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사 김양희 객원기자가, <겨레하나>가 주최한 북측 지원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11일부터 14일까지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한다. <겨레하나>는 북측과 협력해 평양에 빵공장과 국수공장 등을 만들어 지원을 해 왔는데 이번에 이를 둘러보는 것이다. 평양방문 신청부터 소감을 정리한 김양희 객원기자의 평양방문기를 일기식으로 순차적으로 싣는다. / 편집자 주
2006. 11. 13
“모든 진료는 무상이기 때문에 쌍커풀 수술도 무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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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창문을 활짝 여니 가슴 속 깊이까지 시원한 바람이 들어온다. 조금은 흐린 날씨였지만 양각도 호텔에서 내려다보는 평양시내 전경을 사진 한 장 찍고 산책을 하러 나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산책은 안 되었다. 지난해에는 호텔 아래로 내려가 대동강에 손도 담가 보았는데 아쉽기 그지없다.
나는 어제 한농연 분들과 함께 술을 한 잔 했다. 한농연 순천시 연합회 정임수 사무국장은 제주도 한 번 가지 않고 첫 비행기 여행을 평양으로 왔다고 했다. 평양 방문 소감을 묻자 “이곳은 진정한 유기농업을 실현하는 곳”이라고 답한다. 어제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향하며 주변의 너른 벌판을 보고 받은 느낌이리라.
유기농업, 유기농업 하지만 사실 유기농업은 3년 이상 땅에 농약을 하지 않아야 한다지만 양질의 거름을 줘가며 비료를 쓰지 않고 3년이 지나도 땅에 남아있는 농약성분 때문에 최소한 5년 이상은 농약을 치지 않아야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농약을 치지 않으면 상품을 거의 수확하지 못해 어렵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친환경 농법 그대로를 실현하고 있는 평양, 그러나 “비옥한 평야가 생각보다 훨씬 넓고 경지정리가 잘돼 있어 농업 기술력만 제대로 보급된다면 식량난이 해결될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며 “북녘의 땅에 남녘 농민들의 기술력으로 남과 북이 서로 도움을 주고 잘 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아울러 아직 미혼인 그는 “북측 여성들과 남측의 농민들이 결혼 교류를 했으면 좋겠다”며 “결혼을 하면 신혼여행으로 가려고 아직 제주도도 가지 않은 것이다”고 밝힌다.
술을 마시던 중 겨레하나 신수경 사무처장은 의사선생님이 방마다 찾아가 진료를 해주니 아프면 신청을 하라했다. 무리한 일정에 몸이 상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마음에 북측에서 어르신들을 위해 의사의 진료를 먼저 제안했다 한다.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북측의 뭐 대단하다고 사진까지 찍냐는 반응과 피곤함도 불구하고 늦은 시간까지 진료를 보신 북측 의사선생님들의 진료에 방해가 될까봐 그만두었다.
함께 술을 마신 이들은 나보고 “쌍커풀 수술을 하라”고 한다. 마침 그 전에 봉사원 동무에게 “이제는 북측 여성들도 쌍커풀 수술을 많이 한다고 들었다”고 말을 거니 “눈이 너무 작은 사람들은 수술을 하기도 하지만 많은 수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모든 진료는 무상이기 때문에 쌍커풀 수술도 무료입니다. 그치만 그냥 난대로 사는 게 더 이쁘지 않습니까?” 했기 때문이다.
헐~태어난 대로 사는 게 더 좋고 얼굴보다 마음이 더 예뻐야 한다는 것은 교과서에서나 있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은, 닳고 닳아빠진 나는 뒷말은 전혀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쌍커풀 수술 무료라는 말이 나의 귀를 콱~ 막아버린 것이다.
이번 참관 일정 중에 쌍커풀 수술을 하고 ‘통일 쌍커풀’ 쯤으로 이름을 붙이고 부은 눈으로 ‘6.15 공동선언이 절망에 빠진 제 눈을 구해줬어요’라며 기자회견이라도 하라고 사람들은 익살을 떨었다.
갑자기 우리 기사가 어떻게 실렸는지 궁금했다. 호텔 로비에 가 “어제와 오늘자 로동신문 좀 볼 수 있을까요?” 물었더니 “오늘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며 어제 신문 한 장을 꺼내준다.
나왔다. 우리의 기사가 4면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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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자신은 어디에 서 있었는지를 확인하며 이왕이면 북측 언론에 최초 공개되는 얼굴인 만큼 잘 나왔는지 확인한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안산본부 노세극 공동대표는 사진을 찍을 때 다른 사람들의 짐을 맡아주느라 공항에서 나오지 못해 사진을 찍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러자 누군가 “예전 같으면 로동신문에 실리면 바로 국정원에 불려가 조사받고 감옥 가고 그랬을 것이다”고 한다. 그러니 6.15공동선언이 만들어낸 기적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만경대 고향집 참관,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되나?’
오늘의 첫 일정은 만경대 고향집 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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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만경대가 있는 곳에는 돌탁자와 의자 등을 새로 놓았고 만경대에 오르는 중간 우물이 있는 곳에도 유리 선반과 컵을 비치해 놓는 등 세심하게 신경을 쓴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김일성 주석이 14살 때 집을 나가 나라가 독립이 되기 전엔 돌아오지 않겠다며 떠났다가 30살이 돼 돌아왔다는 생가는 물론 만경대 혁명 사적관에는 각종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일대기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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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도 지난 2002년 5월 방북 때 만경대를 찾은 바 있는데도 당시 박근혜 전 대표의 만경대 방문에 대해 전혀 문제 삼지 않던 언론과 한나라당이 민주노동당에만 잣대를 대가며 문제를 삼은 것이다.
흠~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평양에 안 가봤나? 평양에 가면 기본코스로 가는 곳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만경대이다. 오히려 평양에 갔는데 만경대를 가지 않았다면 대체 어딜 다닌 것인지 그게 뉴스 꺼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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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엔 민주노동당보다 6.15공동선언 이전, 당시 북을 적국으로 규정해 우리에게 반공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던 역대 대통령들과 동아일보사의 적국 수장에게 바친 선물 공세가 더 문제시 되지 않나 싶은데 말이다. 서울 안 가본 놈이랑 가본 놈이 싸우면 안 가본 놈이 이긴다더니만 딱 그 짝이지 않은가?
한나라당 관계자 여러분, 분명 국제친선전람관에 선물이 쌓여 있는데 왜 그것에 대해선 조용히 있는 것입니까?
또한 박근혜 대표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있는 방북기에도 만경대를 참관했다고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되자 실수로 방북기를 잘못 썼다고 했단다.
나는 기자생활 수년을 했지만 전날 만신창이가 되도록 술을 먹었어도 표현에 실수는 가끔 있어도 가지 않은 곳을 갔다고 잘못 쓴 적은 없다. 그렇게 착각을 해 쓸 수도 있는지, 설혹 그렇다면 그렇게 정신이 없어서 어찌 할까 측은해지기까지 한다.
주체사상탑 전망대에서 본 김일성광장에서의 아리랑 공연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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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저곳에 모여 있는 것일까? 곁에 앉은 김종수 안내원에게 “뭘 하기에 저기 저렇게 모여있는 거지요?” 물었다.
그러자 김종수 안내원 “뭐를 하고 있갔지요.”
엥? 대체 뭐가 뭔데 뭐를 한다는 것인지...
김종수 안내원은 “서울 가서 물어보면 김양희 선생은 모두 다 알갔습네까? 나도 여기 살지만 다 아는 건 아니라구” 한다. 그의 표정에서 정말 모르겠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남쪽에서 온 기자라고 신경을 많이 써 줬는데 이것저것 모르는 것들까지 물어보니 힘들었나 보다. 잠시, 한 5초쯤 미안했다.
평양의 개선문과 함께 김일성 주석의 7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세워진 주체사상탑은 조선식 석탑 건축양식을 살려 백색 천연화강석으로 쌓아올린 석탑으로 150m 높이의 탑 위에 20m 높이의 봉화가 놓여있어 총 170m의 위용을 자랑, 세계적으로 알려진 석탑 가운데서 가장 높은 탑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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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서 김일성 주석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 주체사상의 기초입니다”라고 말한다. 관광 책자에는 “자주시대를 대표하는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을 창시하고 그 전면적 승리를 이룩한 김일성의 불명의 업적을 만대에 길이 칭송하기 위하여 세운 대기념비적 건축물”이란다.
꼭대기까지 고속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어 전망대에 올라가면 평양시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탑 뒤 엘리베이터가 있는 안쪽으로 들어가는 곳 입구에는 80여개 나라 국가수반들과 정계, 사회계 인사들, 학술연구조직들, 친선단체들에서 보내온 여러 나라에서 축하메시지를 적은 대리석, 옥돌 등 고급석재들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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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좌우에 있는 화강석 부주제군상들은 주체공업, 만풍년, 배움의 나라, 무병장수, 주체의 예술, 철벽의 요새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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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사상탑 근처에는 3개의 형상화한 동상도 있다. 원래는 주체사상탑만 준공할 생각이었으나 평양 시민들을 위해 공원으로 조성됐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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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일행 중 누군가 “아이들 지금 도시락 먹고 있다”고 하니 재잘재잘 웃고 떠들며 밥을 먹는 것 같이 느껴진다.
탑 주변으로 3인군상, 부주제군상들, 정각, 대형분수가 있다. 기단 정면에는 헌시비가 있고 그 앞에는 조선로동당 마크를 든 노동자, 농민, 지식인을 형상한 3인군상이 있다.
‘용기 있게 영철이의 안부를 묻다’
개선문으로 향하던 중 난 김종수 안내원에게 용기를 내어 준비해간 사진을 보여주며 영철이의 안부를 물었다. 나와 동갑인 영철이는 지난해 아리랑 참관단으로 방북 당시 내가 속한 조의 안내원으로 그의 서글서글한 외모와 매력에 반한 나는 평양에 다녀와서 '심장에 남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쓴 바 있다.한양에서 김 서방 찾기라는 말대로 평양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한 번 본 김영철을 또 만날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름 기대를 하고 있었던 터였다.
김종수 안내원은 사진을 보고 픽 웃으며 “결혼하려고 하는 것 같던데...” 한다.
허걱~ 평양으로 떠나기 전 후배 놈들이 “영철 안내원 장가갔으면 어쩌려고 그래?” 하며 놀리던 것들이 영화 필름 지나가듯 파바박 흐른다.
김종수 안내원에 따르면 지난해에는 아리랑 참관으로 짧은 기간 동안 남쪽 손님이 너무 많이 다녀가 민화협의 다른 부서 사람들까지 동원이 돼 남쪽 손님을 맞은 것이라 한다. 영철이도, 계원삼 아저씨도 원래 남측 손님을 맞는 부서는 아니라는 것.
때문에 김종수 안내원과는 다른 부서 사람이라 서로 친하게 잘 알지는 못하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직 결혼할 여성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노총각이라(북녘에서는 30살이 넘으면 노총각이라 한단다) 결혼을 하려고 요즘 부쩍 선을 많이 본단다.
‘아니, 너 통일뉴스 기사도 안 봤니? 너무 하는 거 아냐?’
나는 혹시라도 영철이나 원삼 아저씨를 만날 수 있을까 싶어 추운 겨울, 조금은 따뜻하게 나길 바라는 마음에 분홍색 무릎담요와 손난로를 선물로 준비했다.
그런데 갑자기 춥던지 말던지 관심이 확 사라지며 우울해졌다. 그래도 준비한 선물이니만큼 김종수 안내원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영철이 녀석, 장가가면 나의 분홍담요가 분노의 불화살이 되리라’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다.
나 못 기다려 간다면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
분홍담요 진달래 꽃 삼아 가는 걸음걸음 깔아주겠다.
민족식당 앞에서 본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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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문의 높이는 60m, 정면너비 52.5m, 아치문 높이 27m, 너비 18m. 파리의 개선문보다 조금 크게 지었다고 한다. 개선문에는 김일성 주석이 조국광복을 위해 길을 나선 해인 1925와 해방 후 돌아온 1945라는 글자와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새겨져 있다.
사실 안내원의 설명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민족식당의 산해진미도 그리 당기지 않았다. 민족식당에서는 인천 겨레하나 박 이사님의 생일잔치가 벌어지고 왁자지껄 모두들 들뜬 분위기였으나 나는 점심을 대충 먹고 식당 밖으로 나와 사진을 찍고 있을 때였다.
민족식당앞 거리에는 평양 시민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는데, 그 중 6살이나 됐을까? 아이 셋이 내 뒤에 조르륵 서더니 “이야~ 사진 찍는다야~” 한다.
얼마나 귀엽고 예쁘던지... 연년생인 동생이 있고 맞벌이를 하시는 덕에 무주구천동 산골에서 자란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부모님의 맞벌이가 아니었다면 도시에서 자랐을지 모른다. 나는 시골에서 산이며 들로 뛰어다니고 여름이면 팬티하나 입고 개울에서 깜깜해질 때까지 수영을 하며 물고기와 고둥 잡고 겨울이면 얼굴이 터질 때까지 썰매 타고 고구마 구워먹었다. 남자 동무들과 참새를 잡으러 온 종일 쏘다니고 몇 마리 잡기라도 하면 고소하게 구워 먹었던 기억. 이런 행복한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데 내게 특별한 유년기를 갖게 해준 부모님, 그리고 나의 연년생 동생에게 참 고맙게 생각한다) 아이들을 일일이 안아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실례가 될지 몰라 아이들을 안아주지도 사진을 찍어주지도 못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들 덕에 나는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