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저서 ‘논리철학논고’에서 저 유명한 명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썼다. 그렇다. 우리는 신의 문제나 인간의 문제 등, 우리가 잘 알 수 없고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입을 다물어야 한다. 이는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외부 세계에 의해 철저히 닫힌사회다. 그래서 북한으로부터 어떤 사실(fact)이나 고급 정보를 빼낸다는 것은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하늘에서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렵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평상시엔 북한이 폐쇄사회라고 투덜대면서도 약간의 이상징후라도 나타나면 온갖 설(說)들이 난무한다는 것이다.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이때 사실이나 정보는커녕 첩보 차원의 설들이 춤춘다. ‘카더라’ 방송도 기승을 떤다. 유언비어가 횡행하고 온갖 시나리오가 작성된다. 이때만큼은 북한이 전혀 폐쇄사회가 아닌 열린사회를 넘어 정보 과잉사회가 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9.9절 60돌 기념행사에 불참하자, 곧바로 여러 설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건강이상설’과 그에 입각한 갖가지 ‘가능성설’이다. 특히 우리 정부에서는 국정원과 청와대가 치고 나갔다. 정부측은 “김 위원장이 신변에 이상이 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멍석을 깔았고 국정원은 “8월 14일 이후 순환기 계통의 이상이 발생해 외국 의사들의 수술을 받았다”면서 병명에 대해 뇌졸중, 뇌일혈, 뇌출혈 등 3개 질병의 가능성을 거론했다. 특히 정부측은 “양치질을 할 정도의 건강 상태”라고 선정적인 발언까지 했으며, 국회 국방위에서는 북한 ‘급변사태’ 가능성을 점검했다. 한편, 국내외 언론은 김 위원장의 건강이상을 기정사실화해서는 북한내 ‘권력투쟁 가능성’ ‘집단지도체제 가능성’ ‘3대세습 가능성’ ‘군사정권 수립 가능성’ ‘붕괴 가능성’ 등 온갖 ‘가능성’의 설들을 쏟아냈다. ‘김 위원장이 만약 건강에 이상이 있다면’이라는 첫 번째 가정 하에 ‘그렇다면 이러이러할 가능성이 있다’며 또 한번의 가정을 하는 식이다. 가히 작문(作文) 수준인 셈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김 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 오리무중에 빠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미국이나 중국측이 침착하다. 미 행정부는 “김 위원장의 건강이상설에 대해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중국 정부는 “북한측으로부터 김 위원장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고 답했다. 우리 정부보다 대북 정보에 상대적으로 앞서 있을 미국이나 중국이 자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우리 정부의 통일부가 잇달아 “확인되지 않는 사안들이 보도되는 것은 남북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며 국정원이나 청와대의 첩보 남발에 제동을 걸고 있다. 북한도 일관하다. 북측 인사들은 김 위원장의 와병설이 돌자 즉각 “허튼 소리”,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 등으로 반발했으며 특히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문제는 없다”고 못박았다. 게다가 북한의 입장을 대변해 온 재일 <조선신보>가 17일자에서 김 위원장의 9.9절 기념행사 불참 이유가 한반도 정세의 긴장과 연관이 있음을 시사했다.

물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9.9절 행사에, 그것도 ‘꺾어지는 해’에다가 육십갑자의 기념행사에 불참한 것은 외부에서 오해를 살 만한 일이다. 그렇다고 그 이유가 병이나, 부상 때문인지 또는 북한의 전략이나 고도한 심리전인지는 알 수가 없다. 게다가 8월 중순 이후 김 위원장의 동정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지만 그같은 일은 예전에도 몇 차례 있었다. 아무튼 문제의 핵심은 김 위원장이 9.9절 행사에 불참했다는 ‘사실’이고, 그 이유가 건강이상 때문이라는 ‘설’이다. 그런데 설사 같은 건강이상설이라 하더라도 첩보에 의한 발설과 정보에 의한 발설에는 차이가 있다. 첩보에 의한 발설은 금기시되어야 한다. 이는 북한에 대한 무례(無禮)이자 발설자 자신에 대한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분명한 건 외부세계의 그 누구도 김 위원장의 9.9절 행사 불참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의 경구처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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