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태 (남북치의학교류협회 상임대표, 수필가)

이 연재 글은 치과의사인 이병태 원장이 지난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3박4일간 ‘평화3000’(이사장 신명자)이 주최한 북측 지원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참관했다가 쓴 방북기이다. 이 방북기는 평양-백두산-묘향산-청천강의 순서로 7회에 걸쳐 연재될 것이다. 현재 이병태 원장은 치과의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아울러 치의학 관련 남북교류사업도 하면서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 편집자 주

평양(1) 주체사상탑

▲ 양각도 호텔에서 본 주체사상탑. [사진-이병태]

2008년 9월 29일.

이른 아침 베개봉호텔을 떠나 삼지연공항을 이륙, 평양순안공항에 내렸다. 양각도호텔에 잠시 들려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었다. 두 번째 먹는 평양 옥류관 냉면이었지만 맛이 처음 같지 않았다. 5년 전에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 때 먹던 그 맛이 아닌 것은 내 입맛이 변해서인지도 모른다.

정해진 일정대로 주체사상탑을 참관했다. 안내가 “위대하신...”으로 시작하는 설명은 청산유수이며 듣는 이의 관심을 끄는 데 기교가 있다. 지난번에는 겉만 돌아보았으나 이번에는 주체탑 및 대동강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건너편 옥류관과 그 옆의 대동문도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12명씩 한 조가 되어 엘리베이터로 꼭대기 주체탑 전망대까지 올랐다. 총 높이는 170미터, 10층인데 ㅈ(지하층),ㄱ(기단층), 1, 2, 3, 4, 5, 6, 7, 8로 구성돼 있다.

내가 올라본 높은 곳은 서울의 남산타워, 도쿄의 도쿄타워, 시카고의 시어스타워,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파리의 에펠탑 그리고 이번 평양의 주체사상탑이 전부다.

주체탑 조망대에서 평양의 동서남북을 다 내려다볼 수 있었다. 사진도 맘대로 찍을 수 있었다. 만감(萬感)이 소용돌이치는 가슴을 안고 눈으로는 아늑하며 고요하게 전개되는 평양거리를 확인하려고 노력했다.

▲ 주체사상탑 꼭대기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서평양. 대동강 건너 가운데에 김일성광장이 보이고, 오른쪽에 삼각뿔 모양의 류경호텔(미완성)이 보인다. [사진-이병태]
▲ 주체사상탑 전망대에서 바라본 대동강 상류쪽.  왼쪽에 김일성종합대학과 가운데에 귤껍질을 벗겨 가로로 자른 모양의 5월1일경기장이 보인다. [사진-이병태]
▲ 주체사상탑에서 내려다 본 대동강 하류쪽. 양각도와 양각도호텔 이 보인다. [사진-이병태]

양각도호텔 회전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전망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서울 남산에서 서울을 조망하는 것이나 인왕산에서 보는 것과 같다고나 할는지. 구름 하나 없이 깨끗한 가을 하늘 아래 평양은 S자의 대동강에 J자의 보통강이 합쳐지는 지형이 아름답기까지 했다.

북으로 개선문, 김일성종합대학, 그리고 을밀대를 나란히 볼 수 있고 대동강 상류 쪽으로는 능라도와 거기에 있는 5월1일경기장이 귤껍질을 벗겨 가로로 자른 모양으로 눈에 들어온다.

대동강에는 능라도, 양각도, 쑥섬, 두루섬이 있다. 또 김일성 주석의 만경대고향집 연안에 보통강이 만나는 곳에, 능라도보다 조금 큰 두루섬이 있고 그들 섬 사이에 작은 곤유섬이 있다.

관광지도를 사들고 비교해보면서 “모란봉이 어디죠?”라고 해설원한테 묻기도 했다.
“저기 을밀대 있지 않습니까? 고기 거 옆으루 조금 솟은데 거기가 모란봉입네다. 선생님은 관심이 많으십네다.”

평양(2) 을밀대 이야기 하나

▲ 양각도호텔에서 본 평양의 새벽. [사진-이병태]

서울에 돌아와 치과의사 대선배인 이한수(82세) 박사님과 평양이야기를 나누다가 을밀대와 관련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8.15해방 나기 10년 전에 일본 하이꾸(徘句)의 거장 다카하마 쿄시(高浜虛子)는 그의 노후에 을밀대를 탐방하고 한국 풍경 중에서 그곳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감탄했다.

후일 그곳에 자신의 시비(詩碑)를 세웠다. 그 시비는 8.15 직후 주민들이 그 부근 지하에 매장했다고 한다.

그에게 이곳 풍광이 얼마나 아름답게 비쳐졌으면 시를 짓고 시비까지 세웠을까? 그 작품은 그의 대표작 중에 하나라고 전한다. 시 원문은 다음과 같다.

“舟岸に 着くゃ 柳に 星一つ”

시 내용은 대략, ‘놀잇배 강가에 닿으니 버드나무 가지 위에 저녁 별 하나 나타나고’ 이다.

우리는 주체사상탑 거리에서 옥류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을 하여 강변도로(오탄강안거리)를 따라 오다가 충성의 다리를 건너 쑥섬으로 왔다.

쑥섬 여기에는 혁명사적지로 꾸며 놓았다. 1948년 4월19일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대표단 김구(1879-1949.6.26), 조소앙(1887~1958), 홍명희(1888~1968), 김일성(1912-1994)이 회담을 하던 곳, 당시의 미류나무 그리고 조소앙과 홍명희가 장기를 두었다는 곳도 일러 주었다.

▲ 붉은 스카프를 맨 학생들이 단체로 이동하고있다. [사진-이병태]

평양(3) 대동강 쑥섬

▲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남북대표단이 쑥섬에 머물면서 회담과 환담을 했던 장소. 회의장소에 깔렸던 돗자리를 보관하고 있는 유리하우스(앞쪽)와 홍명희와 조소앙이 장기를 두었다는 원두막(뒷쪽)이 있다. [사진-이병태]

1950년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조소앙은 조병옥(1894~1960)과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여 당선됐으나 그 해 6.25가 나자 납북됐다. 나는 어려서 조소앙도, 조병옥도 보았는데 성북구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 때 동네어른들이 하는 말이 아직도 생각나는데 아마도 조소앙 후보측 선전인 듯하다.

“조소앙은 없는 집에서 태어나서 없는 사람들을 잘 알고 조병옥은 부잣집에서 태어나 없는 사람 형편을 모른다.”

그러나 이런 말을 잊지 않고 있던 나는 조소앙과 조병옥에 관한 책을 보거나 기록을 보면서 ‘선거나 경쟁에는 흑색선전과 모함도 있는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당대에 두 사람은 모두 고등교육을 받았다.

어떻든 두 사람은 보통사람이라거나 일반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입신(立身)과 사명(使命)의 길을 걸었다. 조소앙은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동경으로 유학, 명치대학 법문학부를 다녔으며 조병옥은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임꺽정』을 읽었지만 홍명희가 쓴 것인 줄을 몰랐다. 누가 그렇게 했는지 애정행각을 묘사한 삼류소설인 줄로만 알았다. 지나놓고 보니 원본 『임꺽정』이 아니었나 보다. 책을 읽고 문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월북작가였는데 그의 경력이 간단하지 않음을 알았다.

▲ 대동강 쑥섬 전경. [사진-이병태]

나는 지난 젊은 시절에 『삼국지』를 세 번 읽었던 독서경험이 있었으나 전공이 치의학이고 그 공부에 파묻혀 지냈다. 나이 60살이 넘어, 2005년에 창립한 대한치과의사문인회 2대 회장을 맡으면서 매월 유명 문인을 초대하여 식사하며 강연을 듣고 있다.

매월 첫 수요일에 세종문화회관 벨리지오에서 개최하는데 지난 10월 1일에는 문인협회 소설분과 이광복 회장의 소설가 연혁을 듣는 가운데 흥미가 솟구쳤다. 11월 5일에는 감태준 시인(27년 전 필자를 수필가로 이끈 전 중앙대 문과대학장)의 글강좌를 들었다. 시와 소설은 적지 않게 민족과 국가를 이끌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사전편찬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신기철 선생님은 지난날 내가 글과 어법에 의문가는 것이 있어 여쭈면 서슴없이 가르침을 주시던 분이다. 나는 그 분의 『한국문화대사전』에서 홍명희를 찾아보았다. 빠른 시일 안에 책 『임꺽정』을 구해놓기만이라도 해야겠다.

치과진료와 『이치의학사전』 편찬에 전념하느라 일반 교양과 예술 등에 부족하여 책만은 가까이 하려는 노력은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

평양(4) 386을 생각하다

▲ 쑥섬에서 본 대동강 건너편. 강건너 화력발전소에서 굴뚝 연기가 오르고 있다. [사진-이병태]

쑥섬에 서서 '3.1, 8.15, 6.25 격동기'를 역사적 사실로만 느끼기에는 억울함을 금할 수 없었다. 3.1만세사건을 겪으면서 조부모와 부모들이 돌아가시고 깨지면서 지내셨다. 8.15, 6.25를 겪으면서 조부모, 부모, 나는 전쟁과 가정파괴를 이겨냈던 것이다. 내 세대, 아들, 손자 또는 증손자, 이렇게 4대, 5대를 걸쳐 중병에 죽거나 골병 들어 죽지 않고 겨우 살아났다. 목 졸리고 허리 졸린 시대를 겨우 벗어났을까? 원통할 때가 많다. 지금 잘 산다고 해도 그 영향은 아직도 계속 중이다.

일본침략으로 인한 3.1절과 8.15, 그리고 6.25 전쟁은 모두 우리 강토에 일어났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발동하여 발해, 고구려를 역사상 현 중국의 변방으로 확정지으려 하고, 바다 쪽으로는 제주도 남쪽 이어도를 자기네 영해라고 주장했다.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데 ‘이것도 역대 정권이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결과이며 쌍끌이가 뭔지 싹쓸이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일본과 어업협정을 하지 않았냐’하는 소리가 크다.

공무원시험, 유학시험에 국사과목을 없앴다든지, 초등학교에서는 사회과목에 편입시켰고 대학시험에서는 선택과목에서도 위치가 모호해져 고교에서도 국사교육은 0에 가깝다. 이러한 사실은 대학(서울대와 경희대)에서 비록 시간강사였지만 치과의사학(의학역사)을 20년 넘도록 강의해 온 경험에 너무나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내 이름, 부모 이름조차 한자(漢字)로 못쓰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조소앙과 홍명희가 장기를 두었다는 쑥섬에 서서 강 건너 높게 솟은 화력발전소 굴뚝에서 뿜어내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고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있는 증거다. 내 머리 한편에는 어린 시절 한강변에 있는 당인리 화력발전소 굴뚝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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