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무부가 11일(현지시간)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북한이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으로 1988년 1월 미국에 의해 테러지원국 명단에 오른 뒤 20년 9개월만의 일이다. 북한의 기존 표현에 따르면 ‘부당하게 들씌워진 고깔’을 이제야 벗어버리게 된 것이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도 12일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환영한다”고 밝히고, 미국의 조치에 따라 “우리도 ‘행동 대 행동’ 원칙에서 영변 핵시설의 무력화(불능화)를 재개”하겠다고 알렸다. 이로써 핵프로그램 검증문제를 둘러싼 대립으로 파국위기까지 치달았던 북핵문제는 일단 2단계 불능화 작업을 위한 본궤도로 복귀하게 됐다. 역진(逆進) 상태로 가려던 북미관계가 다시 정위치를 잡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 테러지원국 해제 발표는 단순히 비핵 2단계 마무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테러지원국 해제가 갖는 상징적 의미가 큰 만큼 이 사건 하나만으로도 북미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이제 북미간에는 그간 예상은 해왔지만 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새로운 차원에서 펼쳐질 것이다. 북한이 이른바 ‘북핵문제’를 통한 한반도비핵화의 목표를 미국과 적대관계 청산에 두고 있는 만큼 테러지원국 해제 이후부터는 자연스럽게 북미 수교협상과 그 전제조건으로 평화협정 체결문제 등이 현안으로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한과 미국은 관계정상화라는 긴 노정에서 이제 매우 의미있고 가시적인 첫 행보를 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테러지원국 해제는 북미관계사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따라서 이번 테러지원국 해제는 북미 양자에게도 매우 이익이 될 것이다. 미국측은 북핵 2단계인 불능화 단계를 부시 행정부 임기내에 마무리하고 미국의 새 행정부와 북한이 3단계 협상을 시작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같은 미국의 대북정책의 ‘연결성’은 지난 2000년 말-2001년 초 클린턴-부시 행정부 이행기 때 ‘단절’, ‘부정’됐던 대북정책과 비교해 볼 때 상전벽해의 느낌을 준다. 게다가 출범 초 북한을 ‘악의 축’이라 불렀다가 말기인 지금 ‘테러지원국 해제’라는 극에서 극을 오간 정책결정 이면에는, 부시 행정부가 2006년 10월 북한의 지하 핵실험 이후 어디쯤에선가 내린 대북 적대시정책의 철회라는 ‘전략적 결단’을 아직 유지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여준 셈도 된다. 떠나가는 부시 행정부가 북한측에 최소한의 성의(신뢰) 표시는 한 셈이다.

아울러 북한의 외교력이 새삼 주목을 끌고 있다. 여기서 북미간에 누가 이득을 봤는가를 따지는 것은 양자가 향후 가야 할 관계정상화라는 긴 안목에서 볼 때 의미없는 타산일 뿐이다. 하지만 테러지원국 해제를 이끌어내기까지, 특히 막판 북한의 외교적 공세와 적극성은 눈여겨 볼만 하다. 지난 6월 북한의 핵신고와 영변 원자로 냉각탑 폭파 때까지만 해도 테러지원국 해제는 시간문제로 비쳐졌다. 그러나 8월 11일 시한을 넘기자 이상기류가 생겼다. 북한은 8월 26일 성명을 통해 핵 불능화 중단과 원상복구를 선언했다. 이어 10월 1-3일 힐 국무부 차관보를 평양에 불러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때 힐의 방북에서 북미 사이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테러지원국 해제가 이때 북한이 제시한 ‘분리검증안’을 부시 행정부가 수용했다는 설도 있고 심지어 북한의 2차 핵실험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나, 어쨌든 북한의 외교술을 돋보이게 하는 대목들임에는 틀림없다.

문제는 우리 정부의 입장이다. 일본이야 자나 깨나 ‘납치’문제에 매달려 있기에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정부의 입장은 종잡을 수가 없다. 북한이 테러지원국에서 해제되어 북미관계가 개선되면 이는 6자회담에 활력을 주고 더 나아가 한반도비핵화에도 청신호가 되는 일이다. 이명박 정부도 바라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제 소식이 나올 때 소극적 태도로 나오다가 해제 발표가 나자 ‘북핵폐기를 위한 진전된 조치’라고 긍정적 논평을 냈지만 그 과정이 영 마뜩치 않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앞으로가 문제다. 위에서도 밝혔듯이 테러지원국 해제 이후 한반도 정세는 ‘북미수교’, ‘평화협정’ 등의 새로운 거대 담론들을 쏟아대면서 요동칠 것이다. 한미공조에만 매달려 있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으로는 일정 역할은커녕 한마디 입조차 열 수가 없다.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를 기화로 우리 정부도 대북정책의 변화를 꾀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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