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기(우사 김규식 연구회 사무국장)

다음은 ‘평화3000’(이사장 신명자)이 주최한 북측 지원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한 우사연구회 장은기 사무국장의 방북기입니다./편집자 주


▲ '평화3000' 평양-백두산 방문단이 평양공항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2008년 9월 27일(토)부터 9월 30일(화)까지의 3박 4일간 ‘평화3000’의 일원으로 평양, 백두산, 묘향산 등지를 돌아본 견문을 간추려 기술합니다.

‘평화3000’(이사장 신명자)은 화해와 나눔, 평화공동체 실현을 목적으로 2003년 11월 24일 창립된 사단법인체입니다. 남북간 사회문화교류,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 평화교육사업, 제 3세계 빈곤아동을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초청 주체인 조선카톨릭교협회 중앙위원회는 1988년 6월 30일에 결성된 북의 천주교 대표단체로서 내부 천주교 관련사업, 각국의 천주교인 및 단체와의 연대사업, 남북 천주교 교류사업을 주관하며, 현재 조선적십자회 위원장이자 조선종교인협회 회장인 장재언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단체입니다.

9월 27일(토) 오전 6시 30분에 인천공항 3층 출국장 동편 끝에 모여 120명의 ‘평화3000’ 일행을 4조로 짰습니다.

오전 8시 30분 대한항공 전세기로 같은 대북협력단체인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일행과 함께 탑승하여 북으로 직행(서해 상공으로)해 1시간 20분쯤 후에 평양 순안공항에 내렸습니다. 공항을 나온 즉시 미리 대기한 버스 4대로 조별로 나눠 타고 한 차에 북의 안내인 남 2명, 여 1명씩 타 설명(주의사항)을 듣고 시내로 갔습니다.

양각도호텔 가는 길, 만경대고향집

숙소인 양각도호텔로 가는 길에서 걷는 사람, 자전거 타고 가는 사람, 자주 보이는 승용차, 만원버스, 2층 버스, 두 대를 연결해 사람 많이 태우고 가는 궤도차, 손짐 싣고 끄는 운반기구를 끌고 가는 사람, 등에 배낭 무겁게 맨 여인들이 두 세 사람 같이 어울려 이야기하고 가는 광경, 묵묵히 홀로 바쁘게 걷는 사람, 유유히 걷는 한가한 걸음도 게으르지 않은 걸음인 광경을 보면서 열심히들 사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짐 실은 차위에 타고 있는 여인들이 손을 흔드는 반가운 웃음도 정든 이웃 같았습니다.

만수대언덕에 도착하니 한복 곱게 차려입은 나들이 여인들, 간편한 옷차림의 남자들, 무리 지어온 어린 학생들의 단정한 옷차림들이 신선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만수대언덕에서는 높은 곳에 금빛 번쩍이는 김일성 동상, 잘 손질해 가꿔진 나무들을 보고나서 바로 양각도호텔로 가 정해준 방인 34층 18호실에 짐을 풀고 내려와 점심을 먹고 2시에 버스를 타고 만경대고향집으로 갔습니다.

대동강에는 모래 자갈 채취하는 배, 채취기구들이 곳곳에 있고, 작은 배에 둘씩 타고 노 저으며 뱃놀이 하는 무리들이 떠있고, 강가에 줄지어 앉아있는 강태공들 모습, 보통강가의 웅덩이에서 망으로 고기 잡는 사람들도 보였습니다.

만경대고향집은 주위를 산뜻하게 꾸민 조경에 깔끔하게 정리된 옛날의 흙벽 초가로 우리가 어려서 흔히 보며 또 그런 집에서 살았던 정경이지만 주위를 성역으로 만든 곳이었습니다.

정상인 만경대는 공사중이라고 갈 수 없다고 하면서 기슭에 전시관을 한 채 지은 곳으로 안내해 따라가니 넓은 방 네 개에 김일성의 어린 시절, 만경대 일대 옛 마을 등을 사진, 그림 등으로 전시하고 잘 훈련된 해설원 여인의 낭랑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안내하는 동행자들은 우리의 감정을 읽으며 잔뜩 긴장하여 살펴보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감개무량한 쑥섬 참관

▲ 쑥섬에 있는 통일전선탑 뒷면 '김규식' 이름을 배경으로 선 우사 김규식 연구회 장은기 사무국장(오른쪽)과 김희상 부장.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이어 쑥섬으로 갔습니다. 가면서 대동강가에 매어놓은 푸에블로호를 바라보며 1866년 대동강에 침입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태워진 그 자리에다 매어 놓았다는 안내인의 설명이었습니다.(푸에블로호는 미국의 정보수집 함정으로 동해에서 영해 침범했다고 북이 끌어간 배입니다)

쑥섬은 본래 섬이었으나 큰길가가 메워져 지금은 차가 왕래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1948년 4월의 56개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를 표시한 돌탑이 높이 솟아있고, 민족자주연맹 주석 김규식 선생의 표시를 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우사연구회에서 일하고 있기에 감개무량했습니다.

우사 김규식 선생은 북행에 앞서 5개 조건을 제시하며 그 조건을 수락 협의하겠다는 북측의 응답을 듣고 백범 김구 선생보다 늦게 북으로 가 다른 사람들 많이 참석한 모란봉극장에서의 연석회의(사실은 준비된 대회 행사)에 참석은 아니하고 본래의 목적인 회담을 주장해서 쑥섬에 가 4월 26일부터 4일간 16인의 대표회의와 4김회담을 하였는데, 지도자 16인이 회담한 배는 없고 4김이 회담했던 원두막 같은 큰 막사는 잘 보존돼 기념물로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북측 달변 여성의 절절한 해설이 힘찼지만 우리 학계와 그곳의 현실은 의문스러운 점이 없지도 않았으나 지금의 세태가 어려운 가운데 앞으로 통일을 이루기까지에도 험난한 역정이 아닐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의 사실을 바르게 정리하자면 어려움이 많으리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 ‘남북협상 60주년 우사 김규식 연구회 장은기 사무국장 외 김희상 부장’이라고 방명록에 남기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남북협상 60주년 우사 김규식 연구회 장은기 사무국장 외 김희상 부장’이라는 방명록 기록을 남기고 떠나왔습니다.

퇴근시간의 큰길가에는 남녀노소 학생들이 한 20-30m씩 줄지어 늘어서 차를 기다리는 모습이고, 자전거 탄 사람들이 줄지어 가는 모습이 관심을 끌었습니다.

어린이들이 곳곳의 나무 밑 잔디위에서 놀고 있는 모습도 예날 나의 어렸던 시절에 고향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던 그 때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만찬상은 잘 알지 못하는 갖가지 전통음식을 골고루 푸짐하게 차려서,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준비하였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들이 상 하나에 9명쯤 앉은 상마다 한사람씩 맡아서 부지런히 뒷바라지를 하였습니다.

먹다 지친 사람들이 하나 둘 슬금슬금 자리를 떠나 밖으로 나가고, 여러 방으로 가며 밤이 깊었습니다.

백두산 천지, 삼지연, 밀영 그리고 베개봉호텔

▲ 백두산 천지.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서울을 떠날 때 새벽걸음이어서 아침밥을 거른 사람들이지만 다음날도 아침 6시에 밥을 먹고 7시에 버스에 타 비행장으로 가야했습니다. 비행기는 8시 좀 넘어서 뜨고 1시간쯤 날아가 백두산 중간쯤 되는 삼지연비행장에 내려앉았습니다. 비행기가 전의 것보다 좋은 것을 새로 사온 것이고 또 여러 대가 북경, 심양 등지로 날라 다니는 것 같았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승합차 8대에 나눠 타고 곧장 백두산으로 달려 올라갔습니다. 눈이 많이 내렸다고 했는데, 날씨가 맑아 햇볕이 따뜻하였고 군데군데 녹지 않은 눈 덮인 봉우리가 멀리서 보기에 봄날 눈이 덜 녹아 있는 곳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향도봉까지는 차로 가서 거기 평평한 곳에서 제일 높은 장군봉까지 1,000m는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게 돼 있습니다. 천지는 향도봉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바람이 차서 얼굴은 제법 얼얼한 초겨울 추위를 느끼게 하지만 우리 민족 성산의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천지를 굽어보면 주위에 우뚝 우뚝 솟아있는 봉우리들의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으려고 기를 쓰고 기어 올라갔습니다. 장군봉은 해발 2,750m라고 합니다.

승용차는 장군봉까지 올라갈 수 있는 찻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백두산은 어느 쪽이나 봉우리 가까이는 나무가 없는 화산재의 모래와 자갈로서, 단단하지 못해 사람이 갈 수 없는 지형입니다.

천지를 마음껏 구경하고 우리 일행은 차로 내려오고 있는데 한 무리의 북측 남녀들이 백두산 철길(모노레일)을 걸어 올라가는 모양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내려오다 잔디 깔린 곳에서 도시락 점심을 먹은 다음 승합차에 타고 숲길로 달려서 백두산 밀영으로 갔습니다.

참으로 울울창창한 숲 속에서 세 채의 나무 귀틀집이 적당히 떨어져 있는데 잘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산봉우리에 내려쓰인 ‘정일봉’ 큰 글씨가 밑의 ‘봉’자 일부는 나무에 가려져 밑에서는 유심히 보아야 알 수 있을 만큼 우거진 숲속 밀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관리하는 남녀 일꾼들(복무원)은 따로 집을 지어 그곳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밀영에는 수시로 관련있는 사람들이 드나들고, 관광단체들이 찾아들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 삼지연혁명전적지에 서 있는 거대한 횃불상과 청년 김일성 동상.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베개봉호텔로 가면서 삼지연혁명전적지에 들렀습니다. 김일성의 동상이 금빛 번쩍이며 광장 북쪽 중앙에 우뚝 서 있고(전에는 좌대가 10여m로 높았는데 지금은 1m 남짓한 높이의 바위형상 좌대로 바뀌어서 위로 보기 위해 머리를 쳐들지 않고 편안하게 볼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동상 양쪽 옆으로 병사, 농민, 일꾼들의 동상이 늘어서 있는 가운데 나팔 부는 석상은 참 일품이었습니다.

삼지연은 물이 많이 담긴 큰 호수가 세 곳이라고 해서 삼지연이라고 한답니다. 나무가 우거지고 많은 물이 담긴 경관이 빼어나고, 멀리 눈 덮인 백두산은 마치 하늘 끝에다 잘 그려 놓은 그림을 보는 것 같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베개봉 호텔에서 청정 전통음식으로 맛있게 저녁을 먹고 밖으로 나와 마당에서 하늘을 보니, 싸늘한 냉기가 몸을 움츠리게 하는데도, 생생하게 내쏘는 별빛이 깨끗이 마련해 놓은 방석 위에 보석을 쏟아 놓아 제각기 적당하게 자리 잡고 저 보라는 듯이 초로초롱 반짝였습니다. 이런 별빛은 생전 처음 보는 것만 같아서 언제까지나 바라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했습니다.

이곳 베개봉호텔이 자리한 삼지연읍에서 나는 나물, 버섯, 꿀 등 온갖 것은 그야말로 고냉지 청정식품이라고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만큼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신세라서 너무나 심정이 토라지는 것만 느끼게 했습니다. 베개봉호텔로 들어가는 길목 언덕에 마을이 새로 생겼는데 모두 2층 현대식 건물로 지붕이 경사 급한 사방에 삼각뿔 끝을 하늘로 한 모양들이었습니다.

장충성당, 콩우유공장을 좀더 확장했으면...

역시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6시 아침밥을 먹고 삼지연비행장으로 버스 타고 가니 벌써 대기하고 있는 고려항공기에 타라고 독촉하며 모두 탑승해 자리 잡고 앉아 있으나 비행기는 갈듯 뜰듯 하면서 제자리에 있는데, 평양에서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일행을 태운 고려항공기가 날아와 내려앉으니 그제사 우리 일행을 태운 비행기는 평양을 향해 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비행기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산, 산, 산들인데, 제법 나무가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곳곳에 저수지와 물길이 정비돼 있는 가운데 조각조각으로 흩어져 있는 들에는 누렇게 영근 벼 이삭이 고개 숙이고 추수를 재촉하는 풍경에서 풍년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평양의 순안국제공항에 내려 대기한 버스에 조별로 나눠 타고 ‘장충성당’으로 직행했습니다. 성당에 가니 신부님께서 기다려 반갑게 맞아 성당 안으로 안내하고 장충성당에 관해서, 또 남북 신자교류와 관련해 희망 있는 정답을 들려 주셨습니다.

바로 우리 일행이 목적하고 온 콩우유공장이 성당 울안에 있어서 둘러보며 콩우유를 만들기까지의 공정을 시설에 따라 설명을 잘 하여 주셨습니다. 내 욕심 같아서는 좀 더 규모를 확장하고 많은 콩우유를 만들어 널리 공급하여 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옥류관, 주체탑, 3대헌장탑

▲ 통일전선탑.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다음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옥류관에 가니 산뜻하게 새 단장을 하고서 많은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소문난 냉면으로 점심을 먹는데 안이나 밖에 많은 사람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지난 날 우리 고장의 5일장 서는 장날의 장 속 같았습니다. 냉면을 별미로 맛있게 먹고서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전에 먹었던 맛이 나지 않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호텔에 잠깐 들렀다가 주체탑 관광을 갔습니다. 주체탑 위(150m 높이)에서 둘러보면 사방으로 평양 시가지를 볼 수 있는데 대동강 북쪽은 옛날의 시가지이고, 남쪽이 새로 짜여지는 시가지라고 안내인이 가르쳐 주면서 남쪽의 사진을 많이 찍으라는 친절한 주문을 했습니다.

내려와 대동강가에 가 바람을 쏘이며 자전거 타고 오가는 북축 사람들의 모습, 조각배 타는 먼 곳, 강가에서 모래를 긁어모으는 배들을 보고, 또한 ‘아리랑’공연을 하러 줄지어 가는 듯한 어린이들이 생기있게 걷는 모습을 보면서 옛날의 추억을 되살려 보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버스에 타고서 가는 곳이 어디냐고 하니 조장께서 3대헌장탑에 간다고 하였습니다. 가는 길에서 초등, 중학생쯤 돼 보이는 아이들이 짝지어 줄서서 목에 붉은 스카프를 두르고 재잘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가는데 북의 안내인이 '아리랑' 공연하러 가는 주연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당국에서 애당초 그런 것 볼 것 없지 않느냐고 만류하여 그렇겠다고 해서 단념하게 됐다는데, 좀 너그럽게 보아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3대헌장탑은 두 여성이 30m 높이로 양쪽에서 마주보며 손 모아 헌장을 받쳐 들고 있는 형상의 큰 돌탑인데 그 밑으로 자동차가 왕래하는 문 같이 조성돼 있는 색다른 조형물입니다.

길 가운데서 교통정리 하는 제복 입은 아가씨들이 네거리마다 있고, 더러는 2륜차를 세워 놓은 남자가 교통정리 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어쩌다가 교통위반자를 단속하는 실상도 볼 수 있었습니다. 평양 역전을 지나며 보니 나무 아래 즐비하게 만들어 놓은 간이의자에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고 더러는 서서 어정거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양각도호텔은 이름과 같이 대동강 가운데 섬인 양각도에 자리 잡은 호텔로 많은 내외의 관광객이나 회의 참석 단체들이 이용하는 곳으로 회랑 등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갖가지 알림의 화보도 붙여 놓고, 호텔 안에는 1층에 양복점, 연회장, 양식당, 기념품 판매점 등이 있는데 양담배, 외제 시계점포도 보였습니다. 판매장의 아가씨들은 친절하게 설명도 하지만 사도 그만 안사도 그만의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양각도호텔의 47층에 있는 회전전망대에서는 술자리에 어울려 야경을 즐기는 사람들이 밤 깊은 줄 모르고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주체탑 몸통 전체가 어두운 밤에 휘황찬란하게 빛내고 있고, 사방의 아파트, 빌딩 등의 전등이 밤 10시까지는 켜져 있고, 가로등은 희미하게 졸리는(?) 형상이지만, 길을 밝혀서 많은 자전거 탄 사람, 걷는 사람, 자동차의 왕래를 은근히 지켜보는 것 같았습니다.

묘향산, 보현사

▲ 필자(왼쪽)와 우사 김규식 연구회 김희상 부장.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마지막 날에도 먼저 짐 챙긴 후 아침밥을 6시에 양식당에서 뷔페식으로 먹었습니다. 아주 큰 연회장이 있고 두 군데의 식당이 따로 있었습니다. 음식은 이국 나들이에서 흔히 어느 호텔에서나 먹었던 것과 같았습니다. 색다른 것은 김치를 먹을 수 있게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아침 7시에 차타고 떠나 2시간 거리의 묘향산으로 달렸습니다. 고속도로가 잘 정비된 길입니다. 가운데 분리시킨 곳이나 양쪽 길가에 나무도 잘 가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평양시 변두리에서 한 2km거리에 죽 늘어서서 남녀가 섞여 삽과 괭이 등으로 물도랑을 파듯 허리 깊이까지 흙을 파내고 있었습니다. 그 옆의 곳곳에 자전거를 모아 놓고 있는 것이 먼 거리에서 온 사람들인 것 같았습니다.

누런 들 가운데 20여 명의 남녀가 같이 줄 서 벼 베는 가을걷이를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었고, 콤바인으로 수확하는 곳도 있는가 하면, 산 비탈진 다락배미 같은 곳에는 두세 사람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산기슭에 무얼 심었던지 빈 곳이 별로 없고, 이른 아침 7시인데 산기슭 길가 공지에 콩인지, 고구마인지를 거두어 자루에 담아 자전거 짐받이에 싣고 있는 사람, 싣고 가는 시골길이고, 여인네 홀로 언덕배기 밭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꼬마들은 서너 명, 댓명이 어울리기도 하고 혼자서 학교로 가는 논길, 밭길, 큰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학교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저희들끼리 잔디 위에서 뒹굴며, 끼리끼리 모여 즐기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오가며 멀리 보이는 농촌마을 집들이 옛날 집이 아니고 새로 지은 2층의 현대식 건물인데, 지붕은 뾰족해 경사가 급하게 만들고 지붕 사방에 삼각뿔 모양으로 꼭지 모서리를 하늘로 향해 세워 만든 모양이 눈 많이 내리는 북쪽 나라의 그림이나 사진에서 본 것과 같았습니다.

묘향산 가는 강가에서는 곳곳에서 남녀가 한가하게 고기 잡고 있는 전경을 볼 수 있었고, 묘향선 국제친선전람관으로 떼 지어 모여드는 학생, 군인, 일반 단체객들이 법석이어서, 서둘러 건성건성 관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국제친선전람관의 진열품 가운데는 우리의 유수한 기업총수나 사회지도층 인물들의 증정품으로 진귀한 물품이 많았습니다.

보현사 경내는 학생단체가 많이 와서 우리는 건성으로 쫓기며 돌아 나오게 되니 해설하는 아가씨가 속상해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일행은 곧 서울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촉박해서 어쩔 수 없었으나, 그 아가씨는 무던히도 서운해서 입구까지 따라 나와 원망하는 눈빛 같았습니다.

귀환

평양 시가지는 높지 않은 건물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어졌으며, 사이사이에 나무가 있고 큰 길가에는 나무를 길게 조각대어 만든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책을 보는 아가씨도 더러 볼 수 있게끔 짜여 맑은 공기 속에서 활동하게 돼 있습니다. 그 거리에 한복을 차려입은 여인, 양장으로 정장차려 입은 여인, 아가씨들을 자주 보게 되는데 참 산뜻해서 예뻐 보였습니다. 아침 길에도 책을 펼쳐보며 종종 걸음 걷는 대학생 또래의 아가씨도 산뜻한 인상이었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바쁘게 평양 순안공항으로 달려오니, 대한항공의 전세기가 대기하고 있어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일행이 먼저 탑승한 뒤 우리 ‘평화3000’ 일행이 탑승을 끝내 오후 4시 반 쯤에 순안공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대한항공의 승무원들이 친절하게 바쁜 활동으로 도시락을 날라다 주어 맛이 더 나는 것이었습니다.

오후 5시 반쯤 돼 김포공항에 내려 한산한 공항 안으로 들어서 입국수속장으로 가는데 뜻밖에도 권영길 의원이 서 있으면서 사람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는 인사를 하며 맞이해 주었습니다.

대강 본 대로를 썼으나 기억을 되살려 쓰기가 쉽지 않아서 온전하게 다듬지 못한 글이 되어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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