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민 기자(mhong@tongilnews.com)


▶오만한 제국-미국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독립
하워드 진 저/
이아정 역 / 당대
미국이 제2차 대전 이후 벌려온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한 크고 작은 `성전(?)`에 은연중  따라다니던 말이 "자유세계의 국제적인 수호자"였다. 베트남 양민들을 무고하게 학살하면서도, 그라나다 침공과 파나마 침공에서도, 그리고 걸프에서의 화려한 전쟁쇼에서도 미국은 늘 `자유의 수호자`를 자칭해 왔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무릇 군주는 사자와 여우 양자 모두를 닮아야 한다고 했던가. 미국의 지도자와 그 보좌관들, 즉 늙은 미국의 마키아벨리들에게 사자는 힘이요, 여우는 속임수일 게다.

`자유의 성전`이란 이름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말하는 `정당한 전쟁`의 이면에는 여우의 속임수로 뒤틀어진 비열한 패권의 술책이 도사리고 있다. 엘살바도르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국가에서 그랬듯이 쿠바의 바티스타 정권, 니콰라과의 소모사 정권, 과테말라의 아르마 정권,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 아이티의 뒤발리에 정권이 이 비열한 미국 헤게모니의 숨겨진 역사이다.

그러나 미국 국민 자신은 정작 이러한 비열한 미국의 자화상을 모르고 있다. 이러한 무지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미국 헌법의 머리말을 쓸 때 최초로 쓴 말 "우리 미국 국민은 완벽한 화합을 이루기 위하여 정의를 확립하고..."라는 문구가 정작 부유한 55명의 미국 백인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같다.

이들 소수의 부유한 미국 백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미국의 관념은 부자와 가난한 자, 흑인과 백인 사이의 투쟁, 많은 미국 내 소요와 반란, 대규모 폭동의 역사를 `우리 미국 국민`이라는 한마디로 은폐해 왔다.

미국의 이데올로기가 그 저열한 패권에 기대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세계 역사에서 하나의 성스러운 자유세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해 온데는 미국의 정책을 담당한 이들의 교묘한 마키아벨리관이 자리하고 있다고 저자는 본다.

중동에 무기를 팔아 중앙 아메리카의 사악한 독재정권을 지원하면서도, 베트남에서 양민들에게 네이팜탄을 뿌려대면서도 결국 미국의 마키아벨리들은 그 비열한 책임회피의 통치 테크닉을 부려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 그럴듯한 부인(plausible denial)으로 점철된 미국 외교사를 관통하는 `자유`의 명분에 감춰진 비열한 미국 외교 실체가 결코 마키아벨리가 주장하는 인간은 모두 사악하고 공격적이기 때문이라는데 기원하고 있지 않다고 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미국의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한 저자는 자신이 사악했기 때문에 헝가리 민가에 폭격을 가했던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적을 실체화했던 미국 지도부의 `정당한 전쟁`이란 교묘한 이데올로기화에 맹목의 충성이 단지 결부되었던 것뿐이라고 얘기한다.

미국은 국내외적으로 `자유`와 `정의`란 이름으로 모든 이들의 선택지를 제한해 왔고 그것이 미국의 관념인 것처럼 굳어져 왔다. 그러나 그 관념은 국민들 어느 누구의 이해도 대변하지 않는 오직 소수의 마키아벨리들에게 충실한 이데올로기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유의 성전`에 동원되는 흑인들은 말한다. "이 전쟁은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어. 우리(미국)가 이긴다 해도 나는 여전히 사회의 패배자인데,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이 냉소에는 미국 민주주의의 지저분한 실체가 담겨져 있다.

미사일 위협을 들어 북한의 호전성을 자신의 패권논리에 교묘히 결부시키는 그들의 현실주의적 마키아벨리관에는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의 현실은 안중에도 없다. 어느 미국 국민도 진정 북한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사자와 여우의 얼굴로 지배해온 미국을 향해 미사일을 과연 발사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열한 패권에 길들여져 온 마키아벨리의 후예들이 미국 지도부에 있는 한 북한은 지금도 미국의 심장을 향해 미사일을 겨누고 있는 아시아의 호전적 인종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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