우리 이름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2003년 발해의 옛성과 발해 조상들이 이용한 바다같이 넓은 싱카이호(與凱湖) 그리고 밀산에 들렀던 일과 그 여운이 만주 벌판과 함께 뒤통수까지 꽉 찬 느낌에 열까지 받았다.

나는 이제 백두산의 남과 북을 다 올랐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99.9%를 그냥 오른 것이다. 나의 투정어린 이런 발언에 선배와 일행들이 이구동성이다.
“이젠 힘이 없으니 다행한 일이여.”
그 말이 나에게도 맞는 말이었다.

▲ 천지에 오른 일행들. 가운데가 필자. [사진-이병태]

백두봉, 장군봉, 병사봉은 동의어이다.
우리 일행은 백두봉 바로 남향 자락에 앉아 과자(초코파이), 음료(팩소주)로 요기하고 목을 축였다.

“저 당뇨환자인데 약으로 먹게 좀 주십시오.”
점잖은 노인이었다. 그러자 젊고 나이 든 사람 없이 좀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눈치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달라는 표정들이었다.

“던져도 되겠습니까?”
모두가 한 발짝 움직이기가 싫고 지친 상태였다. 해발 3,000m 가까운 곳이며, 새벽(5시 30분)에 눈을 뜨고 아침에 평양에서 출발하여 비행기와 자동차로 이동하여 시달렸기 때문이다.
12시가 넘었다. 배고플 때다. 생리적 욕구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던져주면 떨어뜨린 것을 얼른 주어들면서 고맙다고 했다. 미안했지만 피차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말이지 그분들이 초코파이 하나를 받아들고 좋아했다. 서울에서 같으면 상대에게 그 하찮은 과자봉지 하나를 어떻게 던져줄 수 있겠는가.

참으로 미안했지만, 분위기와 표정으로 보아선, 그분들이 이해하고 즐거워해서 좋은 분위기였다. 초코파이 1상자를 나눠 먹었는데 최근에 와서 지상 최고의 파티였다. 나도 일행도 하나씩 먹었기에 기분이 좋았다.

하늘은 청명, 천지는 유리알, 봉우리들은 우뚝, 총천연색으로 전경이 눈을 놀래키고 있었다. 백두봉을 뒤로 하고 내려올 때 나는 중얼거렸다.
“또 와야지.”

백두산(7) 영봉의 높이, 봉우리 이름들

나는 봉우리 이름 알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이야기해 줄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늘 선배들을 따라 다녔었다. 그렇지만 스스로 찾아 아는 경우가 많았다.

▲ 중국의 『장백산지』(1989). [사진-이병태]

▲ 졸저 『북경 연변 그리고 백두산』(1992 증보판). [사진-이병태]

 

 

 

 

 

 

 

 

 

 

 

우리 모두는 백두산 높이는 2,744m로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다. 중국 북경 지질출판사에서 발간한 『장백산지』(1989) 자료에는 2,749m 60cm이다. 지금 북측에서 발표한 백두봉/장군봉의 높이는 확실하게 2,750m로 되어있다.

졸저 『북경 연변 그리고 백두산』 (1992 증보재판, 절판, 3판 준비중, 308쪽)을 낼 때 봉우리 이름과 높이를 찾는데 국내문헌이 전무한 상태였다. 많은 자료가 있었다 해도 역부족으로 충분한 자료를 얻을 수 없었다.

그후 한동안 『북경 연변 그리고 백두산』에 밝혀져 있는 것이 인용되고 있었다. 나는 중국측 자료를 많이 인용하면서 천지 주변 봉우리를 그리고 서술했다.

이어서 연길에서 구입했던 북측의 『백두산 탐험자료집』(280쪽, 1998)이 있으나 여기에서도 등산이라거나 산악인이 알고 싶은 것은 거의 없었다.

우리 땅으로 올랐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방학을 맞았지만 많은 숙제를 받고 나오던 소년시절의 중압감 같은 느낌을 가졌다. 그래도 즐겁게 등교한 때가 있었던 것처럼 그런 감상을 버릴 수는 없었다. 방학은 또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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