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19일 6자회담 수석대표인 김숙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워싱턴으로 날아가 미국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동아태차관보와 일본측 수석대표인 사이키 아키다카 아주국장과 한미일 3자협의를 가졌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한미일 3자회의가 열렸다”며 “이해의 폭과 깊이를 굉장히 넓혔다는 것에서 만족스런 3자협의였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특히 그는 “한미일이 다른 나라보다는 생각의 주파수를 맞추는데 이념의 가치에 있어서 가깝지 않겠는가 내심 생각도 있었고, 미국의 3자협의 요청도 있었다. 우리도 일본과 협의, 협력을 강화한다는 방침도 있어서 여기에 응했다”고 회동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한미일 간의 이념적 가치의 유사성이나 사전 협의의 필요성은 이전부터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같은 설명만으로 6자회담을 앞두고 한미일 3국의 수석대표가 회동한 이유를 모두 이해하기는 힘들다.

베이징에서 사진 안 찍은 송민순, 사진 찍은 천영우

실제로 기자가 현지취재를 시작한 2005년 4차 6자회담 1단계회의 당시부터 한.미.일 3국 대표단은 6자회담 기간 중 회담장을 벗어나 베이징 시내 음식점에서 식사를 겸한 회동을 가져온 관례가 있다.

 

▲ '9.19공동성명'이 타결된 제 4차 6자회담 2단계 회의가 한창 진행중이던 2005년 9월 16일, 한미일 3국 대표단이 오찬회동을 가졌지만 한국측 수석대표인 송민순 차관보는 기자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미국측 힐 수석대표(왼쪽)와 일본측 사사에 수석대표가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자료사진 - 통일뉴스]

특히 4차 6자회담 2단계회가 진행 중이던 2005년 9월 16일에도 한미일 3국 대표단은 역시 베이징 시내 한 음식점에서 오찬회동을 가졌고, 회동 후 미국의 힐 수석대표와 일본의 사사에 수석대표가 기자들 앞에 섰다.

그러나 왠일인지 한국 대표단은 회동후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갔고, 한국측 수석대표인 송민순 차관보는 끝내 기자들 앞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이후에 확인한 바로는 한미일 수석대표가 나란히 웃음을 지으며 사진에 찍히는 것이 중재역을 자임한 한국측으로서는 별로 바람직한 모양새가 아니라는 판단 하에 의도적으로 자리를 피했다는 것이었다.

송민순 수석대표는 며칠후 역사적인 ‘9.19공동성명’을 탄생시킨 주역의 한 명이 되었고, 이후 청와대 안보실장을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외교통상부 장관에 올랐다.

그러나 5차 6자회담 2단계 회의부터 한국측 수석대표가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으로 얼굴이 바뀌면서 상황도 다소 달라졌다.

북한이 미사일과 핵실험을 강행하고 정부가 쌀.비료 지원을 전격 중단하면서 남북 관계가 경색국면으로 치닫고 있던 2006년 12월 21일, 천영우 수석대표는 미국측 힐 수석대표, 일본측 사사에 수석대표와 만찬 회동후 나란히 웃음지으며 기자들의 플래쉬 세례를 받았다.

당시는 남북관계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BDA(방코델타아시아) 문제로 북미 간에도 첨예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BDA 문제와 6자회담은 별개’라는 미국측 논리를 그대로 따르며 한미일 수석대표가 나란히 미소짓는 사진을 내보낸 것은 아무래도 한국의 수석대표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런 탓인지 ‘BDA로 시작해서 BDA로 끝난 회담’에서 천영우 수석대표는 자신이 강조해온 ‘6자회담에서의 한국의 고유한 역할’을 찾기 어려웠고, ‘고유’한 역할은 ‘고요’했다는 평판을 감수해야 했다.

물론 이후 천영우 수석대표는 오랜 국제기구 활동경험과 특유의 친숙한 중재력으로 6자회담 수석대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2.13합의’와 ‘10.3합의’를 일궈낸 주역이 되었고 새 정부에서도 중요국가의 대사직을 맡게 됐다.

워싱턴에서 사진 찍은 김숙의 ‘진정성’

시간은 흘러 BDA 문제는 해결되고 남북간에도 2차 정상회담이 열리는 등 새로운 국면이 전개됐지만, 지난해 대선 결과 정권이 교체되고, 올해 들어 남북관계는 다시 얼어붙었다. 이에 비해 북미 관계는 ‘4.8싱가포르 합의’를 기점으로 다시 가속도가 붙고 있는 형국이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 새 정부의 첫 6자회담 수석대표로 임명된 김숙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6자회담이 시작도 되기 전에 워싱턴으로 날아가 한미일 3국 수석대표간의 회동을 갖고 회담 결과에 만족감을 표하며 나란히 미소짓는 얼굴을 언론에 내보인 것이다.

새 정부의 한미동맹 강화, 한미일 3자동맹 복원 추진이라는 전략적 발상에서 이루어진 일일테지만 이를 보고 있을 북한이나 중국 입장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 국제외교 무대의 상식일진데 지켜보기에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남북 대표단의 회동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우리가 나서서 구체적인 문제를 조정하겠다고 하는 생각보다는 만나고 싶다”며 “북한과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나아갈 정책적 의도가 있다는 우리의 진정성을 이야기해주고 싶다가 우선이다”고 말했다. 또한 “시간이 난다면 미국과 이야기해온 바에 의하면 미국도 6자회담에 진정성이 있다는 것을 옆에서 같이 이야기해주고 싶다”고도 했다.

그러나 개인은 물론 한 국가의 ‘진정성’은 심정적인 수준이나 희망 수준에서 상대방이 다 헤아려줄 수는 없는 법이다. 올바른 전략에 따른 객관적 실천과정을 통해 상대가 ‘진정성’을 읽어내고 수긍하지 못한다면 과연 나의 진정성이 바른 것인지 다시 한번 점검이 필요할 것이다.

9.19공동성명이 채택된 직후 송민순 수석대표가 첫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만들어진 역사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위한, 우리의 미래를 위한 역사를 만드는데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고 했던 말의 참뜻과 사진 찍는 자리를 피해갔던 지혜로운 실천이 새삼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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