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김양희 기자가 ‘평화3000’(이사장 신명자)이 주최한 북측 지원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9월 27일부터 30일까지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평화3000’은 주요 대북 협력사업 중의 하나인 장충성당에 있는 콩우유공장을 현장방문했으며, 아울러 평양시내-백두산-묘향산을 참관하였다. 김양희 기자가 ‘평화3000’과 모든 일정을 함께 하면서 느낀 방북기를 일기식으로 10여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김 기자는 이전에도 두 차례에 걸쳐 평양일기를 작성한 적이 있기에 이번 방북기 제목은 구별을 위해 ‘김양희 기자의 다시 쓰는 평양일기’로 한다. / 편집자 주


▲ 만경대고향집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평화3000' 방북단.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만경대고향집은 북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적지이기 때문에 경건한 마음으로 참관을 해야 한다. 북측 안내원인 김철웅(프란체스코) 부회장은 참관에 앞서 “다른 조에서는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니 우리는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한다”고 했다.

헐~불미스러운 일이라니...궁금한 우리는 “대체 어떤 일이죠?” 물었다.

김 부회장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까부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북녘은 몇 시까지 모이자는 약속에 늦거나 가지 말라는 곳을 가는 등 정말 말을 듣지 않는 남녘 사람들을 보고 “남측 사람들 열 명 줄 세우기보다 참새 10마리 줄 세우기가 쉽다”고 했었다. 이제는 돌출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 참새 5마리 줄 세우는 것 정도로 쉬워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자유분방한(?) 남녘 사람들을 몇 사람의 안내원으로는 영 감당하기 어려운가 보다.

‘만 가지 경치가 한눈에 보인다’는 만경대

▲ 만경대고향집 해설강사 김희영 씨.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만경대고향집에서 김희영 해설강사는 설명을 시작한다.

김일성 주석이 탄생한 고향인 만경대는 예로부터 경치가 아름다운 이름난 곳이었다. 고향집 앞에 있는 산이 바로 남산인데 남산에 오르면 ‘만 가지 경치가 한눈에 보인다’고 해 그 일대를 만경대라고 이름 짓고 남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만경봉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워낙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인지라 지주들은 산을 경쟁적으로 사 조상묘를 만들었고 때문에 이를 지키는 산당지기들이 많았단다. 김일성 주석이 태어난 집도 지주의 산당집으로 김 주석의 증조할아버지인 김응우 씨가 1862년 평양지주의 땅을 봐주기로 하고 이곳으로 이사를 와 터전을 잡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12년 4월 15일 김일성 주석은 이곳에서 태어나 8살까지 어린 시절을 보내고 혁명 활동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떠났다. 12살 때는 ‘조선에 태어난 남아라면 마땅히 조선을 잘 알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혼자서 천리 길을 걸어 조국으로 나오고 이후 2년간 창덕학교에서 공부를 했단다.

14살 때는 아버지가 일본놈들에게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나라를 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혁명의 길에 나섰고 20년 만에야 나라를 찾고 고향에 돌아왔다고 한다.

▲ 만경대고향집은 북측인민들도 참관을 자주 오는 곳이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해설강사는 숨도 한번 내쉬지 않고 설명한다.

그리고는 “수령님의 일가는 4대 100여 년 동안 만경대에서 살면서 모두 나라를 찾는 혁명의 길에 나서 한생을 바치셨다”고 덧붙였다.

만경대고향집에는 일가가 쓰던 물레, 베틀, 작두, 멍석, 책상 등 살림살이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멍석은 광복 후 김 주석이 집에 돌아와 잠을 잘 때 이부자리가 모자라 멍석을 깔고 거적을 덮고 잔 것이라고 했다.

살림살이가 어려워 어머니가 사용한 물동이는 원래 검은색이었으나 하도 기우고 때워서 흰동이처럼 보일정도다. 특히 이곳에는 134년이 된 몹시 일그러진 독이 있는데 이것은 김 주석의 증조할머니가 형편이 어려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독을 사온 것이라고 한다.

증조할머니는 어머니가 시집을 올 때 “내가 이 독을 사올 때 남들은 비웃었지만 독 모양이 흉하다고 장맛이야 변하겠냐”며 “앞으로 이 독 옆에 보기 좋은 독을 옆에 나란히 세워둘 수 있는 행복한 세상이 올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해방 후 김일성 주석이 이곳을 찾았을 때 수행원들이 “참 생활이 어려우셨다”고 하자 김 주석은 “해방 전에는 모두 어려웠었다”며 “이 독을 만년 이상 지키라”고 했단다.

안채의 벽면 액자에는 김일성 주석과 그의 가족들의 사진, 해방 후 이곳을 찾은 김 주석이 할머니와 상봉하며 찍은 사진이 있다.

김 주석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해방투쟁 중에 중국에서 죽었는데 김 주석의 할머니는 손자의 품에 안겨 “아버지 어머니는 어쩌고 너만 돌아왔냐”며 울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도 김일성 주석의 일가는 다른 농민들과 똑같이 농토를 부여 받고 농사를 지었고 이곳에서 계속 살았다고 한다.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이곳을 방문한 김구 선생은 고향집에 들어오기 전, 김일성 주석의 할아버지가 비단옷에 기와집에서 살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농민복에 밭에서 일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는 김 주석의 할아버지에게 “손자가 한 나라의 국가수반인데 왜 이리 험한 농사를 짓느냐”물었고 이에 김 주석의 할아버지는 “손주는 수령이지만 나는 농민이다”며 “예로부터 농사는 천하지대본이기 때문에 내가 농사를 열심히 잘 지어야 손주의 정치도 잘 될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김구 선생은 “김일성 수령이 탄생한 가정은 가장 애국적, 혁명적이며 가장 인민적”이라고 극찬을 했다고 한다.

올해 초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의 사촌언니 김옥희 씨가 청탁과 함께 30억원을 수수해 구속된 사건이 떠올랐다.

당시 김옥희 씨는 대통령 부인의 친언니 행세를 하며 국회의원 비례대표 후보에 공천되도록 도와주겠다며 돈을 받았고, 이는 현직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로 워낙 대형사건이어서 이슈가 됐었다. 김윤옥 씨 외에도 대통령의 셋째 사위 조현범 씨의 주가 조작 연루 의혹 사건, 유한열 한나라당 상임고문의 국방부 납품 청탁비리 등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이명박 대통령 주변에선 끊임없이 친인척, 측근 비리가 터져 나왔다.

그 자리에 올라가기만 하면 정말 눈이 확 도는 건지, 주변 사람들이 가만 놔두질 않아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명박 대통령 외에도 이전에도 대통령 측근들의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김 주석의 할아버지가 그때 정말 그렇게 말을 했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해설강사의 말을 그대로 듣자면 우리 정치인들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도 꼭 만경대고향집에 방문해 이런 면은 꼭 좀 배웠으면 한다.

만경대혁명사적관

▲ 만경대혁명사적관.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만경대혁명사적관은 김일성 주석의 혁명업적과 일가들의 항일 투쟁업적을 전하기 위해 1970년에 만들어진 사적관이다. 고향집에서 150m 거리에 있는 이곳은 6개의 방으로 나뉘어 각 시기별로 정리가 되어 있다.

만경대혁명사적관 입구에는 각국 국가수반들의 기념식수들이 가득하다. 만경대고향집은 물론 사적관에도 자녀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은 가족들은 물론 직장, 학교 등 단위별로 찾은 단체참관객들이 많이 눈에 띈다. 아이들은 남측 참관단이 들이미는 카메라에 쑥스러워 하면서도 표정이 밝다.

▲ 만경대혁명사적관 입구에는 각국 국가수반들의 기념식수들이 가득하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만경대혁명사적관을 향해 가면서 일행 중의 하나가 “금강산과 묘향산 중 어느 산이 더 아름답냐?”고 묻자 김철웅 부회장은 “금강산은 미끈한 미남의 성격으로 남성미가 뛰어나고 묘향산은 묘하게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산으로 여성미가 뛰어나다”고 답했다.

이에 내가 “아! 그럼 여자는 금강산을 좋아하고 남자는 묘향산을 좋아하나요?”하며 농담을 던지자 김 부회장은 정색을 하며 나를 빤히 보더니 “개인 취향에 따라 다릅니다”고 한다. (김 부회장님! 저 그때 그냥 농담 던진 거예요. 너무 정색하셔서 좀 부끄러웠어요.^^)

사적관에 도착한 해설강사는 “수령님은 1912년 4월 15일에 태어나셨는데 이때는 모두가 알다시피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암흑의 시기였다”며 “수령님의 탄생이 있었기에 주체조선이 있고 새 시대를 열은 것이라 이곳을 우리 인민들은 태양을 받드는 혁명의 성지로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첫 번째 방에는 김 주석의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에 관한 내용이 있다. 증조할아버지는 제너럴셔먼호를 격침시키는 투쟁에 앞장섰다 하고 아버지는 항일운동에 적극 가담, 일제에 의해 두 차례나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증조할머니는 물론 어머니 역시 남편은 물론 자식까지 모두 혁명의 길에 내몰며 애국의 가풍을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고. 역사에도 유래 없는 혁명적인 가정이라고 해설강사는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자랑을 한다.

지금으로 치면 소위 ‘엄친아’였던 김 주석

▲ 만경대고향집 근처를 북측 가족인듯한 사람들이 지나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유년 시기의 자료들을 모아둔 방에서 해설강사는 “세상 사람들이 수령님을 가르며 하늘이 내린 전설적인 위인이라고 칭송하곤 했다”고 설명했다.

원래 김 주석의 이름은 ‘성주’로 김 주석의 아버지가 나라의 기둥이 되어달라는 뜻으로 이룰 ‘성(成)’, 기둥 ‘주(柱)’라는 이름을 썼으나 후에 함께 혁명에 나선 이들이 조선의 태양이 되길 바라며 ‘일성(日成)’이라는 이름을 바쳤고 그 이름을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어려서 글을 가르쳐주자 김 주석은 자음과 모음의 결합원리를 알고 스스로 글을 깨우쳤다고 한다. 주변에서는 그를 두고 “성주는 배우지 않고도 글을 아는 인물”이라 칭송을 했단다. 어머니가 그동안 배운 것을 써보라 했더니 김 주석은 4살에 ‘조선독립’이라고 썼단다.

나이가 어렸으나 조선의 가장 절박함을 심장으로부터 알았던 것이라고 해설강사는 강조했다.

관찰력 또한 높아 명절을 맞아 아버지가 이웃에서 빌려온 축음기를 보고 사람들은 작은 사람이나 강아지가 그 속에 들어가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했으나 어른들이 없는 틈에 모두 분해를 해 기계적 원리로 소리가 나는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비범함과 장군예지를 가진 김 주석은 놀이를 즐겨도 머리를 쓰는 씨름이나 군사놀이를 즐겼으며 아이들의 대장을 맡곤 했단다.

그러면서도 자신들도 어려웠으나 발 벗은 아이들을 보면 자신의 짚신을 벗어주곤 해 후에 동무들이 만경봉 일대에서 김 주석의 짚신을 신어보지 않은 아이들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회상할 정도의 따뜻한 성품을 가졌다고 한다.

김 주석 5살에 아버지가 일제군사에게 체포되는 모습을 보았고 6살에는 철창에 갇힌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원한을 느꼈고 7살에는 ‘3.1인민봉기’에 30리가 넘는 거리를 걸어 나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단다.

이때 김 주석은 사람을 죽고 죽이는 모습을 처음 봤고 죽으면서까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큰 뜻을 품었다고 한다.

7살에는 아버지와 함께 길을 떠나며 일제가 횡포를 부리지 않는 곳을 찾았으나 우리 땅 끝까지 일본이 자신의 땅인 양 행세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조선 전체가 하나의 감옥 같다”며 “사람이 살아가면서 힘든 일이 많겠지만 가장 슬픈 것은 나라를 잃은 슬픔이다”고 말했다 한다.

망국의 설움을 갖고 중국에 건너가 공부를 한 김 주석은 늘 1등을 도맡아 하곤 해 교사와 학부모들은 “김성주 학생처럼만 해라”라고 했단다.

지금으로 치면 김 주석은 소위 ‘엄친아’(엄마친구 아들이라는 뜻으로 엄마들이 “내 친구 아들은 1등만 하는 우등생이며 또 어찌나 착한지 성품도 뛰어나고 돈도 잘 벌고...한단다. 너는 뭐니?”하는 것을 빗대 모든 것에 뛰어난 사람을 지칭함)였던 셈이다.

공부도 잘하고 용맹하고 게다가 따뜻한 마음까지 갖고 어려서부터 남달랐다니 엄친아 중에서도 1등 엄친아가 아닌가, 어렸을 때 만경대와 중국에서 함께 공부했던 동무들이 김 주석 때문에 부모님께 많이 혼났겠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수령님의 고향은 곧 나의 고향입니다”

▲ 휴식시간에 해설강사(맨 우측)가 사향가를 부르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또 다른 방에서는 김 주석이 20년 만에 나라를 찾고 고향에 돌아온 뒤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46년 1월 1일 이곳에 처음 와 “수령님의 고향은 곧 나의 고향입니다”며 “백두산이 내가 나서 자란 혁명의 요람이라면 만경대는 내가 직접 수령님의 어린 시절을 따라 배운 일가 분들의 고향과 영향을 받으며 학업의 뜻을 키운 유서 깊은 곳입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길고 긴 해설이 끝나고 사적관에서 나오자 해설강사는 일행들이 일부 화장실에 간 사이 ‘사향가’를 애절하게 불렀다. 사향가는 김일성 주석이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하면서 고향을 그리며 만든 노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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