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희 객원기자 (tongil@tongilnews.com)

본사 김양희 객원기자가, <겨레하나>가 주최한 북측 지원사업장 방문단 일원으로 11일부터 14일까지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한다. <겨레하나>는 북측과 협력해 평양에 빵공장과 국수공장 등을 만들어 지원을 해 왔는데 이번에 이를 둘러보는 것이다. 평양방문 신청부터 소감을 정리한 김양희 객원기자의 평양방문기를 일기식으로 순차적으로 싣는다. / 편집자 주


'가슴으로 느끼는 도시, 그곳에 가고 싶다'
2006. 10. 19. 목요일. 맑음

한참 바쁘게 회사 일을 하고 있는데 후배 놈에게 쪽지가 하나 날라 왔다.
‘[겨레하나] 평양 지원사업장 방북단 모집’

평양에 갈 수 있다니... 평양이라는 단어만 보고도 가슴이 떨려왔다.
지난해 아리랑 참관 차 평양을 다녀오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신기하고 즐거워 미숙하지만 정신없이 신나게 기사를 써댔던 것이 떠오른다.

그때 꿈꾼 것이 평양주재기자.

평양주재기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음식이야기를 쓰면서부터 여전히 부족하고 미흡하지만 나이를 많이 먹은 후라도 남측과 북측의 음식역사 이야기를 쓰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이를 위해 최소한 일년여 정도는 평양에 머물러 공부를 하고 싶었다. 아직은 허황된 꿈같지만 이를 위해 꾸준히 준비하다보면 언젠가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좋은 시기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전엔 기회가 닿는 대로 부지런히 평양을 찾아 부족하지만 열심히 기사를 올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올 여름 참 뜨거웠는데도 동료들이 휴가를 가 신나게 놀다 오더라도 나는 다음에 평양으로 휴가를 가겠다며 아끼고 아꼈다. 가을쯤엔 평양을 갈 수 있을꺼라 흐뭇해하면서 무더운 여름을 기쁘게 보냈다.

그렇지만 통일의 열기가 무르익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위조지폐, 메구미 가짜유골 등 북측을 압박하는 요소가 많아지면서 북측은 미사일에 이어 핵실험이라는 강경수를 두었다. 북측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나의 평양 휴가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적어도 올해는 갈 수 없을꺼다 싶었다.

그러던 중 후배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갈꺼야? 누나 가서 만날 사람 있잖아. 오늘부터 부지런히 장갑이랑 목도리 뜨면 그때까진 완성 되겠다. ㅋㅋㅋ”

그렇다. 난 평양에 가면 안부를 물어볼 사람도 생겼다.
영철이, 그리고 계원삼 아저씨.

짧은 시간 머물렀지만 따뜻한 가슴을 보여준 사람들.
지난해 평양을 다녀오고부터 내 메신저 아이디는 ‘그곳에도 친구가 있었네’이다.

직접 가기 전의 평양은 ‘우리 민족끼리 민족공조를 해 통일을 이뤄야한다’는 식으로 머리 속 계산에만 있는 도시였다.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만 있다 뿐이지 미국의 워싱턴이나 프랑스의 파리, 일본의 동경들과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과 함께 떠들고 웃으며 부대끼는 가운데 평양은 가슴으로 느끼는 도시가 되었다.

별 일 없이 잘 지내시는지?, 1년 만에 늙으신 건 아닌지 또 노총각이었던 영철이가 장가를 간 건 아닌지....궁금하고 보고 싶다. 그곳의 사람들을 또 만나 ‘난 올해도 여전히 연애를 못했다’며 하소연도 하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몰래 닭알이라도 건네며 마음을 표현해보라던 원삼 아저씨의 모습이 떠오른다.

일정을 살펴보니 회사에도 별 무리가 없을 듯 하고 얼마 전 아르바이트비가 들어온 게 있어 비용도 문제가 없을 듯 했다. 평소 평양에 가고 싶어 하던 선배에게 알렸더니 선배도 간다한다. 가서 많은 것 보고 느끼고 와야지.

그런데...오늘까지가 신청 마감이었다. 알려주려면 좀 진작에 알려줄 것이지...그렇지만 내일 어떻게 떼를 써서라도 꼭 신청을 하고 말리라.

'세상이 바뀌려면 기자부터 바뀌어야'
2006. 10. 20. 금요일. 맑음

방북 신청방법을 알아보니 오늘 오전까지 신청을 하면 받아 준단다. 바로 나와 선배언니의 신청서를 작성했다. 이름, 주민번호, 주소, 키, 단체소속, 직책, 휴대폰 번호, 방북유무, 사진 등이 필요했다.

선배언니와 나는 ‘키는 왜 필요할까?’ 의아해 하며 작성했다.
김양희/ 통일뉴스/ 객원기자/ 방북 경험 있음

이로써 나는 11월 4일부터 7일까지 김포에서부터 직항로를 통해 평양으로 가 2박, 묘향산에서 1박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다. 비용은 수요일까지 입금을 하면 된단다.
이제부터 평양을 가기 전 어떤 취재를 할지 준비를 하며 뛰는 가슴을 진정해야 할 것이다.
가기도 전에 내 가슴은 터질지도 모른다.

몇 시간 뒤, 겨레하나 측에서 연락이 왔다.
이번 평양문화유적답사는 협의 당시부터 언론은 배제된 상황이라 소속단체와 직책에 통일뉴스 객원기자라고 적은 것이 화근이 돼 북측에서 초청장이 발급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억울한 마음보다 그동안 언론사나 기자들에게 얼마나 불신이 깊었으면...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세상이 바뀌려면 기자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으니까. 기자는 매체가 크건 작건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늘 당당하게 취재를 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도가 지나쳐 권위의식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도 많다.

한번은 조선호텔에서 기자간담회를 하는데, 서빙을 하던 직원 하나가 실수로 한 기자의 양복에 물을 쏟았다. 직원은 연신 미안하다며 양복을 벗어주면 30분 이내에 세탁을 해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기자는 노발대발하며 눈을 어디다 두고 일을 하느냐며 책임자 불러오라며 난리를 쳤다. 그 기자뿐 아니라 같은 테이블에 함께 앉은 다른 기자들도 ‘초짜인 것 같다’는 둥 ‘어째 불안불안 했다’는 둥 하며 온갖 호들갑을 다 떨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양복인지는 몰라도 가만 둬도 물은 마를꺼고 또 세탁까지 해준다는데, 진짜 너무한다 싶었다.

호텔 직원도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인데 다짜고짜 그리 개무시를 하니 쯔쯧... 결국 그는 우리 기자간담회의 서빙에서 바로 빠지고 다른 사람이 들어와 서빙을 했다.

또 한번은 기자간담회 후 업체 사람들과 저녁식사를 했는데 한 기자가 ‘2차는 좋은 데로 가시죠’ 한다. 순진하게도 호프집 정도 가는 줄 알고 따라나섰는데 알고 보니 여자들이 술 따라주는 곳이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끝까지 앉아있었다. 당장은 그 자리에서 기사꺼리가 나오지 않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인지상정이라 취재원들이랑 친한 게 중요한데 남자기자들은 사우나까지 같이 다니는데 먼저 집에 가겠다며 나오기가 싫었다. 끝까지 함께 하고 그들을 지켜봤다. ‘내가 있는데 저 정도니 녀석들 나 없으면 도대체 어떻게 하고 노는 거야?’

그때부터 느낀 것. 세상이 바뀌려면 기자들부터 바뀌어야한다.

다행히 방북 허가가 났단다. 그래도 통일뉴스가 편향되지 않은 시각으로 기사를 잘 썼기 때문이리라. 나도 통일뉴스 이름에 누가 되지 않는 기사를 쓰도록 가랑이 찢어지게 노력해야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북 핵실험 때문에 고려항공이 우리나라 영공을 통과할 수 없단다. 남측의 항공사들도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전세기를 내 줄 수 없다해 우리는 중국을 경유해 평양을 들어가야 한단다. 중국으로 경유를 해서 가려면 잠깐 들르더라도 중국 비자를 받아야하고 비용도 한참 늘어난다고 한다.

허거걱~ 비용도 비용이지만 만기가 지난 후 난 아직 여권이 없다. 여권 사진은 금방 나올 것이고 여권은 한 일주일 정도면 나온다 치면 바로 중국 비자를 받아 갈 수 있겠다. 단 일정이 어찌 변할지 모르니 하루라도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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