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김양희 기자가 ‘평화3000’(이사장 신명자)이 주최한 북측 지원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평화3000’은 주요 대북 협력사업 중의 하나인 장충성당에 있는 콩우유공장을 현장방문했으며, 아울러 평양시내-백두산-묘향산을 참관하였다. 김양희 기자가 ‘평화3000’과 모든 일정을 함께 하면서 느낀 방북기를 일기식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김 기자는 이전에도 두 차례에 걸쳐 평양일기를 작성한 적이 있기에 이번 방북기 제목은 구별을 위해 ‘김양희 기자의 다시 쓰는 평양일기’로 한다. / 편집자 주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큰 천지

▲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큰 천지. [사진-김양희 객원기자]

1년 중 한 달도 채 되지 않는다는 맑은 날씨를 만나 천지를 볼 수 있었다.

천지는 쉽게 그 쪽빛을 보이지 않는다는데 어린 아이의 해맑음처럼 푸른 하늘 아래 푸른 빛 모두를 다 드러내고 있었다.

스무 번 넘게 백두산에 왔다는 북측 안내원들조차 “내가 천지에 온 중 가장 날씨가 가장 좋다”며 “착한 분들만 오셨나보다”고 한다. 참관단들은 서로 ‘삼대가 덕을 쌓은 모양’이라며 서로에게 축하를 건넨다. 생전에 좋은 일을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날씨가 좋아 미안하기까지 하다고 하는 이도 있다.

백두산 천지를 직접 본 나는 그 크기에 놀랐다. 천지를 사진으로만 봤지 얼마나 큰 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기에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는 크기에 당황했다.

가만히 선 채로 고개를 돌려 오른쪽부터 왼쪽까지 돌려도 다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몸을 180도는 돌려야 볼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지 않는 한 그 거대한 웅장함을 카메라로 도저히 다 찍을 수 없어 보인다. 그저 이 황홀경을 눈으로 찍어낼 수밖에.

▲ 백두산과 천지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는 북측 해설강사. [사진-김양희 객원기자]

안양군포의왕청년센터의 유승현 사무국장은 백두산 천지를 보고 “이건 산이 아니야, 너무 좋다. 너무 좋아 표현을 못 하겠어”했다. 그래도 한마디로 표현을 해달라고 조르자 “심장 같다”고 한다.

‘엥? 웬 심장?’
황당하다는 나의 표정에 “간보다는 낫잖아요!” 한다.
분명 간이니 심장이니 하는 것보다는 생명과도 비길 수 있는 벅찬 감동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것은 사과~로 시작해서 높으면 백두산으로 끝나는 노래는 우리가 어려서 가장 처음 배우는 노래가 아닐까?

꼭 처음 배우는 노래가 아니라도 인식이 형성되기 전 배운 노래다보니 무의식적으로도 백두산은 우리 가슴 속에 정말 높은 우리의 산이다.

또 국가보안법이 막걸리보안법이라고 불리던 엄혹했던 시절, 화가 신학철씨는 자신이 그린 ‘모내기’가 ‘북녘의 농촌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대법원의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바 있다. 신 씨는 고향 마을을 그린 것이라며, 그림의 일부와 거의 비슷한 고향 마을 사진까지 제시했으나 보안법은 그를 외면했다.

이처럼 북녘 사람, 마을 등 어느 것을 마음속으로 그려도 보안법이 눈을 치켜뜨고 있으나 웬일인지 백두산은 우리 땅이라며 아무리 그리고 그려도 용납이 됐다. 그만큼 백두산은 북녘의 ‘혁명의 성산’일 뿐 아니라 남녘에도 민족의 성산인 것이다.

▲ '평화3000' 방북단이 천지에서 찍은 기념사진. [사진-김양희 객원기자]

기온은 영하 7℃나 된다지만 구름 한 점 없이 날씨가 워낙 좋은 탓에 일행은 천지에서 한 시간여나 머물렀다. 이전에 왔던 백두산 참관단들은 기온이 영하 10℃까지 떨어지고 비바람까지 몰아치는 통에 채 10분도 머물지 못했다는데 이에 비하면 우리 일행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특히 북녘 주민들에게도 백두산에 가는 것은 굉장히 영예로운 일이라고 한다.

대학생이 되면 모든 학생들이 역사적인 현장이기 때문에 단체로 답사를 가지만 중고등학생의 경우 아주 소수 학생들만 뽑혀서 이곳에 올 수 있다고 하니 이처럼 쉽게 백두산에 오르고 천지를 보는 것이 보통 운은 아니다.

대니얼 고든 감독의 다큐영화 ‘어떤 나라’에도 보면 집단체조를 하던 두 여학생이 백두산 답사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오랜 기차여행에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꿈에 그리던 백두산을 오르는 기쁨이 아주 잘 표현돼 있다.

“그냥 이 곳에 살고 싶다”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음 일정이 있기에 일행은 아쉬움을 품은 채 천지를 뒤로 할 수밖에 없었다.

만병초 이야기

▲ 백두산 초지에서의 점심식사. [사진-김양희 객원기자]

천지에서 내려와 다음 사적지로 가는 도중 점심시간이 되자 평평한 평지에서 도시락을 펼쳐 놓고 먹는다. 백두산에서의 도시락이란 얼마나 낭만적인 식사인가.

샌드위치, 밥, 계란, 고기반찬 등으로 구성된 도시락은 소박하지만 따뜻한 느낌이 났고, 풀밭에서 백두산 봉우리를 배경으로 하고 식사를 한 일은 아주 오랫동안 잊지 못할 기억일 게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누군가가 주변의 풀들이 만병초라고 한다. 만가지병에 다 효험이 있어서 만병초라고 하는데 백두산에는 이와 관련한 전설이 있다.

평양이라는 이름이 생기기도 전 아득한 옛날, 모란봉 기슭 화목동 마을에 몹쓸 병이 휩쓸었다. 괴이하게도 환자마다 서로 다른 병을 앓아 마을 사람을 괴롭히는 가운데 건강한 사람이라고는 마을 이름과 같은 ‘화목’이라는 총각하나 뿐이었다.

‘화목’이는 부모님을 다 잃고 갈 곳 없이 쓰러진 아이였으나 가난하지만 온갖 정성을 다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정성으로 살아났고 이곳에 정착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은혜를 평생 잊지 않기 위해 이름도 그저 셋째라고 불리던 것을 화목이라고 고친 것이다.

때문에 온 마을이 불행에 빠진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어 죽는 한이 있어도 약초를 구하겠다고 다짐하고 한 달이 넘도록 약을 구하러 헤매곤 했다.

그러다가 또 쓰러진 그는 한 노인의 도움으로 다시 목숨을 구하게 됐고 그 노인은 백두산의 만병초라면 마을 사람들의 질병을 모두 낫도록 해줄 것이라고 알려준다. 그러나 만병초는 사람들이 쉽게 나을 수 있는 병에도 함부로 뽑아다 써서 단 한 뿌리밖에 남지 않았고, 크게 노한 하늘은 백두산 수호신에게 ‘다시는 누구도 명약초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엄하게 다스리라’고 명해 쉽게 접근을 할 수 없었다.

수호신은 폭풍우가 치도록 하고 호랑이가 나타나도록 하는 등 만병초를 구하러 오는 사람들을 모두 물리쳐내 화목이 정도는 절대 접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화목이는 마을 사람들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고, 목숨을 내놔야한다는 상황에서 과감히 결단을 내려 자신을 희생했다. 이에 감복한 백두산 수호신은 만병초를 내주고 마을 사람들을 살리게 했다고.

사람들을 살린 후 화목이는 백두산에 다시 그 약초를 심었고, 그의 정성에 백두산에 다시 뿌리내린 약초는 그 후 숱한 씨를 뿌려 백두산 기슭은 약초로 덮이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풀로 여러 가지 병들을 다 고치게 되자 어느 때부터인지 이 풀을 만병초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지난 2002년 북녘의 문학예술출판사에서 출간된 ‘백두산의 옛전설’에서 리빈 작가는 “물론 오늘날 만병초라는 이름이 많은 병을 고친다는 의미에서 불리 우는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하나 이런 전설을 낳을만한 약효는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백두산 밀영

▲ 백두산 밀영.[사진-김양희 객원기자]

일행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태어났고 김일성 주석과 항일투사들이 거점을 삼았던 기지가 있는 백두밀영으로 향했다. 백두산에는 유난히 마가목이라는 나무가 많은데 이는 기관지와 천식에 좋다고 한다.

한 시간 여를 달린 후 도착한 백두밀영은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백두밀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는 ‘정일봉’이라고 쓴 봉우리가 보인다.

▲ '정일봉' [사진-김양희 객원기자]

정일봉의 1글자 무게는 100톤이 넘고 길이는 6.5m, 높이는 7m에 이른다. 글자의 평균 깊이는 70cm인데 가장 깊은 것은 1m에 이른다.

이곳에는 김 주석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탄생 50돌을 맞아 직접 쓴 송시비가 있다.

송시비에는 “백두산 마루에 정일봉 솟아있고 소백수 푸른물은 굽이쳐 흐트누나 광명성 탄생하여 어느 덧 쉰돐인가 문무충효겸비하니 모두 다 우러르네 만민이 칭송하는 그 마음 한결같아 우렁찬 환호소리 하늘땅을 뒤흔든다.”고 적혀 있다.

이 송시비는 216톤에 이르며 모양은 인민들의 한결같은 마음을 휘날리는 붉은 깃발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 밀영 주변에 흐르는 맑은 소백수. [사진-김양희 객원기자]

주변에는 너무도 맑은 소백수가 흐르고 있다. 북녘 안내원은 “이곳은 공기가 너무 맑고 좋아 1분에 6발자국을 걷는 사람이라면 12발자국까지 걸을 수 있다”며 “여러분들이 느리게 걸으셔도 보채지 않는 이유다”고 말했다.

사령부와 생가에 이르러서는 북측 안내원은 “이곳은 장군님의 생가이기 때문에 누구든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지 악한 마음을 가지면 백두산이 노해 불벼락을 내릴 것이다”고 말했다.

이곳에는 1936년 9월 사령부와 함께 지은 경비대원들이 산속에서 학습 등을 하며 묵던 숙소가 있다. 숙소는 방이 2칸인데 큰 방은 김 주석이, 작은 방은 대원들이 썼다고 한다. 방 안에는 세계지도가 걸려 있으며 ‘모두 다 공부하자, 지식은 황금보다 유력하다’ ‘모두다 조선혁명의 심장부를 목숨으로 사수하자’ 등의 글귀가 적혀 있다. 대원들은 전투 중에도 정세공부 등 학습에도 소홀하지 않고 무기 관리 등 전투준비에도 철저했던 것이다.

▲ 밀영 숙소 내부 모습. [사진-김양희 객원기자]

해설강사에 따르면 김 주석은 소부대 활동지도로 바삐 지내다가 집에 돌아와 1942년 6월 14일에 처음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봤다고 한다.

김 주석은 “백두산에서 태어난 이 아이를 잘 키워 혁명의 대를 잇도록 하겠다”며 “백두산에서 지킨 붉은 기를 후대들이 들고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친도 백두산의 아들을 만들기 위해 반달가, 고드름가 같은 민요를 들려주며 조국애를 키우도록 했고 말을 배울 땐 광복을 이뤄야할 조선부터 가르쳤다고 한다. 아이의 첫돌에도 색동 돌복보다는 항일 투쟁에 나섰던 김 주석의 전투복을 입혔고 유격대원들은 첫돌을 맞은 선물로 놀잇감 등을 전달했다고 한다. 백두밀영에는 당시 유격대원들이 선물한 놀잇감과 모친이 쓰던 살림 사적물들이 부엌에 남아있다.

▲ 박우물. [사진-김양희 객원기자]

숙소 근처에는 항일유격대원들이 사용했다는 박우물이 남아있다. 박으로 우물물을 길렀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박우물에는 산삼, 웅담, 백사 등이 함유돼 한번 마시면 십년이 젊어진다고 한다.

어찌 또 이를 그냥 지나갈까? 십년이 젊어진다는 말에 일행은 줄을 서서 모두 박우물의 물을 마셨다. 누군가 나에게 박우물의 맛을 표현해보라고 하지만 합당한 말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저 항일투쟁을 위해 이름도 없이 몸 바쳐 싸운 이들을 잠시 나마 떠올릴 수밖에.

구호나무

다음 장소로 이동을 하는데 우리와는 다른 표현을 발견했다.

▲ 유리관 속에 보관돼 있는 구호나무. [사진-김양희 객원기자]
나무 곳곳에 ‘산불근절’ ‘산림애호’라고 적혀 있다. 우리는 대개 ‘자연보호’ ‘산불조심’ 등으로 표현을 하는데 의미는 같지만 표현한 단어가 조금 다르다.

북녘은 수 십 년 동안 지속된 미국과의 대결로 늘 전시체제에 있기 때문에 그런지, 비행기 내의 ‘박띠를 매시오’ ‘산불근절’ 등 다소 강한 표현이 많다.

2000년 초부터 북녘에 들어왔다는 한 인사는 “그나마 요즘엔 많이 부드러워졌다”며 “이제는 볼 수 없지만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만해도 ‘미제의 각을 뜨자’ 같은 표현에 놀라기도 했다”고 전했다.

참관을 마치고 내려오던 중 나는 우연한 기회에 구호나무를 볼 수 있었다.

일정이 빠듯했던 탓에 모든 이들이 다 볼 수는 없었는데, 함께 간 북녘의 안내원이 ‘저쪽으로 가면 구호나무를 볼 수 있다’고 귀띔을 해줘 재빨리 가본 것이었다.

구호나무는 항일투쟁을 하던 유격대원들이 자신의 각오와 조국광복의 염원 등을 나무에 써둔 것으로 유리로 만든 관에 넣어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구호나무는 전국적으로 몇 천개에 이르나 시간이 흐르면서 글자가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고 한다.

구호나무에는 ‘조선아 백두광명성 탄생을 알린다’ ‘조선아 백두성 솟았다’ ‘조국광복 만세’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사실 구호바위의 글씨는 달필이 아닌데 이는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애국심 하나로 유격대원으로 들어온 이들이 대부분 배움이 부족한 이들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오히려 많이 배운 이들은 다들 자기 살길 찾기에 바빴으나 이름 없는 이들이 앞 다퉈 백두산으로 들어온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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