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희 객원기자 (tongil@tongilnews.com)

본사 김양희 객원기자가, <겨레하나>가 주최한 북측 지원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11일부터 14일까지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한다. <겨레하나>는 북측과 협력해 평양에 빵공장과 국수공장 등을 만들어 지원을 해 왔는데 이번에 이를 둘러보는 것이다. 평양방문 신청부터 소감을 정리한 김양희 객원기자의 평양방문기를 일기식으로 순차적으로 싣는다. / 편집자 주


향산호텔에서


▶향산호텔 전경.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일행은 점심을 먹기 위해 향산호텔로 향했다.

향산호텔은 특급호텔로 1986년 개장했다. Y자형 3각탑 형식으로 지어진 건물로 묘향산 지형과 어울리는 계획된 향산호텔은 15층이며 1등실이 18개, 2등실이 28개, 3등실이 182개 등 총 228개의 객실을 자랑한다. 최상층에 있는 회전식 레스토랑에서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조금 늦은 나는 다른 조 안내원들과 함께 자리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3개조로 나뉘어져 조별로 정해진 북측 안내원들과 일정을 함께한다. 혹자는 안내원이 감시하려고 따라다니는 것인지 궁금해 할 수도 있겠지만 20여명이나 되는 인원을 단 3명이서 감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특히 우리는 ‘참새 줄세우기’보다 어려운 남측 사람들 아닌가. 이에 대해 김두현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사무처장은 “우리는 늘 억압을 받고 살던 민중들로 말을 안 들으며 민주화를 이뤄냈다”며 “늘 말을 안 듣는 게 더 나아 그런 것”이라 말해 웃기도 했다.

만약 우리를 감시하기 위함이라면 좀 더 많은 인원을 투입했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나마 3명의 인원도 늘 우리와 빠듯한 일정을 함께하는지라 차로 이동하는 중간 중간 졸기도 해, 오히려 나의 감시망에 포착돼 자는 모습을 파파라치에게 당하는 피해자처럼 찍히곤 했다.

너무 많은 인원이 함께 몰려다닐 경우 설명을 듣기 어려운데 조별로 나눠 이동을 하다 보니 집중도 더 되고 기동성이 있다. 예를 들면 1조가 보현사에서 유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2조는 팔만대장경 서고에서 설명을 듣고 3조는 또 다른 곳을 참관하는데 이는 톱니바퀴가 굴러가듯 꼭 맞게 유기적으로 이뤄진다. 그러다보니 모든 일정을 함께 하지만 다른 조 안내원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는 사실 상 좀 어려운 편이다.

학창시절 교생선생님이 오시면 우리는 모든 교생선생님을 다 좋아하지만 그래도 우리 반을 맡은 교생선생님이랑 친해지지 다른 반을 맡은 교생선생님하고는 친해지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이동중 단잠에 취한 민화협 부원.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밥도 밥이지만 기회는 이때다 하고 다른 조 안내원과 이야기를 나눠봤다. 여기서도 단연 첫 관심사는 북의 핵실험에 관한 이야기다.

“북핵 실험으로 국제적으로 더 고립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핵실험은 조미(북미)간의 대결에서 나온 것이지 결코 남을 겨냥한 것이 아닙네다. 남을 겨냥하는 거라면 뭐 핵무기까지 필요하갔습네까? 전쟁은 남조선의 조중동 언론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네다. 우리 민족은 또한 핵보다 더 무서운 대동단결이 있어 앞으로 100년을 더 경제제재를 한다 해도 이겨나갈 수 있습네다.”

대단한 자긍심이었다. 그리고는 “기자로 알고 있는데 제발 남쪽으로 가서 보고 느낀 대로만 사실보도 해주시라요” 한다.

향산호텔에서의 점심식탁엔 군고구마와 군밤이 올라와 있다. 특히 묘향산에서 채취했다는 군밤은 도토리보다 조금 클 정도로 아주 작은데 고소하고 단맛이 강한 게 아주 맛있다.

내가 맛있게 먹는 것을 지켜본 안내원은 봉사원동무에게 “출출할 때 드실 수 있도록 좀 싸주라”고 한다. 헐~워낙 평양의 담백한 음식들이 맛있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내가 그리 배고파 보였나?ㅋㅋ

그런데 아주 한 다발이다.
“어머 뭘 이렇게 많이 싸주셨어요? 조금만 주셔도 괜찮은데...”
“아닙니다. 남측 손님들에게 좀 더 많은 것 드리고 싶은데 외려 부끄럽습니다. 통일되는 날까지 열심히 사십쇼.”

가슴 한 구석이 짠해왔다. 평양에 와서 계속되는 환대가 오히려 부담스러울 정도지만 향산호텔에서의 고구마와 밤은 기꺼이 고맙게 받았다. 사실 난 향산호텔에서 또 하나의 수줍은 배려를 받은 기억이 있다.

▶향산호텔 내부 분수대를 배경으로 한장.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향산호텔은 외부에서 봐도 피라미드 형식으로 지어진 아주 멋진 건물이지만 로비에는 사슴이 샘에서 물을 먹는 듯한 모습을 형상화한 예쁜 분수가 하나 있다. 지난해 아리랑참관단으로 평양을 방문한 나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또 신기해 연신 사진을 찍고 또 찍어댔다. 향산호텔의 그 분수에서도 예외는 아니라 함께 간 선배언니와 나는 분수의 사슴을 배경으로 한 장 찍을 요량으로 포즈를 취했다.

그런데 그때 호텔 관리자가 분수의 물을 틀어주는 거다. 당시 향산호텔의 전력 사정은 평양보다도 훨씬 나빠서 호텔 복도에도 전등을 켜지 않을 정도였으며, 한참 씻고 있는데 따뜻한 물이 갑자기 안 나온 적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상황에서 분수를 틀어주니(사실 분수를 틀기 전엔 그게 분수인지도 모르고 그저 사슴과 옹달샘을 꾸며놓은 것인 줄 알았다) 어찌나 고마우면서도 참 미안하던지... 어쨌거나 그 분수는 우리가 사진을 찍은 직 후에도 한 시간여 동안 틀어져 많은 사람들이 예쁜 분수 그 자리에서 사진을 찍었었다.

이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꼭 다시 향산호텔을 찾아 남편과 아이에게 분수 이야기도 들려주고 또 식당에 들러 음식을 먹어야지. 그땐 내가 직접 군고구마와 군밤을 한 아름 준비해 호텔 직원들이랑 묘향산 관광객들이랑 오순도순 둘러앉아 한바탕 나눠먹어야겠다.

푸에블로호 참관 위해 서둘러 평양으로

▶못생겨도 민화협 부원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계원삼 아저씨.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다음 일정은 푸에블로호 참관으로 우린 서둘러 다시 평양으로 향했다.

가는 길, 우리 조는 약간의 여흥 시간을 마련했다. 조원들은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는데 다들 어찌나 잘하는지... 또 노래를 혹시 못해도 그저 평범히 못하는 노래가 아니라 특별히 평양에서 못한 노래다. 평양에서 못한 노래, 상상을 해보시라.ㅋㅋ

북측 안내원에게도 차례가 돌아갔다. 안내원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며 ‘동지의 노래’를 한 곡조 멋들어지게 뽑아낸다. 우리조 안내원은 생긴 것도 잘생겼는데 노래는 또 얼마나 잘하는지...

“북의 민족화해협의회는 남측 사람들을 많이 만나니까 외모도 보고 뽑나 봐요. 모두 잘 생기셨어요.”

우리조 안내원은 워낙에 키도 크고 잘생겨 다른 조 사람들은 처음에 남측에서 함께 온 일행이라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다들 잘 생긴데다가 키도 훤칠해 일부러 고르지 않고서는 그리 다 잘 생길 리가 없고 특히 남측 사람들과 자주 교류를 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궁금하던 터였다.

그런데... 예상외의 허를 찌르는 대답이 나왔다.
“계원삼 씨도 있잖습니까?”

맞다. 우리의 원삼 아저씨는 작고 못생겼지만 아저씨도 당당히 북측 민화협 관계자로 남녘에 3번이나 오셨다. 잘 생기고 훤칠한 사람만 뽑는다면 아저씬 남녘에 올 수 없는 게 아닌가? 아저씨는 북녘이 외모 우선순위의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직접 온몸으로 보여주시고 계신 거다. 푸하하하~~

▶제네럴셔먼호 격침비.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평양의 평천구역 해운동에 위치한 푸에블로호를 찾았다. 가장 먼저 우릴 반긴 건 셔먼호 격침비.

김일성 주석의 증조할아버지가 1866년 8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불법 침입한 셔먼호를 침몰시키는 데 앞장섰다고 안내원은 말한다.

셔먼호는 1866년 7월초 대동강 하구에 도착해 통상을 빌미로 관군을 감금. 납치하고 주민을 상대로 약탈과 살육을 벌였지만 관찰사 박규수의 반격으로 배는 불에 타고 승무원 23명 전원은 몰살하고 말았다.

북녘은 1986년 9월2일 대동강변에 셔먼호 격침비를 세웠으며 그 바로 옆에 1968년 1월에 나포한 미국의 첩보선 푸에블로호를 정박시켜 대미항전의 전리품으로 전시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지난 2004년 나포한 무인정찰잠수정까지 전시해 반미교육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북은 나포한 미 정탐선 '푸에블로호'를 대동강변에 정착해 두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푸에블로호는 53.8m 길이에 9.8m 너비, 1000톤에 달하는 정탐선으로 태평양 일대를 누비며 북을 정탐했다. 당시 미국에는 푸에블로호 같은 정탐선(북은 간첩선이라 불렀다)이 3척이 있었는데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외국군에게 나포돼 돌려받지 못하는 배는 푸에블로호 하나뿐이라고 한다. 지난해 미 상원에서 푸에블로호 반환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상정되는 등 최근 푸에블로호의 환수를 위해 미국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대단한 배로 이런 역사적인 곳에 내가 와 있다는 것 자체가 흥분되었다.

당시 28세로 결사대의 조장을 맡았던 박인호 ‘공화국 영웅’은 우리 일행에게 당시 상황을 박진감 넘치게 설명해 참가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갑자기 우리 남자들 18:1로 싸웠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허무맹랑한 뻥으로 받아들이는데 그보다 더한 83:2로 싸워 이긴 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싶다. 역시 북녘은 늘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박인호 ‘공화국 영웅’의 푸에블로호 나포 이야기

▶박인호 공화국 영웅으로부터 푸에블로호 나포 경위를 들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박인호 ‘공화국 영웅’에 따르면...

푸에블로호를 나포하던 1968년 1월 23일은 안개가 자욱이 낀 날이었다. 정오를 한 시간 여 남긴 그 시간에 안개가 서서히 풀리면서 영해를 침범한 수상한 배를 하나 발견했다고 한다. 배에는 민간해안연구선이란 뜻의 GER이라고 쓰여 있지만 국적 표시물이 전혀 없었다.

그는 바로 김일성 주석(그는 이 부분에서 ‘위대한 수령님’이라고 표현했다)에게 보고를 했고 김 주석은 “위협을 해봐서 정말 민간선박이면 바로 확인해 돌려보내면 될 것이고 수상한 배 같으면 도망을 갈 것이니 끝까지 따라가 사로잡아 배후를 밝히라”고 지시를 했다.

지시를 받은 그는 우선 “어느 나라 배인지 소속을 밝히라”고 여러 차례 방송을 했으나 오히려 도망을 가려해 순간 정탐선임을 눈치 채 포를 쏘며 위협을 했다. 푸에블로호는 북의 영역 밖으로 나가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한다. 영역 밖으로 나가면 북도 불리해 있는 힘을 다해 따라 잡았다. 당시 포를 쏴 격침을 시킬 수도 있었지만 생포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7인의 체포 결사대를 조직해 잠입을 하기로 했다.

▶치열한 전투의 흔적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그 중 2명은 전격적으로 배안으로 들어가 놀랄만한 영웅적인 신화를 이뤄낸다. 입구를 만들기 위한 포 발사로 당시 미군측은 1명이 사망을 하고 나머지 3명이 다쳤다. 사병들은 북측 군인들에게 살려 달라 빌었고 화들짝 놀라 바로 함장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했단다. 결사대에 의해 함장도 바로 제압됐고 이후부터 첩보영화를 찍어도 좋음 직한 대단한 작전이 시작된다.

북측 군인들과 미군들은 어떻게 대화를 했을까? 역시 세계 어디서나 통하는 그림과 바디랭귀지를 총동원한 것.

박인호 영웅이 함장을 체포하고 바로 한 일은 배에 있는 미군들의 인원수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그는 함장에게 사람 모양(그는 엎드린 사람 모양, 손을 들고 나오는 모양, 뛰어나오는 모양 세 가지를 그렸다고 말했다)과 그 곁에 물음표를 그려 넣으며 ‘몇 놈 있냐?’고 물었단다. 그러자 함장은 77이란 숫자를 썼다고 한다. 만약 틀리면 목을 담보하겠냐는 뜻으로 목을 관통하는 화살표를 그려 넣었더니 77이란 숫자 옆에 + 표시를 하고 목에 메달을 그린 사람 여섯을 그려 넣었다. 목의 메달은 장교 메달을 표시한 것으로 6명의 장교가 있다는 뜻이었다.

인원을 파악했으니 그 다음은 무기고가 있는 곳을 알아내는 일. 무기를 그리며 물었더니 그는 자신을 따라 오라며 어떤 방으로 이끌었다고. 그 방은 바로 함장실, 함장실에는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어 함장실임을 직감했으나 무기를 숨겨두고 위장하기엔 어려운 곳이었다. 그런데 함장은 침대 쪽으로 성큼성큼 가더니만 침대 아래서 권총 두 자루를 꺼내더란다. 가끔은 바디랭귀지가 잘못 통할 때도 있으니까ㅋㅋ.

그들은 다시 함장을 재촉해 사병 2명과 장교 1명이 지키고 있던 무기고마저 장악하고 그 다음은 함장을 앞세워 방 하나씩을 제압해 나간다. 특히 24명이 교대근무를 하는 정보종합실과 통신실 등은 그간의 정탐행위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암호지는 물론 기물 등을 파괴하며 미군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을 가려 했으나 함장을 제압하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푸에블로호 종합상황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푸에블로호에서 노획한 물품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갑판 위의 안테나를 통해 정보종합실로 정보가 종합되면 이를 통신실에서 정보를 보내게 되는데 당시 사진 전송까지 가능했다 한다. 정보종합실 장악 이후에는 방에서 나오는 족족 체포를 했으며 많은 인원이 모여 있는 곳에는 자신들끼리 눈을 싸매도록 해 제압하는 방식을 썼다고.

푸에블로호에는 6명의 장교가 있을 뿐이었지만 그 위엄은 대단한 것이어서 사병식당 외에 장교식당을 따로 갖추고 있었단다. 이 정도니 함장을 제압하고 난 뒤는 식은 죽 먹기였다는 게 박인호 영웅의 설명이다.

체포된 이들은 바로 정탐선임과 1968년 1월 11일 일본을 출발해 17차례 북의 영해를 침범하며 정탐 활동을 벌인 것 등을 자백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강력하게 반발했고 선원들의 송환을 위해 비밀 회담을 10여 차례나 실시했다고 한다.

북한군 창건 20주년 기념식 행사에 전 세계 외신기자들은 평양을 향했고 그들은 푸에블로호 선원을 모두 죽였다는 소문이 있음을 강조하며 그들을 공개해달라고 요구했다.

북은 푸에블로호 선원들을 공개했고 선원들은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나 어서 빨리 미국 정부가 정탐행위를 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해 하루라도 빨리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달라고 했다.

당시 외신기자들 사이에는 미국에서 온 기자도 있었는데 “가슴이 착잡하다”며 “정부는 빠른 시일 안에 푸에블로호 선원들을 모두 무사귀환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단다. 이를 보고 미국 정부는 선원들이 강압에 못이겨 하위자백을 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이는 전세계에 보도되었고 미국정부에 대한 여론은 불리해져만 갔다.

또한 베트남전에서의 전쟁이 미국에 극도로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미국 내의 반전여론과 함께 푸에블로호 선원들의 귀환을 요구하는 내부의 목소리도 높아져갔다.

▶푸에블로호 관련 미국의 '사죄'문.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미국은 막다른 곳에 이른 심정으로 1968년 12월 23일, 사건 발생 11달 만에 푸에블로호가 북의 영해를 침범한 사실을 시인하고 “앞으로는 어떠한 배도 조선 영해를 불법으로 침입하지 않고 정탐행위를 하지 않겠다”며 공식 사죄했다.

푸에블로호에서 방영해주는 당시의 영상 자료에 따르면 미국측 대표는 어찌나 정신이 없었던지 서명 날짜도 적지 않았다가 북측 대표의 호된 질책에 써 넣었단다.

이후 북은 승무원들과 시체 1구는 판문점을 통해 미국으로 돌려보냈고 푸에블로호는 자신의 전리품이므로 미국이 사과성명을 낸다 해도 돌려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미국은 승무원이 모두 무사히 귀환하자, 다시 성명을 내 북의 영해를 침범한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사과발언을 번복했다고 한다.

푸에블로호는 원산에서 대동강으로 어떻게 옮겨졌을까?

원산에 있던 푸에블로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1999년에 옮겨져, 셔먼호가 격침된 대동강 장소에 함께 전시되어 있다.

그 큰 배를 어찌 옮겼을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가 있어 옮기긴 해야 하는데 그 큰 배를 어찌 옮길까, 책임자들은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바다로 이동을 한다면 일본의 영해를 통과하게 돼 다시 미국에게 빼앗길 수도 있었다. 또 큰 배를 옮길만한 차량이 없어 육로로도 불가능했다.

“아무래도 어렵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각을 떠서라도 옮기라.”
그 큰 배를 분해해서 옮겼다가 다시 조립을 하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었다.

“그것 역시 어려울 것 같습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머리를 써라. 그게 원래 어떤 배인지 감추는 배가 아니나? 위장을 해서 옮기라.”

이때부터 푸에블로호는 통나무 판 등을 덧대 위장을 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일본 영해도 유유히 통과하며 대동강변까지 옮길 수 있었다. 미국도 이 사실을 3일 뒤에야 알 정도로 감쪽같은 작전이었다고.

푸에블로호 옆에 있는 극소형 수중 무인정찰잠수정은 지난 2004년 6월 22일 함경남도 함흥 남부 앞바다에서 정찰임무 수행 중에 나포된 것으로 길이 45m에 직경은 53cm, 배수량은 1.4톤에 이른다.

잠수정에는 정탐에 필요한 기재를 갖추고 있으며 인공위성을 통해 조종을 받고 정보를 위성에 쏘아 올리면서 정보를 교류하는 방식으로 이용됐다.

어떻게 나포를 한 것인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은 없었으나(질문을 했더니 군사 기밀이니 묻지 말라고 했다) 우리 일행 중 누군가가 “그물에 걸린 것이냐”고 묻자 그곳을 지키는 보초병이 그저 “네”라고 대답한다.

박인호 영웅은 “미제의 침략적 야망이 100여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아 세상에 미제가 있는 한 영원한 평화는 없다”며 “미국이 기어이 전쟁을 하면 수십 년간 다져온 핵 억지력을 동원해 미국을 송두리째 없애는데 앞장설 것이다”고 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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