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한 일이었다. ‘언행일치’의 북한이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기일인 지난 8월 11일에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지 않았는데도 곧바로 아무런 반발을 하지 않은 것은. 통상 북한의 성깔(?)로 보아 상대가 누구든 약속을 어기면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텐데 말이다. 그래서 저간의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성김 미 북핵특사의 분주한 움직임(14~16일간 베이징)으로 보아 북측 관계자와 북핵검증체계 등에 대한 협의가 진행될 것으로 예측했었다. 북미가 북핵검증체계를 조율중이라면 북측이 테러지원국 명단 미삭제에 대해 당장 반발하지 않을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26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 성명이 발표되자, 그게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참 당연한 일이다. 북한의 성명을 보니,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지 않고 6자회담 10.3합의사항을 어겼다면서 “부득불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두 가지 대응조치를 선언한 것은. 하나는 ‘핵시설 불능화작업 즉시 중단’이고 다른 하나는 ‘영변핵시설 원상복구 조치 고려’다. 북한은 테러지원국 해제 기일인 11일에서 사흘 지난 14일에 핵시설 불능화작업을 중단했으며, 이를 “이미 유관측들에 통지”한 것이다. 아울러 핵시설 원상복구라는 강수마저 던졌다. 한마디로 말해 북한은 미국이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발효를 연기시키자 성깔대로 즉시 반발한 것으로 드러났다. ‘언행일치’의 북한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북한은 그리 길지 않은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자신의 ‘진정성’을 맘껏 드러냈다. 먼저,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와 ‘핵신고서 검증문제’와는 상호연관이 없다는 것을 폭로(?)했다. 그런데 미국측은 이제까지 ‘핵신고서 검증문제’가 해결되어야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만들어 왔다. 그러나 성명의 내용대로 6자나 북미사이의 그 어떤 합의들에도 핵신고서에 대한 검증문제를 명단 삭제의 조건부로 규제한 조항은 없다. 그래서 북한은 “이것은 합의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고 강하게 지적했다. 맞는 말이다. 실지로 10.3합의에도 이같은 규제조항은 없다. 그러기에 미국측은 이 ‘사실’ 앞에 꿀먹은 벙어리마냥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북한은 ‘한반도비핵화’에 대한 입장도 밝혔다. 미국이 자꾸 ‘검증, 검증’하기에 북한은 “검증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9.19공동성명에 따라 전조선반도를 비핵화하는 최종단계에 가서 6자 모두가 함께 받아야 할 의무”라고 못박았다. 즉, 남한에서의 미국 핵무기 부재와 반입ㆍ통과 등에 대한 검증과 북한의 핵포기 검증이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긴가민가하던 한반도비핵화 문제에 대한 북측의 입장이 명확히 드러난 것이다. 사실 ‘핵신고서 검증’문제는 어떤 합의문에도 없지만, ‘한반도비핵화’문제는 9.19공동성명에 나와 있다. 어떠한 외교문서든 정확히 합의하고 그도 미흡하면 합의문에 대한 담보각서까지 받을 정도도 깐깐한 북측의 문서합의 위력이 드러난 순간이다.

북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성명에서 “우리는 ‘미국에 고분거리지 않는 나라’ 명단에 그냥 남아있어도 무방하다”고 밝혔다. 미국이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한반도비핵화가 되어도 좋고, 그렇지 않으면 핵보유국으로 남아도 좋다는 양수겸장의 호기가 있어 보인다. 이 정도라면 아무리 강심장의 미국이라도 가슴이 철렁거릴 만하다. 분명한 건 북한은 이제껏 북미협상에서 ‘언행일치’를 보여 왔다는 것이다. 미사일을 발사할 순간이 되면 발사하고, 핵실험을 하겠다면 실험을 했다. 미국이 뾰족한 대응을 하지 않는다면 북한이 영변핵시설들을 원상복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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