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비가 오는 날에는 부침개에 동동주 한잔, 무더운 여름날에는 시원한 맥주 한잔, 스트레스라도 받는 날이면 소주 한잔, 기쁜 날이면 샴페인 한잔을 하자고 하는데요, 자연적으로 발효되어 알콜 성분이 생긴 과실주를 우리 술의 기원으로 볼만큼 술은 인류가 문명생활을 하기 훨씬 이전부터 마셔 술만큼 역사가 길고 우리 인간들과 희노애락을 함께하는 음식이 없는 듯합니다.

이에 전통주부터 최근의 소주, 맥주까지 우리나라 술 이야기를 몇 차례에 걸쳐 해보려고 합니다. /필자 주

음주가 건강을 해친다고는 하지만 또 가벼운 반주 한잔은 오히려 심장 등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결과가 많습니다. 식사 때 물 한잔을 마시는 것보다 와인이나 맥주, 소주 한잔 정도를 마시면 혈당 상승이 억제돼 당뇨병 예방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데요, 비싼 술은 수 천 만원을 호가한다고도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마시고 싶은 술을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술을 언제든지 자유롭게 마실 수 있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고대에는 일반 백성들이 식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술을 빚지 못해 종교행사 직후에나 술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그리고 삼한의 농경의례 등 부족국가시대의 제천의식에 마을 단위로 술을 빚어 음주와 가무를 한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 시대에는 귀족 중심으로 술을 자가(自家) 제조해 소비하다가 후기에는 김유신 장군이 드나들던 기생 천관녀 이야기 등을 미루어 볼 때 귀족들을 대상으로 술을 판매하는 업소가 생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숭상하는 문화였기 때문에 제사를 위해 동물을 잡지 못하도록 해 차가 발달하고 고기와 관련된 음식은 그리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고려 말 몽고 침입의 영향으로 육고기를 즐겨먹기 시작하며 소주가 들어오게 됩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집에서 유교식 제사를 지내면서 고기를 이용한 음식과 술이 발달하기 시작했죠.

1490년 (조선 성종 21년) 사간(司諫)인 ‘조효동’이 “세종 때는 사대부집에서 소주를 사용하는 일이 매우 드물었는데, 요즈음은 보통의 연회 때에도 일반 민가에서 소주를 만들어 음용하는 것은 극히 사치스러운 일이므로 소주 제조를 금지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한 사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소주가 상당히 고급주이며 약용주로서 귀족들이나 마실 수 있었던 술입니다.

일본의 조선 침탈 시기에는 세원 확보를 위해 1909년 일본에 의해 주세령이 시행됩니다. 일제는 1916년부터 일반인들의 양조금지령을 내리고 강제단속을 시작, 수천여종에 이르는 전통 가양주를 말살시키며 우리의 술을 약주, 막걸리, 소주로 획일화토록 했습니다.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으로 제사를 지낼 수도 없어 제사를 통한 음주문화도 많이 쇠퇴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가난한 서민들은 술을 마실 기회조차도 없었던 것이죠.

두꺼비 트레이드 마크로 유명한 진로도 이 시기에 설립된 것으로 진로의 역사는 1924년 10월 평남 용강군 지운면에 진천양조상회(眞泉釀造商會)를 설립하면서 시작됩니다.
이후 한국전쟁의 발발로 피난을 와 1951년 부산에서 소주 ‘금련(金蓮)’을, 1952년에는 ‘낙동강(洛東江)’을 생산했으며 1954년 6월에야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서광주조(西光酒造)를 발족시켜 오늘날 소주의 대명사 ‘진로’를 탄생시키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두꺼비가 익숙하지만 창업기 진로의 상표에는 원숭이였다가 월남한 후 진로가 전국을 대상으로 영업을 개시한 신길동 시대에 와서 두꺼비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해방 후에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서양 술이 들어오기 시작, 고급양주를 마시는 것이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었고 서민들은 막걸리를 제조해 마시는 정도였습니다.

1960년대에는 경제개발의 붐을 타고 농촌에서 대도시로 인구이동이 늘어나고 화폐경제의 활성화로 황금만능주의가 생겨나며, TV 광고 등으로 술의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 면 단위마다 양조장이 생겨났습니다.

1965년에는 정부의 양곡 정책으로 쌀이나 보리 등의 곡물을 술의 원료로 쓸 수 없게 되어 희석식 소주가 대량 공급되었습니다.

당시 선거철에는 소주와 막걸리가 난무하고 선물로 고무신이 제공되기도 했던 때로 이때부터 폭주하는 문화가 생겨나고 술이 남자다움으로 대변되며 술을 마신 뒤의 실수도 어느 정도 묵인을 해주게 됩니다.

1970년대에는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술을 마시고 사업자들은 접대용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죠. 경제성장을 위해 직장인들은 밤늦도록 근무를 해야 했고 그날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마시는 술은 통행금지 전에 끝내야 했기 때문에 빨리 취할 수 있는 술이 선호됩니다.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빨리 취할 수 있는 술은 뭐니뭐니해도 소주로, 1960년대에는 80%에 이를 정도로 국내 주류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막걸리 시장은 위축되면서 그 자리를 소주가 차지해갑니다.

또한 서구식 OB맥주 집 체인이 확산되면서 각종대학 축제, 체육행사에서 맥주는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로 자리 잡고 70년대 문화가 청바지와 통기타로 대변되고 있지만 한 가지 더 꼽으라고 한다고 하면 주류부문에서 단연 생맥주가 꼽힐 만큼 맥주의 소비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1982년 37년간 지속되어 오던 야간통행금지조치 해제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급격히 이루어진 경제성장은 소주보다는 맥주와 양주의 소비량 증가를 가져오고 룸싸롱 문화의 확산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부동산 투기열풍 등으로 갑작스런 졸부들의 대거 등장으로 술의 참맛을 느끼기보다는 룸싸롱에서의 자기과시, 허영 등으로 폭탄주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갑작스러운 룸싸롱 문화의 확산은 접대부 아가씨가 부족하기에 이르렀고 1980년대에는 인신매매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습니다.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 여론을 무마하고 대중의 관심을 다른 곳을 돌리기 위해 3S(스크린, 스포츠, 섹스) 정책을 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로 우리 국민들은 정치에 대한 불만을 3S로 해소하곤 했는데 이와 늘 함께 한 것이 또 술이 아닐까 합니다.

1990년대는 그동안 40세 이상에게만 허용한 해외여행의 자유화와 주류 수입 개방으로 각국의 술을 다양하게 마실 수 있게 됩니다. 특히 1999년 그동안 고유가로 인한 경제살리기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던 룸살롱, 나이트클럽, 캬바레 등 유흥 접객업소의 심야영업 금지가 해제되면서 그야말로 술과 함께하는 밤문화는 최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주류세는 여전히 국세청의 큰 수입원입니다. 술은 아직도 식품의약품안전청도, 농림부도, 보건복지부도 아닌 국세청이 관리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건강을 중시하는 소비풍조가 만연해지면서 정부의 주류 정책도 조금이 바뀌게 돼 1993년에는 알코올 농도가 17% 이상인 술은 TV나 라디오 등 전파매체를 통한 광고 선전을 할 수 없게 되었고 1996년에는 모든 술에는 건강에 대한 경고 문구를 기재하도록 국민건강증진법에 규정하고 있습니다.

소주의 도수가 낮아지면서 일부 업체에서는 16.9도 소주를 시판하며 TV 광고 등도 노린다고 하기도 하지만 이런 이유로 TV에서 맥주 광고는 볼 수 있어도 소주 광고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웰빙 문화가 확산되면서 와인에 대한 소비가 급격히 늘고 한켠에서 서서히 전통주를 재조명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하는데요, 우리가 그저 쉽게 마시는 술 한 잔이 시대에 따라 이리도 많이 좌지우지되며 사회 분위기를 주도했습니다. 우리 앞으로는 어떤 음주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할지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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