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진화하고 있다. 지난 토요일인 24일 제17차 촛불문화제를 계기로 촛불이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리하여 촛불이 3일째를 지나 27일 새벽까지 타면서 이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청계광장을 비롯해 종로, 신촌, 명동에서도 타오르고 있다. 광장에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 성난 촛불들의 행선지는 명확하다. “청와대로 가자”다. 촛불과 경찰이 시내곳곳에서 대치를 하다가 결국 새벽이 되자 경찰병력이 철야 연좌농성을 하는 촛불들을 향해 살수차로 물대포를 쏘아대며 강제진압에 나서고 있다. 이같은 광경은 25일 새벽에 이어 26일, 27일 새벽에도 재현됐다. 무장한 경찰이 강제로 촛불을 끄기 위해 진압에 나서자 이 과정에서 여러 촛불들이 연행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 사이에 구호에도 변화가 왔다. 시위의 변화과정에서 구호는 매우 중요하다. 짧고 명확한 구호는 전투의지를 불사른다. 그동안 여러 차례 문화제에서는 사회자의 구호에 맞춰 촛불들이 따라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거리와 시위에 나선 촛불들은 “협상무효 고시철회”, “이명박 탄핵”, “이명박은 물러가라”, “독재타도” 등을 외쳤다. 이들 구호는 흡사 21년 전 6월항쟁 때의 구호인 “호헌철폐 독재타도”, “호헌철폐 직선제로”를 연상시킨다. 6월항쟁 때 국민들은 거리의 시위대를 지지했다. 지금도 그에 못지않다. 거리의 촛불들을 향한 시민들의 지지가 범상치 않다. 인도에 있던 시민들이 행진하는 촛불을 향해 ‘화이팅’을 외치고, 버스에 앉아있던 시민들도 유인물을 적극 요구하는 등 촛불에 매우 우호적이다. 촛불이 진화함에 따라 시민들의 지지가 붙고 있는 형국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촛불들은 왜 청와대로 가자고 했을까? 왜 전투적 구호까지 등장한 것일까? 시민들은 왜 촛불의 행진에 우호적일까? 한마디로 미국산 쇠고기 개방에서 촉발된 국민들의 ‘광우병’에 대한 의심과 분노를 정부도 그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지난 22일 대국민 담화문에서 “‘광우병 괴담’이 확산되는 데 당혹스러웠다”고 천박한 인식을 드러내며 국민들의 진심에 모르쇠로 답했다. 이어 정부는 미국과 추가협상을 했다고 우기면서 ‘미국소는 안전하다’는 말만 앵무새마냥 되뇌었다. 야당들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해임건의안마저 부결시키는 무능을 보여줬다. 이러니 촛불들이 보기에 사위가 막혔다. 믿을 데라고는 아무 곳도 없다. 그렇다면 촛불의 선택은? 꽉 막힌 사위의 어둠을 촛불들이 스스로 밝히고 자기 힘으로 뚫는 수밖에 없다.

이처럼 국민들의 의식은 날로 성장하고 분노의 표현도 다양해지는데 비해 오직 정부만이 20여년 전과 똑같이 공권력으로 막으려고만 한다. ‘진화하는 촛불 대 퇴행하는 공권력 사이의 대립’이다. 이래서는 문제를 풀지 못한다. 이번 촛불시위의 특징은 자연발생성이다. 자생성의 한계는 중심이 없기에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인터넷 뉴스와 인터넷 방송, 휴대폰 문자에다 의협심이 보태져 거대하고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게다가 그 끝을 가늠할 수도 없다. 경찰이 붙잡아 가봤자 평범한 시민이고 배후가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연행해도 문제고 구속하면 더 문제다. 어차피 정부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그러니 첫째, 정부는 촛불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강제로 해산하거나 연행해선 안 된다. 둘째, 연행자를 즉각 풀어줘야 한다. 배후를 따질 계제가 아니다. 셋째, ‘광우병 괴담’이라 치부하지 말고 미국과 재협상에 나서라. 이 세 가지가 국민을 섬기는 징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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