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장)


주체사상과 과정철학. 얼핏 전혀 무관하게 여기기 십상이다. 특히 철학을 전공으로 한 학자로서는 더욱 그럴 성싶다. 하지만 강단에서 정년을 맞을 때까지 철학을 강의하고 두터운 연구서를 부지런히 내온 김상일 교수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 김상일 교수 신간 『뇌의 충돌과 문명의 충돌』(지식산업사, 2008) 표지. [자료사진-통일뉴스]
김 교수가 최근에 출간한 『뇌의 충돌과 문명의 충돌』(지식산업사, 2008)은 마지막 장 ‘양 뇌 이론으로 본 주체사상’에서 주체사상과 과정철학의 유사성을 부각한다. 겉으로만 본다면 주체사상과 과정철학은 접점이 없어 보인다.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은 무엇보다 사변철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의 철학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단순한 사변철학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서양의 사유를 지배해온 정태적 실재관을 벗어나 존재보다 생성(becoming)의 현실을 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사상과 과정철학 비교에 앞서 저자가 말하는 두뇌의 충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현대 과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3만 년 전부터 뇌 속에 있는 신피질이 갑작스럽게 늘어나 상하 균열이 생겼고, 신석기 후기에 들어서서 뇌의 좌우균열이 심화 되었다고 강조한다. 뇌의 좌우 균열로 사람의 문명에 병이 생기고, 여러 차원의 충돌이 일어났다는 분석이다. 문명 사이에, 성 사이에, 계급 사이에 충돌 이전에 뇌 충돌이 있다는 논리다.

뇌 이론에서 우뇌는 “여러 부분을 하나하나 인지”하는 반면에 좌뇌는 “여러 부분을 하나로 묶는 구실”을 한다.

뇌 이론을 바탕으로 저자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이 양 뇌의 균열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 정신과 물질, 의식과 존재, 신과 세계 같은 대립쌍 들의 갈등과 소외에서 시작한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주체변증법은 두 뇌를 이어주는 뇌량의 존재가 시사하듯이 통일을 전제로 한다는 게 저자 논리의 핵심이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황장엽의 논문을 인용한다. 저자는 황장엽이 남쪽에 내려와 되레 수구-보수 세력의 입지를 강화해주고 있는 현실을 통렬히 비판하지만, 주체의 변증법 논리 자체는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장엽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의 변증법은 정신을 가진 물질적 존재인 인간이 발전을 위한 운동을 일으키고 그 운동을 떠밀고 나가는 주체로 되고 있다. 선행 변증법들이 주체가 없는 변증법이라면 우리의 변증법은 주체가 진행하는 발전운동의 변증법이다. 우리의 변증법을 주체의 변증법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체의 변증법, 그 연장선에서 저자는 화이트헤드가 존재의 원리로 제시한 “생성과정이 존재를 구성한다”는 명제에 주목한다. 여기서 생성과정이란 “여럿이 하나가 되고, 하나는 여럿에 따라 증가”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창조성으로 강조한다. 관념론과 유물론이 정신과 물질을 실체로 파악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과 달리, 주체사상은 생성의 논리로 사람을 중심에 놓는다.

저자는 주체사상에서 사람이라는 말은 근대시민사회의 인간과 달리, 인민대중 속의 사람이어야 함을 역설한다. 여기까지 공감하기는 쉽다.

그런데 저자는 더 나아가 관념론과 유물론을 지양해 종합한 인간상을 ‘참사람론’으로 규정하면서 ‘물질과 정신이 잘 조화된 이상적 인간’을 ‘당의 수령’으로 제시한다.

과연 그렇게 볼 때 아무 문제가 없을까. 수령론에 대한 분석이 일면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 명제가 통용되려면 ‘물질과 정신이 잘 조화된 이상적 인간’은 더 많아야 하지 않을까. 아쉽게도 그런 문제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저자의 다음과 같은 목소리는 울림을 준다.

“주체사상이 관념론과 유물론을 동시에 비판하는 것은 근대 이후 등장한 데카르트적 세계관과 마르크스적 세계관을 동시에 타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이 과제는 지금 전 지구적 과제이기 때문에, 만약 제3의 길을 가는 주체사상이 주장하는 바가 이론적 설득력을 갖기만 한다면 이는 곧 세계철학으로 가는 길을 여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저자는 바로 다음에 마치 덧붙이듯이 한 문장을 더 썼다. “북한이 이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주체사상의 대혁신을 단행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게 어쩌면 저자가 꼭 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을까. 주체사상의 대혁신, 그 구체적 혁신의 내용을 저자의 다음 저작에서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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