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7년 만에 철의 혈맥을 잇는 철마가 기적소리를 울리며 반도의 동서에서 남북을 가로질러 금단의 선을 넘어섰다.

언론의 집중적 조명을 받으며 역사적인 열차 시험운행에 탑승한 인사들은 군사분계선(MDL)을 넘어설 즈음 누구랄 것도 없이 어느덧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기도 했다.

특히 민주화 과정에서 옥고를 치르면서도 한반도의 자주와 평화를 염원했던 리영희 선생이나 ‘평양 가는 기차표를 다오’라고 부르짖었던 고 늦봄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의 심경이야 오죽했으랴.

북측 권호웅 단장은 자남산여관 오찬장에서 리영희 선생 자리로 가서 백로술을 따라주며 "리 교수 같은 지조 있는 분이 늙지 않아야 하는데 남측 잡지에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한 것을 봤다. 붓을 놓으면 안 된다"고 각별한 관심과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고 공동취재단이 전해왔다. 어찌 이 분들에 대한 마음이 남북이 다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평소 남북화해정책의 소신을 가진 영화배우 명계남 씨는 친 노무현계로 분류되어 왜 탑승객 명단에 포함되었냐는 보수언론의 거친 공격을 받았고, 이에 비해 평소 대북 화해정책에 극구 반대해 대북 강경정책을 주문해왔던 김문수 경기지사가 탑승객에 포함되지 못한 것을 보수언론들이 적극 부각시키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난 15일 한국진보연대(준)가 재야원로들을 위해 준비한 ‘민족민중 스승의 날’ 행사장에서는 열차시험운행이 단연 화제로 떠올랐지만 평생을 통일을 위해 헌신해온 ‘현역 재야 통일원로’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역사적인 시험운행에 초대받지 못했다. 그나마 6.15남측위원회 백낙청 상임대표 만이 유일하게 민간통일운동진영을 대표해 초대받은 것을 위안삼을 따름이다.

스승의 날 행사를 준비한 한 실무자는 “너무 화가 난다”고 푸념했지만 본디 재야(在野)가 달리 재야일 것인가. 다만 참여정부가 국민들의 광범위한 염원을 안고 출범했고 대통령 탄핵 위기 때도 재야가 앞장서서 현 정권을 옹호해왔던지라 서운함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소란스런 언론에서도 제대로 다루지 않고 가려진 그늘,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당초 통일부는 열차가 군사분계선(MDL)을 통과하는 장면을 찍고 싶어하는 언론사들의 ‘당연한’ 요청을 받아들여 10여명으로 ‘MDL 풀(공동취재단)’을 짰고, 국방부 측에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결과는 유엔군통합사령부(유엔사), 더 정확하게는 군사정전위원회 측의 거부로 경의선의 경우 도라산역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제2통문까지, 동해선의 경우 금강통문까지만 취재가 허용됐다.

한마디로 사실상 미군이 주도하는 유엔사의 ‘불승인’으로 인해 열차가 군사분계선을 통과하는 역사적인 장면은 단 한 명의 기자도 가까이서 취재할 수 없었다. 이것이 오늘의 냉엄한 현실이다.

언론에서는 경의선과 동해선 도로.철도에 관한 일상업무는 유엔사가 남측에 권한을 위임했다고 떠들어대지만 유엔사는 엄연히 '관할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시위한 셈이다.

이같은 냉엄한 현실을 더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열차 시험운행이 진행되고 있던 17일,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는 ‘표현의 자유 가로막는 국가보안법 남용 실태 보고회’를 개최했다.

사진작가이자 평화운동가인 이시우 통일뉴스 전문기자의 구속 사례와 인터넷 서점 ‘미르북’ 김명수 대표 연행 사례가 발표됐고, 열차시험운행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그 순간에도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음이 성토됐다. 그러나 열차 시험운행에 ‘올인’한 언론들은 일부 인터넷신문을 제외하고는 이 행사를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특히 이시우 작가는 누구보다 분단의 문제와 유엔사의 문제를 정면으로 껴안고 고민한 평화활동가로 땅길은 물론 뱃길, 하늘길을 유엔사를 거치지 않고 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왔다.

그가 제안해 실행에 옮겨진 ‘한강하구 평화의 배 띄우기’는 대표적인 평화단체들의 연례행사가 되었고 그는 다시 서해상 열기구 띄우기, 개성-강화간 한강하구대교 건설을 구상하기도 했다.

분단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열차가 요란한 조명을 받으며 시험운행을 하고 있을 때 유엔사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해온 이시우 작가는 국가보안법의 사슬에 묶인 채 감옥에서 생명을 건 단식을 29일째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지적했던 대로 이날 행사에서도 어김없이 유엔사는 남측 기자들의 군사분계선 접근을 단 한 명도 ‘허용’하지 않았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들뜬 표정으로 “위대한 승리의 역사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한다”고 분위기를 띄우자 북측 권호웅 단장이 “아직까지 위대하다는 말을 붙이지 마시라”고 가라앉혔다는 공동취재단의 전언이 왠지 기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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