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희 객원기자 (tongil@tongilnews.com)

본사 김양희 객원기자가, <겨레하나>가 주최한 북측 지원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11일부터 14일까지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한다. <겨레하나>는 북측과 협력해 평양에 빵공장과 국수공장 등을 만들어 지원을 해 왔는데 이번에 이를 둘러보는 것이다. 평양방문 신청부터 소감을 정리한 김양희 객원기자의 평양방문기를 일기식으로 순차적으로 싣는다. / 편집자 주


2006. 11. 12

▶김두현 처장이 생일을 맞았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평양에 들어오기 힘들었던 만큼 설레는 첫날밤, 모두들 잠 한숨 자기조차 아쉬웠던지 그래서 술자리가 그렇게 길었나 보다.

나 역시 밤늦도록 평양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래도 평양까지 와서 늦잠을 잘 순 없었다.

오전 6시 30분, 함께 방을 쓰는 겨레하나 신수경 사무처장을 대신해 방마다 다니며 일행을 깨웠다. 역시 모두들 같은 마음이었는지 늦은 술자리에도 대부분 일찍 일어나 양각도 호텔 주변을 산책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침식사시간에 색다른 이벤트가 벌어졌다.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김두현 사무처장의 생일을 맞아 양각도호텔 측에서 준비한 조촐한 생일잔치가 벌어진 것이다. 예쁜 접대원동무에게 꽃다발에 케잌까지 선물을 받은 김두현 사무국장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그렇잖아도 전날 김 처장이 “깜박 잊고 있었는데 오늘(자정이 지나서) 생일이니 축하해 주십쇼” 해서 축하주를 한잔 마신 터였다. 노총각인 그는 “생일상 한번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데 잊지 못할 생일상을 마련해 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생일상을 받는 모습을 멋지게 찍어주고 싶은데 전날부터 카메라가 말썽이라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대신 그의 가슴 속엔 이날의 생일잔치가 생생한 동영상으로 남아있겠지. 만약 그가 치매에 걸리더라도 이 순간의 감동만큼은 마지막까지 기억하고 있으리라.

묘향산 가는 버스 안에서

▶묘향산의 모습. [자료사진-통일뉴스]
우리 일행은 묘향산으로 향했다.

묘향산은 향산군, 구장군, 녕원군, 희천시의 일부 지역을 차지하고있다.
평양에서 묘향산까지 거리는 150키로메터이다.
기차로 갈수도 있고 평양-향산사이 관광도로를 따라 차로도 갈수 있다.
묘향산은 조선의 5대 명산 중 하나로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명산이다.
묘향산에는 세계 5대륙의 진보적 인사들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장군께 올린 선물들을 전시"한 국제친선전람관이 있으며 100여년의 력사가 깃든 보현사, 세계최초의 목판인쇄 기술을 보여주는 팔만대장경보존고, 단군의 유적이 있다.
산세가 기묘하고 산발마다 풍기는 향기 그윽해 이름지어진 묘향산의 경치는 절경의 극치를 이룬다. 천태만상의 기암들과 장쾌한 폭포들, 계곡의 맑은 물, 천연수림의 금주고도 바꾸지 못할 신선한 공기, 한번 와보지 않으면 한이 될 명산이다.
상원동, 만폭동, 하비로동에 55키로메터의 등산로가 닦아져있다.(북녁 안내책자 참조, 맞춤법과 띄어쓰기까지 그대로 인용)

평양에서 묘향산까지는 차로 약 2시간여 떨어진 곳으로 각자 전날의 피로를 풀거나 북측 안내원과 대화를 하곤 했다.

▶평양시내에는 '핵보유국' 구호판이 많았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나도 근처에 앉은 북측 민족화해협의회의 김종수 안내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봤다.

“이곳에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네다. 북과 남은 한 모습으로 북에 시련과 난관이 있으면 남이 아파하고 또 남이 힘들면 북이 서로 아파해야 하는 것 아닙네까? 정은 넘치도록 가득 채우는 것입네다. 남측에서 시련과 난관을 넘을 때면 곁에서 북도 함께 하고 있다고 기억하십시다.”

고대하던 계원삼 아저씨와 영철이의 소식도 물었다.

“계원삼 아저씨랑 김영철 안내원은 바쁜가요? 못오나요?”
“계원삼씨 아십네까? 특별히 하는 일은 없고 그리 바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네다. 긴데 김영철은 누굴 말하는 줄 모르갔구만. 여긴 영철이란 이름이 하도 흔해서리.”

“32살 먹었고 잘생기고....(그래도 못 알아 듣는다. 참고로 남과 북의 남성들의 외모기준은 확연해 이곳에서 꽃미남이다 싶은 사람들은 그곳에서 너무 못생긴 취급을 받고 있었다. 반면에 남성스러운 외모나 조금은 느끼해 보이는 외모가 최고의 각광 받는 얼굴이었다) 사진도 가져왔으니 나중에 보여드릴께요.”
휴~사진을 가져왔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소식도 못들을 뻔 했다.

“농사는 어떻습니까? 풍년입니까?”
“폭우가 엄청스레 오더니만 8월 이후는 비가 하나도 안왔더랬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북녘의 큰물 피해 복구는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후에도 이상기후로 인해 농사가 잘 되진 않은 것으로 보였다.

“미국의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공화당을 이긴 것은 어떻게 보세요?”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우리의 핵이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라고 보지만 우리가 핵무기로 선제 공격력을 갖춘 것은 중요한 일입네다. 공화당이던 민주당이던 그놈이 다 그놈으로 미국은 우리가 베어링을 빼서 미사일 만든다고 장난감조차도 수입 못하게 했습네다. 긴데 우리가 글케 할 일이 없나? 장난감으로 미사일을 만들게? 우린 미국도 이길 수 있습네다. 미국은 만 명이 쓰러지면 다 쓰러지지만 우린 만명이 쓰러지면 천만이 일어섭네다.”

국제친선전람관을 찾아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 외부 전경. 안쪽은 촬영이 금지돼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묘향산에 도착했으나 일정이 빠듯한 우린 향이 나는 묘향산 등산은 뒤로 한 채 국제친선전람관으로 향했다. 이곳 역시 10월까지만 일반인들의 참관이 가능하고 휴관을 한다지만 우리 일행을 위해 기꺼이 문을 열어 준 것이다.

국제친선전람관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세계 각국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전시하는 종합선물전시관으로 북녘에서는 ‘영광의 선물관’, ‘세계의 보물고’라고 부른다.

지난 1978년 8월 26일 세워진 이곳은 170여 개국에서 보내온 22만 여점의 선물을 나라별, 대륙별로 구분해 200여개 방에서 보유해 선물들을 1점당 1분씩 본다면 다 보는데 1년반이라는 시간이 소요된다. 때문에 안내원은 “선물을 살펴보다 보면 각 나라별 특징이나 풍속 등을 알 수 있어 이곳은 여권이나 비자가 없이 세계일주 할 수 있는 곳이다”며 “조선에 왔다가 전람관을 보고 가지 않으면 절름발이 관광이다”고 설명한다.

각각의 방은 모두 센서로 된 조명과 온습도 장치를 갖추고 있다.

천연동굴 같은 구조 위에 지은 건물이라 앞면만 있고 건물의 뒷면은 없다고 하는 이곳의 규모는 얼마나 웅장하고 또 미로 같은지 길을 잃으면 찾기 어렵다. 이곳에 정말 자주 왔다는 북측 안내원조차도 이곳 안에서는 길을 몰라 전람관 안내원을 따라 다닐 수밖에 없다고 할 정도다.

보물을 보호하기 위해서 모두 덧신을 갈아 신어야하며 사진촬영은 물론 필기구조차도 모두 입구에 잠시 보관을 하고 들어가야 한다. 사진까지는 아니더라도 정확한 보도를 위해 양해를 구하고 필기구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다.

선군정치가 시작됐다는 지난 1995년 이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받은 선물을 전시하는 전시관을 2004년에 추가로 설치, 95년부터 2000년까지 받은 선물은 따로 전시하고 2001년부터는 연도별로 1개씩의 방에 전시하고 있다.

특히 김정일 위원장이 환갑을 맞은 2002년 2월16일 하루 동안 660여 점의 선물을 받았다며 이를 별도로 1개의 방에 진열해 놓고 있다.

남녘에서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해 알고 계신 분들이 많겠지만 몇 가지 소개를 하자면 스탈린은 유리두께만 8cm나 된다는 방탄차와 전망차(기차)를, 역도산(우리 이름으로 김신락)은 벤츠를, 모택동은 1953년 11월 전승기념으로 전망차를 보내오기도 했다.

축구선수 펠레의 싸인이 담긴 축구공도 있었고 인도네시아의 전 대통령 수카르노가 식물학자들이 육종한 꽃에 김일성 주석의 이름을 붙여 선물로 올렸다는 김일성화를 새긴 판각화도 눈에 띄였다.

특히 이곳은 김일성 주석의 서거 이후 들어온 선물을 따로 모아 놓은 방도 있다.

“인류사에서 어떤 위인도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지만 12년이 흘렀어도 이처럼 선물이 계속 들어오는 것은 우리 수령님이 인류의 심장에 영원히 남아있다는 증거다”며 “서구 사람들조차 이곳에 다녀가며 영생을 느낀다고 말한다”고 안내원은 설명한다.

‘태양의 력사는 영원히 흐른다’는 글귀가 적힌 이 방에는 나이지리아에서 보내왔다는 화려한 의자와 의복 등과 물고기화석, 금열쇠 등 다른 방과 마찬가지로 온갖 귀한 보물들이 놓여 있다.

그중에서 비단이불 두 채가 눈에 띈다. '세계평화연합 박상권이 보냄'이라고 적혀 있는 이 이불에는 영생이라는 수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해방 후 김일성 주석이 만경대 고향집에 돌아왔지만 인민들의 고단한 삶에 마음이 아파 멍석을 덮고 잤다는 이야기가 마음이 아파 보낸 것이라 한다.

동아일보의 보천보기사 선물, 금판으로 정정

최근 남북교류가 활성화 되면서 남측인사들이 선물한 것들도 3개의 방에 걸쳐 전시돼 있다.

문선명 세계평화연합총재의 돌공예다보탑.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황금소와 다이너스티 승용차, 골프채. 김우중 전 대우그룹회장의 수예장식 옷장과 은식기 세트, 금 십장생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컴퓨터 등이 있었고 규모면에서 가장 웅장한 것은 에이스침대에서 보내왔다는 333종의 가구세트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가구 테두리에 금칠을 한 화려한 이 가구들은 에이스침대가 다른 일체의 가구를 생산하지 않은 채 5개월여 만에 생산한 것이라 한다.

지난해 보도한 바대로 반공이 최대의 국시였던 때의 남측 대통령의 선물들도 있었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은담배함 은재떨이, 은자그릇장식, 은칠보꽃병 등을, 전두환 전대통령은 청자기 꽃병, 은칠보차그릇일식, 금장식은수저 금장식은세공그릇 일식 등을, 노태우 전대통령은 금장식주전자세트, 문방구 일식, 옷감 등을 선물했으며 김대중 전대통령은 자개 등을 선물했다.

무엇보다 이 자리를 빌어 정정보도를 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지난해 국제친선전람관을 보고 보도할 당시는 필기구조차 가지고 들어갈 수 없어 기억에 의존한 기사를 쓰다 보니 오보를 한 것이 하나 있다.

나는 지난해 국제친선전람관에는 동아일보가 보천보전투 호외판을 '동판'으로 새겨 선물했더라고 기사를 썼는데 동판이 아닌 '금판'으로 바로 잡겠다.

동아일보는 1998년 10월 26일에 보천보전투 호외판을 새긴 ‘금인쇄원판’을 선물했는데 이 역시 안내원의 말을 빌리면 순금 1kg 200g을 얇게 펴 만든 것이라 한다.

너무 늦은 정정보도로 혹시나 피해가 있었을지 모르는 동아일보와 우리 통일뉴스 독자들의 이해를 구한다.

▶전망대에서 차 한잔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관람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국제친선전람관 전망대에서 북측 안내원의 ‘묘향산 가는 날’이란 시를 들으며 인삼차를 마셨다.

묘향산 가는날이란 시는 김일성 주석이 3번째 국제친선전람관을 방문하던 지난 1979년 10월 15일 가을 단풍을 보며 즉흥시를 읊은 것이라 하는데 김일성 주석은 시를 읊은 뒤 묘향산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잘 보존할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묘향산의 빼어난 경치에 일행들은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다. 특히 남성분들 북측 안내원과 사진을 찍을 때 어찌나 입이 찢어지시는지ㅋㅋㅋ.

심지어는 아내에게 혼이 난다며 입이 찢어지게 한 장 찍으신 후 자못 엄숙한 표정으로 또 한 장 찍는 분도 있다.

안내원들은 “야~ 나 매 맞을 사람 많아 죽갔다. 그래도 남쪽 부인들이 때리러 못 오는 것보다는 맞을 땐 맞더라도 얼른 통일돼 누구나 올 수 있게 됐으면 좋갔다”고 말한다.

보현사에서

▶지난해 보았던 안내원이 올해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묘향산 보현사는 김장이 한참인지라 보현사의 인력들이 김장을 해야해 방문이 어렵다고 했지만 우리 일행 중 만해사상실천선양회 효림스님 등 스님 두 분이 계셔 특별히 배려를 받아 방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남과 북의 조계종은 지난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각각 다른 곳에 위치하지만 함께 부처님오신날 봉축 법회 등에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법문을 채택해 행사를 치르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보현사를 설명하던 안내원이 그대로 우리를 맞았다.

묘향산 보현사는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에 위치한 불사(佛寺)로 784년에 의상에 의해 세워지고 1024년, 고려 때 복원되었다. 원래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팔만대장경은 1984년에 북조선의 평안북도 당 인민위원회가 향산문헌보존고를 만들어 옮기고, 지금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불교의 종교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남북 중심축을 따라 조계문·해탈문·천왕문·보현사9층탑(북한 보물 19호)·만세루·보현사8각13층석탑(북한 국보 23)·대웅전 등이 차례로 놓여 있고 그 주변에 심검당·수월당·영사전·관음전 등 수십 채의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대웅전·만세루·심검당·수월당 등 여러 채의 건물들이 6·25전쟁 때 훼손되었고 이 가운데 대웅전은 1976년에, 만세루는 1979년에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이 절은 일제강점기의 31본산 가운데 하나로 주변 경치가 아름답고 건축술이 뛰어나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휴정(休靜, 서산대사)이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보현사에는 서산대사 등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담소중인 남북의 스님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지리산은 웅장하나 수려하지 못하고,
금강산은 수려하나 웅장하지 못하다.
그러나, 묘향산은 웅장하면서도 수려하다.
조선시대의 명승 서산대사가 읊은 말이다.

서산대사는 그의 생애 중 40년을 이곳 묘향산 보현사에서 보냈으며, 서산이란 이름도 묘향산이 당시 서산으로 불렸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묘향산 보현사는 서산대사 사후에도 그의 제자 사명당 등이 배출된 조선시대 관서지역 불교의 총림이었고, 남북 분단이후 지금까지 북한 불교의 대표사찰로 기능해 왔다.

▶보현사 8각 13층 석탑.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보현사에는 북녘의 보물과 국보급 유물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보현사의 8각 13층 석탑은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가 보현사에 머물며 잠이 들었는데 왜군들이 침입을 하자 탑 끝자락에 달린 종들이 '왜란왜란왜란' 하고 울렸다. 잠에서 깬 서산 대사는 그 길로 왜군을 무찌르는 큰 업적을 이룩했다고 한다.

설명을 마친 안내원은 “통일을 하는데 큰 일을 하시는 분이 왔는데도 이 종이 전혀 울리지 않는 것을 보면 여기 계신 여러분들 더욱 통일을 위해 좀 더 노력하셔야갔슴다”한다. 지난번에도 들었지만 올해는 워낙에 분위기가 엄혹하니 더 와 닿는다.

이후 며느리의 재치로 짧은 서까래를 덧대 지붕을 올렸다는 ‘부연’ 설화가 담긴 건물의 처마 등을 둘러본 뒤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세심하게 관리되고 있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돼 있는 사고에 향했다.

보현사의 팔만대장경은 보존을 위해 사진 촬영이 금지됐으며 관람도 몇 사람씩 들어가 볼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은 이곳에 세 차례나 방문해 문화유물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맑은 계곡물이 인상적이었다. [사진-통일뉴스 김양희 객원기자]
다시 평양으로 향해야 한다. 국제친선전람관 옆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너무 맑아 또 한 장 찰칵. 이렇게 맑은 물을 본 적이 있는가?

바닥 모래알 하나까지 보이는 이 아름다운 곳에서 머리를 감으면 참 개운 할 것 같다 하자 옆에서 누군가 한마디 한다.

“나는 손을 한 번 담그고 싶은데 내 손이 들어가면 물에게 너무 실례가 될 것 같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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