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김양희 객원기자가, <겨레하나>가 주최한 북측 협력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5월4일부터 7일까지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지난해 11월달 이후 두 번째다. 평양방문 신청부터 소감을 정리한 김양희 객원기자의 평양방문기를 일기식으로 순차적으로 싣는다. 제목을 편의상 지난해와 구분하기 위해 <김양희 기자의 평양일기 Ⅱ>로 한다. / 편집자 주

“이제는 분위기가 역전돼 목표달성을 기대할 만하다”

▲묘향산의 풍광이 아름답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아직 묘향산까지는 한 시간여가 남았다. 빠듯한 일정이 피곤한지 다들 곤히 잠에 빠졌다. 그러나 일부 몇몇은 북녘의 시골마을을 조금이라도 더 머리 속에 남기려는지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

전북 겨레하나의 후원회 이사장인 박철영 회장은 현재 일반외과의 대장항문과 의사이다. 후배들이 찾아오면 대장 내시경을 가르치고 1인당 최소 5만원 이상씩 전북겨레하나를 후원토록 하고 있다. 50명이 목표라는 박 회장은 “지난해 북핵문제가 대두됐을 때는 가입률이 낮았으나 이제는 분위기가 역전돼 목표달성을 기대할 만하다”며 웃는다.

부인인 한상희 집사는 처음엔 중학생인 막내딸 걱정에 남편만 평양에 보내려 했는데 막상 와보니 오길 잘했다고.

인천에서는 시와 시민단체 관계자들 여럿이 이곳을 찾았다.

인천시는 그동안 북녘의 문화예술공연 정례화와 개성공단 내 인천산업단지 조성, 인천~남포 간 항로 개설 추진 등 다양한 남북교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05년 5월에는 안상수 시장이 방북, ‘인천-평양 2014년 아시안게임 공동개최 추진’이라는 민족사적 합의를 이뤄내기도 했다.

당시 인천시는 1만톤의 피치 등 40억 원을 그해에 지원하고 향후 5년간 200억원의 남북교류협력기금을 조성, 대북지원에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는데 이를 본 한나라당 김용갑 의원은 당시 안 시장에게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조선노동당에 입당하라”는 논평을 내기도 했다.

이런 선도적인 남북교류 사업을 진행한 인천시도 지난해 10월 핵문제로 교류 사업이 중단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 2.13합의 등으로 남북관계가 좋아지니 다시 시에서 교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부서를 만들고 안면을 트기 위해 방북했다고 시 관계자는 설명한다.

남북의 똑 닮은 두 사람

▲전경수 안내원(왼쪽)과 인천연대의 박길상 사무처장. 닮아 있는 모습이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의 박길상 사무처장은 지난 2005년 량만길 평양시 인민위원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박길상 사무처장은 북녘과 인천시가 결연을 맺고 지원 사업을 성실히 잘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한다.

북녘의 환경, 사람들 등 모든 것이 다 보고 싶어서 왔다는 인천시의회 신영은 의원은 아리랑을 본 소감을 묻자 “우리는 분명 못하겠다고 데모했을 텐데 북녘 사람들은 악천후 속에서 끝까지 공연을 보여 주는 정신이 대단하다”며 “해서 안 되는 일은 없다는 자세를 배워야다”고 말한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재미난 것을 발견했다. 나란히 앉아있는 남녘의 박길상 사무처장과 북녘 전경수 안내원이 아주 똑 닮았다.

41세(북녘은 만으로 나이를 세기 때문에 우리식으로는 42세)의 전경수 안내원은 9살, 6살 두 딸의 자상한 아빠로 휴일인데도 우리의 안내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자 딸들이 보고 싶어 호텔에서 잠깐 짬을 내 아이들에게 전화를 했다 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지갑을 꺼내 아내와 두 딸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그의 아내는 전형적인 북녘의 미인으로 딸들은 인형같이 예뻤다. 현재 소학교 4학년인 그의 첫째 딸은 수재들만 다닌다는 평양1중학교에 가는 것을 목표로 공부중이라고 한다.

그와 똑 닮은 박길상 사무처장은 두 아들의 아빠. 박 사무처장의 아들은 큰아들이 13살,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북녘에서 핵실험을 했다는 TV 뉴스를 보고는 “이제 미국이 북한에 함부로 못하겠구먼”하기도 하고 한미 FTA가 타결이 되자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와 “이제 어떡하면 좋냐, 심각하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한다.

사이좋게 이들은 아이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얼굴이 닮은 것뿐만 아니라 신기하게도 지금 누가 가장 보고 싶냐는 질문에 짜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이 1등이 아이들이고 2등이 부인이라고 답했다.

부인이 이 대답을 들으면 섭할 것 같다하니 그래도 이들은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둘 닮은 모습이 너무 재미나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사진을 찍고 보니 더 닮은 듯하다. 모르는 이에게 사진만 보여주면 누가 남녘인지, 북녘 사람인지 구분은커녕, 친형제라고 해도 믿을 법하다. 남과 북이 모두 같은 조상에게서 퍼진 한민족이라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이처럼 명확한 증거가 또 있을까? 히힛~

묘향산에 이르자 남북교류 사업 진행을 위해 23번이나 방북을 했다는 인천시 관계자는 “햐~ 오랜만이네” 한다. 고향을 잠시 떠나 있다가 다시 찾은 듯한 반가운 말투다.

건물 통째로 유리관에 담아 보관해야할 보물, 국제친선전람관

▲국제친선전람관을 지키는 군인.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국제친선전람관에는 만경대 혁명사적관과 마찬가지로 학생, 군인 등 단체관람객들이 쇄도하고 있었다. 이곳의 관람을 원하는 단체들은 하루 전 예약을 해놓아야 한다. 1년 365일 늘 사람이 많지만 특히 봄여름 가을철에는 사람이 많다고 말한다. (지난해와 2005년 방문 당시에는 추운 겨울에는 잠시 휴관을 한다고 들어 이번 해설 강사가 말한 365일은 매일 문을 연다는 개념보다 문을 여는 기간 동안 늘 사람이 붐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로 생각된다.)

북녘의 국가관광총국이 1997년 출간한 ‘조선관광’ 안내 책자에 따르면 국제친선전람관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국제친선전람관은 1978년 8월 28일에 개관된 조선식 건물이다. 6층으로 된 이 건물의 높이는 43.3m이며 연건평 2만8000여㎡이다.

전람관은 나무를 하나도 쓰지 않고 지은 것이지만 나무로 지은 것처럼 보이며 창문은 하나도 없지만 있는 것 같이 보이는 특색 있는 건물로서 빛과 습도를 자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되어있다.

이 전람관은 본래 본관과 별관으로 되어있는데 본관에는 세계 5대륙의 각국 정당, 국가수반들, 사회계 인사들, 정객들이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 올린 10만여점의 진귀한 선물들이 대륙별로 나라별로 진렬되여 있고 별관에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 올린 선물들이 진렬되여 있다.”

영광의 선물관, 세계의 보물고라고도 하는 이곳은 여전히 사진 촬영 금지구역. 들어가기 전 카메라를 맡기고 건물 보호를 위해 신발 위에 덧신을 신는다.

최근 한 중국인이 평양을 방문해서 쓴 감상문이 한 포털 사이트에서 주목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글에서는 평양이 전력이 부족해 건물을 어두컴컴하게 해놓았다가 관람객이 들어갈 때 불을 켜고 나오면 바로 꺼버린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 본 것이다.

▲국제친선전람관의 모습.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관광책자에 소개된 대로 각각의 방마다 센서가 장착돼 문을 열고 들어 갈 때마다 저절로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나오면 불이 꺼진다. 창문이 없이 돌로 지어진 건물이라 밖은 찌는 듯 더운데도 서늘하다. 온도는 늘 일정하게 유지돼 전시된 선물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지난해 말 현재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들어온 선물은 164개국의 5만5,431점, 고 김일성 주석에게 들어온 것은 179개국의 22만1,411점이라고 한다.

전시된 선물들을 1점 당 1분씩 선물을 관람하면 1년 반이 걸린다고 한다. 200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는 이곳은 방이 하도 많아 꼭 미로에 빠진 것 같다. ‘이상한 나라에 간 앨리스’ 같다고나 할까? 일행은 해설 강사의 설명을 들으며 방들 중 10여개를 관람했다.

해설강사는 국제친선전람관이 보석처럼 귀한 황해도 평산의 대리석과 평안남도 온천의 화강암 바닥으로 만들어져 “세계 각지에서 온 국제친선전람관의 참관객들은 건물을 통째로 유리관에 담아 보관해야할 보물이라고 한다”며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입을 모은다”고 전한다.

‘서거 이후에도 끊임없이 선물이 들어온다’

스탈린이 선물한 유리두께만 8cm나 된다는 방탄차와 전망차(기차), 역도산(우리 이름으로 김신락)이 선물한 벤츠, 모택동이 1953년 11월 전승기념으로 보낸 전망차 등을 관람했다.

이들 방탄차는 김일성 주석이 직접 현지지도를 갈 때 타던 차들로 기차 내에 집무실과 회의실 등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김일성 주석이 철도를 이용해 현지지도와 외국방문을 한 것은 16개 나라 100여 차례에 이른다고 한다.

홍콩의 의아유한공사 이사장 일행은 나무공예작품 ‘사랑의 화신’이라는 작품에서 평양구강종합병원을 표현하며 “이빨 좋지 못해 음식을 잘 씹어 먹지 못하는 인민의 고통을 덜어주자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교시를 적어 놓았다.

나는 세 번째 방문인 만큼 해설 강사의 설명보다는 따로 선물들을 유심히 살펴보기로 했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심장마비로 사망하기 직전에 받은 선물도 있었다. 1994년 6월 14일, 6월 22일 중국에서 온 선물들과 ‘영생’을 기원하며 서거 이후에도 들어온 선물들을 전시한다는 방에는 ‘서거 이후에도 끊임없이 선물이 들어온다’는 그들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2006.4.14 금은공예품, 2006.5.28 도자기 그릇, 2006.8.26 도자기 꽃병 등 지난해에 받은 선물들을 대거 전시했다.

해설 강사는 “올해는 수령님의 탄신 95돌을 맞아 더욱 많은 선물들이 각국에서 보내졌다”고 말한다.

워낙 많은 선물에 잘 몰랐는데 지난해 관심 있게 취재를 했던 남측 인사들의 선물을 보니 없었던 것이 새로 진열되기도 하고 또 새롭게 배치가 되기도 했다.

남녘 대통령의 선물들

남녘 대통령의 선물들도 전시된 선물이 일부 바뀌었다.

지난해 취재를 갔을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은담배함 은재떨이, 은자그릇장식, 은칠보꽃병 등을, 전두환 전 대통령은 청자기 꽃병, 은칠보차그릇일식, 금장식은수저 금장식은세공그릇 일식 등을, 노태우 전 대통령은 금장식주전자세트, 문방구 일식, 옷감 등을 선물했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개 등을 선물했다고 보도를 했었는데, 올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형TV와 수예장식 옷장 등을, 노태우 전 대통령은 화장품, 자수정 목걸이 귀걸이 세트 등을, 전두환 대통령은 양복천, 고려삼, 공예품 등을 위주로 전시를 해놓았다.

또 지난해에는 1998년 12월 26일에 동아일보가 선물한 보천보전투 호외판 금인쇄 원판만 눈에 띄었었는데 1998년 9월 15일에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과 호암미술관 홍라희 관장이 선물한 고급 손목시계도 눈에 띄었다.

인천시 대표단이 지난 2005년 5월 선물한 강화 화문석도 전시되었고 금강산관광을 진행하고 있는 현대 아산 현정은 회장은 지난해 북녘의 당창건 기념일인 10월 10일에 동공예 ‘옥류동’을 선물하기도 했다.

대통령의 선물들과 에이스침대의 333종 가구세트 선물 등 눈에 띄는 것 외에는 대부분 2005~2006년 5~7월 위주의 것들이 많았다. 또한 선물들 중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이 들어간 선물들이 주로 많았다. 해설 강사는 “받은 선물이 너무 많아 그것들을 모두 다 전시관 건물 안에 놓자면 건물이 터질 지경이다”며 “몇 달에 한 번씩 청소를 하면서 선물들을 재배치한다”고 설명한다.

일부에서 국제친선전람관이 선물 한 두 개 받은 것으로 선전을 해댄다고 하는데 반공을 국시로 한 우리 남녘 대통령들의 선물도 바꿔가며 전시를 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선물의 양이 워낙 방대해 두 동의 건물로는 모자라 새로 또 건물을 지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일행은 잠깐 국제친선전람관 맨 위층에 나와 앉아 사진을 찍고 묘향산의 경치를 감상하기로 했다. 해설 강사에게 이것저것 묻느라 정신이 팔렸던 나는 막상 카메라를 찾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와 버렸다. 헐~기자가 카메라를 두고 오다니...

로승일 안내원 “작아도 매섭습니다”

▲ 박숙이 수협중앙회 부위원장(왼쪽), 로승일 안내원(가운데)과 기념촬영.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부리나케 카메라를 찾으러 가는 길에 로승일 안내원이 함께 가준다.

평양의학대학을 졸업한 로승일 안내원은 며칠 전에 민화협(민족화해협의회)에 배치돼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잘 모르겠다”로만 일관해 내가 남녘손님이라고 놀리던 터였다.

이에 맞서 로 안내원은 내가 취재를 한다고 돌아다니다가 늦게야 차에 오르곤 하면 “기자가 날래야지 맨날 늦는다”고 맞받아치곤 했다.

4살 난 딸이 있는 그에게 일요일에도 나와서 일하고 힘들지 않냐하니 “일 많으면 좋지!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리랑 관람도 2005년에 한 번 했다하고 묘향산도 온 것이 손에 꼽히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그는 공연도 열심히 보고 해설 강사의 이야기도 꼼꼼히 들었다.

아리랑 공연을 보고 와서는 그는 “나도 학생 때 집단체조를 했었는데 힘들기보다 보람됐다”며 “체력 튼튼해지도록 집단체조를 한다”고 말했다.

“체구가 작은 것을 보니 힘이 없어 보인다”며 “집단체조를 덜한 것 아니냐?”는 내게 “작아도 매섭습니다” 한다.

나보다 별로 크지도 않고 워낙 동안이어서 37세인 오빠임에도 불구하고 동생 같아 로승일 안내원에게 “그냥 내가 누나하면 안돼요?” 하면 (정말 황당하다는 표정 지으며) “아니 삼강오륜도 모르고 기본 윤리도 모르나? 오빠면 오빠지 어떻게 동생을 하라고 그러나?” 했다.

그 표정이 재밌어 계속 “그래도 동생해주세요” 하곤 했다.

함께 온 안내원들의 이름조차 몰라 사실 기사를 쓰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늘 세심히 챙겨주려고 한 그 덕분에 취재를 편히 할 수 있었다.

그런 그 로승일 안내원은 또 “기자가 칠칠맞게 카메라를 놓고 오면 어떡하나? 군인이 총도 없이 전쟁 나가나? 꼭 이렇게 내가 챙겨줘야 하나?” 한다.

나도 지지 않고 “에이 함께 온 안내원들 이름도 잘 모르잖아요, 그리고 그냥 제 동생하시죠?” 했지만 로 안내원의 자상함이 오빠처럼 따뜻했다.

익살꾼 고경훈 안내원

▲ 고경훈 안내원은 우리 일행에게 늘 즐거움을 안겨주는 익살꾼이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객원기자]
카메라를 찾아오던 중 고경훈 안내원을 만났다.

자식 자랑을 하면 팔불출이라지만 여섯 살 난 딸이 너무 똑똑해 걱정일 정도라고 하는 그는 아이가 3살 때 조선말을 떼고 6살에 구구단 만 자리를 셈할 수 있다고 자랑하던 안내원이었다.

“아! 변소 수발 힘들구만.”
어제 날씨가 좋지 않은데 옥류관에서 먹은 냉면에 탈이 난 사람이 있어 벌써 몇 번째 그들과 화장실을 다녀와야 했던 것이다.

고경훈 안내원의 장난 어린 농담에 우린 얼마나 또 웃었는지, 그는 내 생일을 맞아 “왜 태어났니~ 맥주 축내려 태어났지” 노래를 불러주면서 익살을 떤 안내원으로 우리 일행에게 늘 즐거움을 주었다.

국제친선전람관은 그저 유리관 안에 진열된 선물만이 보석이 아니라 그 안에 로승일 안내원의 마음, 고경훈 안내원의 익살 등 사람들의 따뜻함이 더해져 건물 전체를 통째로 유리관에 보관해야 할 만큼 대단한 보물인 듯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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