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길(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부원장)



강정구 지음, 『미국을 알기나 하나요?』, 통일뉴스, 2006년 6월


강정구 교수의 신간 《미국을 알기나 하나요?》 책장을 넘기면서 시종 등골이 오싹할 만큼 전율을 느껴야만 했다. 어느덧 한낮의 더위마저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쳐버린 듯 온몸이 서늘해져 있었다.

▶『미국을 알기나 하나요?』 표지 사진.
강정구 교수의 《미국을 알기나 하나요?》는 문장 하나 하나가 행위이고 투쟁이다. 그것은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 찬 냉전 성역에 대한 가차 없는 공격으로 일관하고 있다. 책갈피 곳곳에는 낡고 부패한 도그마를 겨누는 칼날이 번뜩이고 있다. 하지만 강정구 교수의 손에 쥐어져 있는 칼날은 또 다른 도그마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과 상식’이라는 이름의 것이다.

“진실은 칼날보다 날카롭고 상식은 법보다 공정하다”

강정구 교수가 《미국을 알기나 하나요?》에서 시종일관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은 과연 진실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더불어 매사를 상식의 눈으로 보기를 간절히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나 강정구 교수의 그러한 태도는 허위와 비상식으로 가득 찬 현실 세계와 정면으로 충돌을 빚으면서 첨예한 대립을 빚어내고 있다. 그래서 강정구 교수의 《미국을 알기나 하나요?》는 한가로운 지적 유희를 단 한치도 허용하고 있지 않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냉전 이데올로기에 의해 가위눌려 살아왔다. 그 한복판에 ‘간첩’의 문제가 있었다. 어디인가에 숨어들었을 간첩을 찾아내기 위해 온 세상이 감시의 대상이 되고 누구나가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첩(남파 공작원)의 존재가 북에 대한 맹목적 불신과 증오를 재생산하는 요소로 작용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강정구 교수는 이와 관련하여 구체적 증거 자료를 바탕으로 세간의 사고를 완전히 뒤엎어 버리고 있다. 남파공작원 보다 비교할 수 없이 많은 북파 공작원이 투입되어 왔으며 이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비인간적인 만행을 자행되어 왔음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강 교수는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결코 회피하지 않는다. 도리어 정면으로 칼을 뽑아 응수하고 있다. 강 교수가 보기에 북한 인권 문제를 끄집어내고 있는 미국은 2002년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이사 자격을 박탈당할 만큼 인권 문제를 거론할 자격조차 없는 나라이다. 또한 탈북자로 드러난 북한 인권 문제의 실체도 생존 문제의 위기에서 비롯된 문제인 만큼 집중적인 식량지원을 통해 원천적인 해결을 시도해야 한다. 강 교수가 보기에 실제 필요한 지원은 하지 않으면서 험담만 늘어놓는 것은 극도로 불순한 의도를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니다.

강정구 교수의 도전은 맥아더 비판을 제기하는 가운데 한국전쟁을 다루면서 가히 절정에 이르게 된다. 한국전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를 낳는 지점이다. 쉽게 말해서 다치기 쉬운 주제인 것이다. 실제로 강정구 교수 자신이 한국전쟁을 통일전쟁으로 봐야 한다는 한마디로 인해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미국을 알기나 하나요?》에는 이와 관련된 글이 가감 없이 실려 있다. 이글을 통해 강정구 교수는 한국전쟁은 적어도 출발 당시에는 통일전쟁의 성격을 지닌 내전이었으며 마땅히 내전으로 끝났어야 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지극히 부당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강 교수가 제시하는 논거는 의외로 간단하다. 내전으로 끝났으면 조기에 전쟁이 마무리됨으로써 수만 명의 희생에 그쳤을 것을 미국이 개입함으로써 희생자 수가 수백 만 명으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속인의 눈에 보기에 강정구 교수의 이야기는 매우 자극적이면서 도발적인 느낌을 줄 수 있다. 특히 골수 친미 인사들이 들으면 기절하고도 남을 이야기이다. 그들은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어도 좋다’는 이야기냐고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을 부라릴 것이다. 하지만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들어보면 강 교수의 이야기는 지극히 상식적 수준의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세상에서 사람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그 어떤 이념과 체제도 수백만 명의 사람 목숨을 앗아가도 무방할 만큼 절대적 가치를 지닐 수는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목숨을 우습게 아는 절대적 가치를 숭배하고 있다. 그것이 그들 자신의 표현대로 자유민주주의이든 아니면 포괄적으로 반공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강정구 교수는 그러한 반인적인 아집에 대해 진실을 설파하고 상식의 칼날을 들이댔을 뿐인 것이다.

참으로 진실은 칼날보다 날카롭고 상식은 법보다 공정함을 깨우쳐 주기 위한 강정구 교수의 노력이 눈물겹게 다가온다.

대안 제시 없이는 감히 비판하지 않는다!

진보적 학자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가장 심각한 비난은 대안 없이 비판만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필자가 보기에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대략 1980년대까지 미래 사회에 대한 담론은 압도적으로 진보진영의 몫이었다. 대안이라는 용어와 진보라는 용어는 한 쌍처럼 사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대안적 사고가 급격히 퇴색하기 시작했다. 그 대신 보수 진영이 대안적인 담론 생산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거두절미하고 삼성경제연구소(세리) 사이트에 들어가 보라. 한국 사회 전 분야에서 걸친 미래 전망을 대단히 공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제출한 ‘G10 IN Y10 Project’(2015년 10대 선진국 진입전략)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구체적이고 명확한 수준에서 10년의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국민들이 보기에는 진보와 보수의 전망 대결은 우열의 다툼이 아니라 있고 없고의 싸움 정도로 비쳐지고 있다. 보수는 공격적으로 아젠다를 쏟아놓고 있는데 반해 진보는 전혀 그렇지를 못한 것이다. 이는 단적으로 대형서점 미래학 코너에 진열되어 있는 책들 중에서 진보 계열에 속하는 것은 몇 몇 번역서를 제외하면 거의 전무하다시피하다. 반면 보수적 관점에서 ‘10년 후’라는 의제를 담은 책들만 해도 즐비하기 짝이 없다. 국민들 사이에서 진보진영이 대안 없이 덮어놓고 반대만 하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는 것이 전혀 보수언론의 조작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강정구 교수에 대해서만큼은 대안 없이 비판만 한다는 비난은 삼가야 할 것이다. 강정구 교수의《미국을 알기나 하나요?》는 시종 일관 대안 모색의 관점에서 모든 문제를 접근하고 있다. 서해분쟁 지역 문제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서부터 한미관계와 통일 문제에 이르기까지 대안 제시를 핵심 과제로 삼고 있다. 그러면서도 기성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독창적인 접근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6.15공동선언 이후 환경 변화에 맞추어 고안한 전후 4단계에 걸친 아리랑통일민주공화국 건설 방안은 그러한 노력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강정구 교수의 대안 제시가 충분하다거나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고민을 거친 연후에야 해당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강정구 교수의 태도이다. 《미국을 알기나 하나요?》는 대안 제시 없이는 감히 비판조차 허용하지 않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후학들이 충심으로 배워야할 지점이다.

무지와 오만에 대한 채찍

내가 아는 강정구 교수는 참으로 고독한 학자이다. 여전히 냉전 수구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이렇다 할 여론의 지지 없이 홀로 냉전 성역에 도전해 왔다는 의미에서 강정구 교수는 매우 고독한 학자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강 교수를 더욱 고독하게 만든 것은 학계에서조차 외롭게 민족문제에 천착해 왔다는 점이다.

언제인가 강정구 교수와 함께 토론회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도중 학계 풍토에 대한 심각한 문제의식을 전해들은 바 있다. 민족 문제를 다루는 학자가 너무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학계와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역시 어떤 토론회 자리였는데 꽤 이름이 알려져 있는 어떤 소장 학자가 민족국가는 낡은 패러다임이며 앞으로 지향해야할 국가는 ‘다민족으로 구성되는 시민국가’라고 주창한 바 있었다. 학계의 분위기를 반영한 일단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의 발전 단계가 민족의 좁은 틀에서 벗어나 글로벌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전세계적인 문화 교류가 문화 다양성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듯이 올바른 세계성의 획득은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상호 인정과 존중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패권과 노예적 굴종만이 판을 칠뿐이다.

이런 점에서 강정구 교수의《미국을 알기나 하나요?》는 글로벌 시대 한반도 문제가 갖는 국제성, 세계성에 주목하고 있다. 강정구 교수가 보기에 북한 문제, 한반도 문제, 동북아 문제, 세계평화 문제는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민족 문제와 지구적 가치는 긴밀하게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강정구 교수의 《미국을 알기나 하나요?》는 민족 문제에 대한 온갖 종류의 무지와 오만을 질타하는 매서운 채찍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말들이 많기는 하다. 혹자는 강 교수가 너무 앞서 간다고 문제 삼기도 하고 혹은 너무 돌출적이라고 힐난하기도 한다. 필자는 그러한 비난에 대해 100% 강정구 교수를 옹호하고 싶다. 현실은 강 교수가 너무 앞서간 것이 아니라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시대 흐름에 비해 너무 쳐져 있는 것이며 강 교수가 돌출적인 것이 아니라 한국의 지식인들이 이슈에 대해 너무 소심하고 둔감해져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강정구 교수는 고독한 만큼 지식인 사회의 독보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독보적 가치가 듬뿍 담겨져 있는 책이 바로 《미국을 알기나 하나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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