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화장발'로 다소간 감춰졌던 한나라당의 정체가 최근 '강정구 교수 사건'을 계기로 다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천법무 지휘권행사, 헌정질서 파괴행위?

이 당은 13일 소속 의원 전원의 이름으로, 천정배 법무장관이 전날 검찰청법 8조에 따라 검찰총장에게 '강정구 교수 불구속 수사' 지시를 내린데 대해 '장관 해임'을 촉구하며 "당의 명운을 걸고 국민과 함께 끝까지 투쟁할 것임을 엄숙히 선언"하고 나섰다.
"헌법질서 파괴행위"이자 "자유민주주의 체제 흔들기"라는 것이다.

이 당의 성명이나 대변인 논평의 수준이야 이미 악명이 자자하지만 그 중에서도 13일 성명은 대한민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다. 훗날 사료에 오른 이후 축하인사를 보내는 것은 이 당을 '두번 죽이는 짓'이 될 것 같아 미리 언급해 둔다.

각설하고, 이 성명의 '치졸성'은 천 장관을 해임하자면서도 천 장관의 검찰 지휘권 발동 이유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 단 한 줄도 없다는 데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말할 상대에게는 귀막고 자기 편만 보고 아우성치는 셈이다.

더 나쁜 것은 그들이 아우성치는 '명분'이다. 한나라당은 천 장관의 검찰지휘권 발동이 "검찰 역사상 최초이자, 대한민국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라고 했다. '검찰청법 8조'에 적시된 지휘권 발동에 대해, 그간 행사하지 않았다는 '관행'을 들어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50년이 됐든 100년이 됐든, 헌정사상 최초이든 두번째든 '관행'은 '관행'일 뿐 그것이 '성문법률'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나아가 법무장관의 검찰지휘권 발동이 "헌정사상 최초"라는 단정이야말로 전형적인 한나라당식 '뻥'이다. 그들 말대로라면 정부 수립이후 역대 법무장관 56명은 '검찰사무의 최고 감독자로서' 지휘.감독권을 단 한번도 행사하지 않은 '허깨비'들이었던 셈이다.

한나라당은 솔직해야 한다. 역대 장관들은 검찰지휘권을 행사했으며, 천 장관과 역대장관들의 차이점은 '공개적'행사 여부일 뿐이다. 따라서 천 장관이 법에 따라 투명하게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인신구속문제를 '그들'끼리 비밀스럽게 흥정하던 '관행'을 근절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칭찬받을 지언정 비난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헌법 무시하면서 웬 "국가정체성"?

검찰지휘권 발동이유만 해도 그렇다. 천 장관은 "이번 사건의 피의자 강정구에 대하여는 헌법과 법률이 규정한 구속사유를 충족하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할 것"이므로 불구속 수사를 지시했다.

그가 말하는 "헌법"이란 신체의 자유를 선언하고 인신구속에서 적법절차를 따르도록 규정한 헌법 제 12조를 말한다. 또 이를 구체화한 형사소송법은 "증거인멸 또는 도주 우려가 있는 경우"에 한해 제한적으로 구속영장을 신청토록 하고 있다.

보안경찰과 공안검사들이 수구세력.언론의 '마녀사냥식 여론재판'에 휘둘려 무리한 인신구속을 시도한데 대해, '지휘감독자'로서 이를 바로잡은 것은 "인권옹호기관"으로서 검찰 본연의 임무를 환기시킨 정당한 직무집행에 해당한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한나라당은 구체적인 이유도 없이 천 장관이 "국가정체성"을 훼손했다며 "당의 명운"을 걸고 해임투쟁에 끝까지 나설 것을 선언했다.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것은 한나라당이 들먹이는 "국가정체성"이다. "헌정질서"를 말하면서 헌법 조항을 무시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 흔들기"라면서 근대 형사법의 대원칙을 깡그리 무시하는 그런 "국가정체성"은 또 뭔가 말이다.

한나라당이 '천 장관이 헌정질서를 문란케했다'고 주장하려면 막연하고도 비겁하게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들먹일 것이 아니라 천 장관이 헌법 몇 조를 위반했는지 구체적으로 적시하면 된다.

헌법 명문 조항에 근거한 직무집행자를 겨냥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해임건의안을 제출하겠다고 위협하면 앞으로 그 누가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나서겠는가. 이것이야말로 가장 악질적인 '헌정질서 파괴행위'가 아닌가 그 말이다.

여기서 한나라당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 먹는 자유민주주의가 사상의 자유경쟁체제라는 점은 워낙 상식에 속하는 것이므로 굳이 논하지 않겠다.

요컨대 한나라당의 성명은 시작과 끝이 모두 '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도 끝도 없이 "헌정질서 파괴"니 "자유민주주의체제 흔들기"라고 설레발치는 것은 '뻥'은 과감할수록 효과가 좋다는 나름의 자기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국가보안법과 함께 한 56년간 "국가정체성" 운운하는 '뻥'은 통했으며 또 앞으로도 통할 것이라는 이 당과 그 주변 무리들의 확신은 신앙에 가깝다.

실례로 어제밤 MBC TV토론에서 '보수'를 자처하는 한 변호사는 강정구 교수의 글에 대해 "반역이 문제될 수 있다"고 했다. 긴급조치에 반박하는 성명서를 제작했다는 이유로 내란 예비음모죄로 사형선고까지 내렸던 1974년 '민청학련사건' 조작자들 수준에서 딱 멈춰있는 것이다.

논란의 핵심은 '미운 놈 손보기'

이 당 원희룡 의원은 13일 "이 사건에 있어서 과연 구속이 맞는가, 불구속이 맞는가 라는 개별사안의 옳고 그름 여부를 떠나서" 보자고 했다. 천 장관의 직무집행의 정당성 여부가 논란의 핵심이 아니며, 논쟁구도가 그리로 가면 한나라당이 진다는 고백에 다름 아니다.

한나라당과 그들 배후인 수구언론이 '천 장관 때리기'를 통해 요구하는 것은 '미운 강정구를 손봐달라'는 것이다. 다만 달라진 사회분위기 때문에 이들의 유치한 떼쓰기가 먹히지 않아 문제다. 그래서 안보만 들먹이면 미운 놈 때려잡을 수 있었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저 난리들이다.

요구를 뒷받침할 구실이 합당하지 않으니 말은 한없이 에스컬레이트된다. "헌정질서"가 나오고 "반역"이 동원된다. 신경에 거슬리는 누구 조금 겁주려고 시작한 일이 "당의 명운을 걸고 끝까지 싸울" 일이 돼 버렸으니 이런 코미디도 없다.

이 당은 그러면서도 빠져나갈 구실을 마련했다. "독립성"을 운운하며 검찰보고 대리전을 하라고 꼬드긴다. 그러나 그 검찰이 법 절차에 따른 지휘감독권 행사를 독립성 훼손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자력구제를 금지하고 국가가 형벌권을 독점한 데는 정의가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막겠다는 합의가 바탕이 됐다. 이러한 공정성의 요청은 객관적인 잣대를 필요로 한다. 그것이 바로 법과 양심이다.

이러한 연유로부터 국민은 국가기관의 법집행 과정에 개입해 이를 왜곡하거나 가로막는 부정의한 힘들을 법에 따라 제압하여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강제력을 이들 기관에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보안경찰과 공안검찰은 '강정구 교수 사건' 처리 과정에서 법과 양심이 아니라 수구보수세력의 법감정과 여론에 휘둘려 공정한 잣대를 유지하지도 그를 실현내지도 못하고 스스로 독립성을 훼손했다.

천정배 장관이 지휘서신에서 "(헌법과 법률의) 정신과 기본원칙은 공안사건에 대하여도 달리 적용돼야 할 이유가 없고, 여론 등의 영향을 받아서도 안될 것"이라고 지적한 이유가 여기 있다. 지휘.감독권 행사를 불러들인 것은 검찰 자신이다. 독립성 운운하며 덤빌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뻥'에 주눅 들지 말 것

결국 한나라당의 13일 성명은 몰골을 드러낸 구 세력의 대국민 협박문서일 뿐이다. 주지하다시피 '뻥'은 취약성의 반영이다.

국가보안법 56년 체제 하에서 우리 국민은 한나라당식 '뻥'에 대처하는 법을 배웠다. 요약하면 이렇다.
1. '뻥' 에 주눅들지 말 것.
2. 눈 똑바로 뜨고 '뻥'의 이면을 응시하며 조목조목 따질 것.
3. '뻥'이 다해 주먹이 눈앞을 스치면 형벌권을 독점한 국가기관으로 안내할 것.
4. 법 집행기관이 공정하게 처리하는지 감시할 것.

덧붙이자면 지금은 '뻥'쟁이들을 응시하며 조목조목 받아칠 때다. 한나라당과 수구언론이 본보기로 혼내주고자 하는 '강정구'는 내일은 내 친구, 친척일 수도 있고 심지어 자신일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한나라당식 '뻥'의 기반인 국가보안법을 아예 없앨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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