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김양희 객원기자가, <겨레하나>가 주최한 북측 협력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5월4일부터 7일까지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지난해 11월달 이후 두 번째다. 평양방문 신청부터 소감을 정리한 김양희 객원기자의 평양방문기를 일기식으로 순차적으로 싣는다. 제목을 편의상 지난해와 구분하기 위해 <김양희 기자의 평양일기 Ⅱ>로 한다. / 편집자 주

동명왕릉

▲동명왕릉의 입구의 모습. 평양에서 가깝게 위치한 동명왕릉은 일대가 울창한 수림지대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평양의 관문이라는 3대헌장탑에는 백여 명은 족히 될 듯한 사람들이 모여 해설 강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이런 장면들은 평양에 있는 동안 익숙할 정도로 김일성 주석의 생일(4월 15일)을 기념해 만든 명절인 태양절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북녘에서는 만경대 생가를 비롯, 북녘의 사적 명승지를 단체로 참관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명왕릉에 도착했다. 평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동명왕릉은 이 일대가 울창한 수림지대로 평양 방향 한쪽만 뚫려 있어 사냥터였다고 한다.

왕릉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우물터가 있는데 이곳에서 길을 잃고 빠진 동물들이라고 추정되는 19마리 동물의 뼈가 나왔을 정도라니 얼마나 울창했을지 짐작이 간다.

왕릉 주변에는 조선 말기에 제주에서 공수해 심었다는 소나무들이 왕릉 안쪽을 향해 인사하듯 자라고 있다. 6.25때 절반이 소실됐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400~600년 수령의 소나무들 1500여 그루 때문에 개미조차도 없다고 한다.

왕릉 입구에는 하마비가 있다. 하마비는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석비로 1413년(태종 13)에 최초로 종묘(宗廟)와 궐문(闕門) 앞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표목(標木)을 세워놓았는데, 이것이 후일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또는 ‘하마비(下馬碑)’라고 새긴 비석을 세우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대개 왕장(王將)이나 성현, 또는 명사ㆍ고관의 출생지나 분묘 앞에 세워져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그들이 선열(先烈)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렸음을 알 수 있다.

북녘의 국가관광총국이 지난 1997년 발간한 조선광광안내 책자에 따르면 동명왕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 동명왕릉 내부에 그려진 고구려 건국벽화 그림.[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동명왕릉은 평양시중심에서 동쪽으로 25km 떨어져있는 력포구역 룡산리에 자리잡고있다. 이 무덤은 5세기초엽에 만든것으로서 고구려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길 때 함께 옮겨온것이다. 동명왕릉은 고주몽(동명왕의 본래이름)의 생일 2,290돐이 되는 주체82(1993)년 5월 14일을 계기로 다시 개건하였다.
220여정보의 부지안에 왕릉구역, 정릉사구역, 신하무덤구역이 있다.
왕릉구역에는 동명왕릉개건비, 중문, 왕의 무덤, 문무관돌조각상들, 제당 등이 있다. 왕의 무덤은 바닥이 4각형인데 큰 돌로 쌓아 기단을 만들고 그 우에 흙을 높이 쌓아올려 봉분을 만든것이다.
기단한변의 길이는 32m이고 무덤전체높이는 11.5m이다. 제당에는 벽화가 그려져있는데 그 9개의 벽면에 22개의 주제를 형상한 벽화들이 있다.
정릉사구역은 회랑으로 둘러친 마당한가운데 있는 8각7돌탑을 중심으로 중문, 보광전, 룡화전, 극락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하무덤구역에는 고주몽에게 충실했던 15기의 신하무덤들이 있다.”


북녘의 평양출판사가 2006년 12월 발간한 화첩 ‘조선의 민속’에 따르면 동명왕릉이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동명왕릉은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의 푸른 소나무숲속에 자리잡고있다.
동명왕릉은 고구려가 427년에 수도를 평양으로 옮겨올 때 이장한 고구려시조 동명성왕의 무덤으로서 우리 나라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동명왕릉은 어버이수령님의 친필이 새겨진 <동명왕릉개건기념비>와 왕릉구역, 정릉사구역, 진주못구역으로 되여있다.
왕릉구역에는 웅장한 왕릉과 여러가지 돌조각상들, 고구려무덤떼와 제당, 릉문이 있다.
정릉사구역에는 고구려의 시조왕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왕릉을 옮겨오면서 함께 지은 정릉사가 자리잡고있다. 정릉사는 고구려의 발전된 건축술과 함께 우리 나라의 력사문화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되고있다.
진주못은 왕릉에서 서쪽으로 소나무숲속을 지나 약 200m가량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진주못 역시 정릉사와 함께 시조왕을 높이 숭상하여 고구려사람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놓은 고구려유적이다.”

동명왕릉 입구의 정릉사

▲ 참관객들이 정릉사 입구에서 해설강사의 안내를 듣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동명왕릉 입구의 정릉사부터 참관을 시작한다. 정릉사는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릉을 옮겨올 때 이 앞에 지어진 절로 1974년 5월부터 11월까지 김일성종합대 역사학부 연구팀이 밭을 2m 파내며 발굴했다고 한다. 발굴 당시 ‘정릉능사’ 등이 적힌 그릇조각들을 보고 이곳이 정릉사임을 알게 됐다고.

5세기 초에 지어진 이 절은 발굴 당시 절터만 남겨져 있었는데 탑을 중심으로 18채의 건물터 등이 발견됐다.

이 절은 8각탑을 중심으로 보광전, 극락전, 용화전 등 고구려의 고유한 1탑 3금당 형식의 건물로서 철저히 터에 근거해 복원을 한 것으로 기와도 고구려 때 유행하던 단청을 본따 구리지붕 그대로다.

▲ 동명왕릉 개건 기념비와 안내원. 비석의 글씨는 김일성 주석이 쓴 것이다.[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동명왕릉은 동명왕의 출생 기념일에 맞춰 지난 1993년 5월 14일 개관했다. 개관을 기념하며 고 김일성 주석은 비문과 글씨를 직접 써 동명왕릉 개건기념비를 세웠다.

역시 고구려의 독특한 일렬로 세운 1주 3문 형식의 문을 지나면 제사를 지내던 전실이 있다. 이곳에는 해모수와 유화부터 시작돼 고구려의 건국, 유리왕의 이야기까지 동명왕의 일생이 벽화로 표현되어 있다.

해설 강사에 따르면 동명왕은 태어나서 한 달 만에 물레 위의 파리도 쓰러뜨릴 정도로 활쏘기에 능해 부여 말로 활쏘기의 명수라는 뜻의 ‘주몽’이라고 이름이 붙었다.

용맹스러운 주몽이 고구려국의 창건을 선포하니 때는 기원전 277년 이라고. 우리 국사 교과서에는 고구려 건국이 기원전 37년인데 이보다 240년이나 빠르다.

▲ 동명왕릉 개건기념비.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고구려 건국 시기는 우리 학계에서도 논란이 되는 것으로 기원전 37년에 건국했다는 것은 김부식의 사대주의 사관에 의한 삼국사기의 주장에 기반한 것으로 이에 반박하며 우리도 고구려 건립 년도를 올려야 한다는 학설들이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이 고구려의 19대 태왕이며 세수로는 주몽의 12세손인데 장수태왕에 의해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문에는 17세손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삼국사기의 기록보다는 5세손이 더해진 것으로 5세손이면 100~200년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라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중국의 사서인 한서지리지에도 기원전 107년 현토군이 설립 당시 이미 고구려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에는 고구려가 언제 생겼는지 나오지는 않지만 이미 기원전 37년 이전부터 고구려가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한다.

해설 강사는 유리왕이 쏜 활에 한 여인의 물동이가 깨졌는데, 아비 없는 아이라 그렇다고 욕을 할까봐 다시 재빨리 진흙을 묻혀 활을 쐈더니 깨진 부분이 막혔다고 맛깔나게 설명을 했다. 특히 우리 일행은 “인기 드라마 주몽을 다시 보는 것 같다”며 익숙한 고구려 건국 신화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이곳은 1993년 대대적인 재단장을 했다고 하는데 최근에도 일부 보수를 하고 재단장을 했는지 벽화와 주변이 화사해졌다.

왕릉 앞에는 개국공신을 형상화한 석상들이 있다. 동쪽에는 오이, 마리, 송양 등의 문관이 서쪽에는 부군노 등 무관이 자리하고 그 옆에는 그들이 타던 말상이 있다. 특히 무관들의 말은 고구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철갑마로 이들을 개마무사라 불렀다고 한다.

왕릉의 벽화와 유물들은 일제에 의해 다 도굴되었는데 무덤길 발굴 당시 일일이 체를 쳐가며 찾아본 결과 연꽃벽화, 왕관장식품 등 흘린 유물만 100여점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곳은 200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돼 왕릉 앞에 그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전주 임마누엘 교회 고민영 목사가 왕릉 주변의 비석들의 내용이 한글로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시대에 따라 말이 달라져 보기 어려운데 번역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일이 번역을 해 놓은 것을 높이 산다”고 말하자 해설 강사는 “김일성 장군님의 교시로 모든 인민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고 설명한다.

▲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평양시민이 동명왕릉 주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왕릉 주변의 소나무 숲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한 여인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을밀대에 가는 길에도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을 만났었는데 조금 경치가 좋은 곳이라면 꼭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만난다. 그만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리라.

한복까지 곱게 입은 여인을 우리 일행이 가만 놔둘 리 없다. 일행은 잠시 방해를 무릅쓰고 사진촬영을 요구했고 그는 흔쾌히 우리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막 내리는가, 영철이 짝사랑’

헉~ 안내원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드디어 영철이를 만났다.

김영철! 평양에서 처음 만난 친구여서 그런지 갈 때마다 안부를 묻곤 했는데 아무 소식을 듣지 못하다가 지난해 그저 ‘선을 보러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북측 민화협에서 제일 잘 생겼다는 이야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는 그의 말대로 그는 키도 크고 훤칠하니 잘 생겨 우리 일행이 ‘배우’ 같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잘 생긴데다 나이도 맞지만 분명 내가 찾는 김영철은 아니었다. 내 아무리 기억력이 떨어지기로서니 ‘심장에 남는 사람’ 영철이의 얼굴을 못알아 볼까?

오늘 인사한 김영철 안내원은 지난 2005년 10월 아리랑 공연으로 남녘에서 대규모 방북이 이뤄져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 시기, 전격 결혼을 해 9달된 아들도 있다고 한다.

구들 농사를 가장 잘 지었다는 그는 “예전에는 아들이 좋다하지만 요즘에는 엄마도 도와주고 하니 딸이 더 좋아 딸을 하나 낳고 싶다”고 했다.

그 역시 나와 동갑인 영철, 또 하나의 김영철이라는 친구가 생긴 것이다.

“제가 아는 사람도 김영철인데.... 지난 2005년 평양에 왔을 때 만난 안내원이 김영철이예요. 그 사람도 민화협에서 일한다고 그랬어요.”
“평양에서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돌을 던지면 영철이가 맞을 정도로 영철이는 흔한 이름입니다. 더군다나 가장 흔한 성씨인 김영철은 더하지요. 우리 민화협 조직에서만 김영철이 6명이나 되고 또 나와 생년월일이 똑같은 영철이도 있지요.”

“아 그럼 내가 찾는 영철이는 그 영철인가 본데, 그 영철이는 장가갔나요?”
“그 영철이는 물론이고 6명 영철이가 모두 장가간 사람들입니다. 60대까지 나이별로 다양합니다.”

헉~ 이로써 영철이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막을 내렸다. 짚신도 짝이 있다고 하지만 통 짝이 안 나타나는 통에 혹시 내 짚신 한 짝은 정말 북녘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보곤 했었다. 그런데 그나마 멋진 친구 한 녀석이 장가를 간 것이다.

작년에 선보러 다닌다더니 바로 장가를 갔나보구나. 하긴 너도 평양에서는 30살 넘은 노총각으로 병신이 될 뻔한 것이구나.ㅋㅋ

그렇지만 영철아, 너 2005년 그날 “일정 끝내고 저녁에 술 한잔 하자”고 한 약속을 잊지는 않았겠지? 급히 다른 곳으로 가야한다며 “약속을 못 지키겠다”고 한마디 남기고 휘리릭 사라졌잖니! 장가는 갔어도 친구는 친구로 그때 못 지킨 약속 꼭 지켜야 한다.

짝사랑은 끝났지만 그래도 평양에는 돌만 던지면 영철이가 맞을 만큼 새로운 영철이들이 많다니 앞으로도 한동안은 영철이 타령을 하며 수많은 영철이들을 사랑해야겠다.

종합검진을 받으러 평양친선병원에 갔던 이들이 민족식당에 왔다.

한상렬 대표는 “종합검진 결과는 이후 통보를 해주기로 했다”며 “세심하게 잘 배려해주었다”고 한다.

의사인 전주 고백교회 박철영 집사는 “시설과 장비 등은 낙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고 전한다.

병원의 표어는 친절의 도를 넘어선 ‘정성’으로 명찰 등에도 정성이라고 붙어 있다고 한다. 평양친선병원장은 “고난의 행군 후 이만한 수준을 갖추기도 힘들었다”고 말해 안타까웠다고.

박철영 집사는 또한 “미약한 시설임에도 불구하고 익수환자를 살려내고, 다발성늑골환자 등을 살려낸 이야기를 들었다”며 “시설과 장비가 미약한 것이 안타까웠지만 그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나중에 나 남쪽에 가게 되면 그 때 맞춰서 결혼하라”

▲ 평양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한 민족식당의 공연모습.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순안공항의 안내원.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따뜻한 공연, 그리고 평양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있었던 민족식당을 뒤로 하고 우린 순안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짐이 많은 내게 로승일 안내원은 “끝까지 챙겨줘야 하는구만”하며 짐 부치는 것을 도와준다. 생각해보니 몸만 작았지 늘 챙겨주던 그는 나이만이 아니라 하는 행동까지 늘 버팀목이 되는 든든한 오빠였다.

“내 오빠 할꺼면 나중에 나 결혼할 때 보러 와야지요.”
“나중에 나 남쪽에 가게 되면 그 때 맞춰서 결혼하라, 날짜 잘 맞춰라.”

맨날 동생이 되라 타령을 하다가 그렇게 로승일 안내원은 나의 오빠가 되었다. 조금은 쑥스럽지만 결혼하게 되면 날짜를 알려줄 가족이 생긴 것이다.

안내원들을 비롯, 우리 일행 중 젊은 남성들은 수십 개의 박스를 나르느라 분주하다. 박스는 북녘 영양빵 공장에서 만든 1만 여개의 빵으로 남녘에서 후원해준 이들에게 고마운 인사를 전하기 위해 며칠을 고생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 대동강 영양빵공장에서 생산된 빵이 남녘으로 가기 위해 차량에 실리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겨레하나 영양빵 사업본부는 “후원인들에게도 제공되지만 사업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직접 빵을 보여주며 홍보할 계획으로 이 빵이 사업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일행은 그동안 고생했던 고마운 안내원들과 사진을 찍는다.

나 역시 일정이 빠듯해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늘 “일없다”며 웃음을 짓던 김광철 운전기사와 로승일 안내원 등과 사진을 찍고 다른 일행들의 사진을 찍어주곤 했다.

그런데 익살꾼 고경훈 안내원과 사진을 찍으려는데 순간 사진기가 작동 되지 않는다. 멋진 폼을 잡고 있던 고 안내원은 “한참 김이 올랐을 때 사진을 찍어야지, 뭐냐 안 찍겠다”고 말하며 가벼려 결국 그와는 찍지를 못했다.

민화협 신대섭 중앙위원은 일일이 일행들과 악수를 하며 배웅을 한다. 신 중앙위원은 내게 “기자 선생이 있어 든든하다, 어디 있으나 우뚝 버틸 것이다”며 “남에 가서 통일을 위한 글 많이 쓰라”고 말한다.

또 다른 내 친구 김영철 안내원에게 “애 잘 키워라” 인사하니 피식 웃던 그는 “북에도 친구가 있음을 알고 통일이 될 때까지 열심히 싸우라”고 전한다.

오빠 로승일 안내원은 “피곤할텐데 가서 병나지 말고 푹 쉬라”고 챙기고는 “내년에 또 오라”고 말한다.

“기자가 통일운동 하면 잘 할꺼야”

▲ 송별인사를 나누는 전국사무금용노조 정용건위원장과 북민화협 신대섭 중앙위원.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그들과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고는 난 그 전에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엔 어찌된 일인지 이제 가면 또 언제 오나 싶은지 엄청 목이 메었다.

남녘에 돌아오는 비행기는 JS615기, 비행기편이 6.15기라는 것이 의미있다고 여기며 비행기표를 찾는데, 헉~ 비행기표가 없어졌다.

곧 비행기표를 보여주고 타러가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울컥했던 눈물이 다 쏙 들어갔다. 집에 못가는 것은 또 상상도 못할 일이었는지...

한참 만에 가방 깊숙이에 잘 모셔둔 비행기표로 간신히 탑승한 나는 자리에 앉자 마음이 편해졌던지 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한상렬 대표는 실무를 담당했던 이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며 내게도 “이번에 김양희 기자 생일 맞아 대박 났어, 앞으로 통일운동 열심히 해야지! 기자가 통일운동 하면 잘 할꺼야”하며 손을 꽉 잡는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그 따뜻한 손에 계속 눈물이 흐른다. 아무래도 며칠 동안은 계속 평양의 열병을 앓을 듯하다.

북녘에는 내 오빠, 내 친구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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