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자회담에서 맞서고 있는 북한과 미국 사이에 때 아닌 ‘체면 공방’이 한창이다. 다름 아닌 지난 8일 싱가포르에서 진행된 북미 양자회담과 관련해서 11일 두 나라가 서로 상대편의 체면 얘기를 꺼냈다. 지금 북미간 상황은 지난해 10.3합의에 의거해 6자회담 2단계 이행조치를 놓고 막바지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그 요지는 북측의 핵프로그램 신고와 미국측의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이다. 원래 이 동시행동은 지난해 말까지 완료하기로 했으나 시간표에 차질이 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측은 북측이 핵신고를 미루고 있다는 주장이고 북측은 성의있게 신고를 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미국측의 대북 ‘우라늄농축계획 의혹’과 ‘시리아와의 핵협조 의혹’이 자리 잡고 있다. 즉, 미국은 북한이 이들 의혹을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북측은 사실무근이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 8일 북미 6자회담 수석대표들이 싱가포르에서 회담을 하고 나서 매우 긍정적인 메시지와 멘트들이 나오고 있다. ‘우라늄농축계획 의혹’과 ‘시리아와의 핵협조 의혹’ 신고와 관련한 해법이 나왔다는 것이다. 북측에 의하면 북미간 ‘싱가포르 합의’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언론에서 그 내용에 대해 간접시인 방식이니, 상하이 방식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고 있으나 아직 확실치는 않다. 분명한 건 시간을 끌던 미국측도 ‘싱가포르 합의’에 긍정적이라는 것이다. 미 백악관 대변인이 14일 ‘싱가포르 합의’에 대해 “부시 대통령이 동의했다”고 확인해 준 것이다. 그렇다면 궁금한 점은 이들 의혹(?)이 왜 이리도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채 시간만 잡아먹고 있었느냐이다. 이와 관련해 북미 양측의 입장을 각각 대변하는 언론에서 ‘체면’ 얘기가 나왔다.

북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 <조선신보>는 11일자에서 이번 싱가포르 합의는 북한의 그간 ‘우라늄농축계획 의혹’과 ‘시리아와의 핵협조 의혹’에 대한 일축 입장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면서, 그러기에 “결국 지난 수개월간은 일련의 ‘의혹’과 관련한 부시 정권의 체면을 유지하는데 소요된 시간이었다”고 체면 문제를 건드렸다. 더 나아가 이 신문은 “10.3합의 이행의 교착상태는 조선의 행동선행과 미국의 언행불일치라는 대치된 구도를 보여주었지만 조선측은 지난 수개월간 미국과의 협상에 아량 있게 응해왔다”면서 “결과적으로 싱가포르에서는 부시 정권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합의가 이루어지고 미국측은 대통령의 임기 내에 비핵화과정을 계속 진척시킬 수 있는 명분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고 북측이 미국측의 체면을 세워줬음을 은근히 부각시켰다.

그런데 미국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워싱턴포스트>는 다르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 신문은 11일자에서 “싱가포르 회담에서 북한과 미국은 6자회담 진척을 지연시킨 과거 우라늄 농축 관련 핵활동 신고 수위, 시리아와의 핵개발 협력 의혹 등 논쟁거리를 제껴두기로 합의했다는 점이 중요한 ‘변화’라고 평가”하면서 “양자는 이번 싱가포르 회담과 지난 달 스위스 제네바 회담을 통해 제기되는 의혹들에 대해 북한이 공개적으로, 정확히 시인하는 대신 이러한 의혹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이 신문은, 힐 차관보는 ‘북한은 뭔가를 공개적으로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해 제네바, 싱가포르 회담을 통해 비공개적 합의에 이른 게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것임을 우회적으로 내비쳤다. 한편 <로이터통신>도 이와 관련, 미국이 작년 12월 31일 시한을 넘긴 핵 신고를 이끌어내기 위해 북한에 ‘체면을 살리는 방법’을 제공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북미의 입장을 각각 대변하는 유력지들이 양자가 서로 상대편의 체면을 세워주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체면 공방’이라 부를 만하다. 그러니까 지금 6자회담 2단계 이행조치가 교착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 양국의 체면치레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괜찮다. ‘체면’ 정도라면 괜찮다는 것이다. 과거 양자가 한창 적대적 관계일 때 입에 담기도 힘든 설전을 벌였었다. 인신공격성은 물론 살의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체면 공방’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체면이라는 것은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세워주면 되는 것이다. 아량과 배려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게다가 넌지시 상대편의 체면을 세워주면 강자다운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북미는 서로 자신이 상대편의 체면을 세워주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강자가 되고 싶은가 보다. 어쨌든 북미가 적대관계라는 긴 터널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