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것들은 아빠가 간첩이라는 죄가 있다고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고, 나는 언제 직장을 쫓겨날지도 모르는 바람 앞의 등불이 되어있고, 이렇게 어떻게 산단 말인가? 나는 고생하시는 아빠를 미워했다가 또 가여워했다가 오락가락 마음을 잡을 수가 없다.”

▶김선주의 『탐루』 (한울, 2005) 표지.
김낙중의 아내 김남기가 두 번째 ‘간첩사건’으로 남편이 감옥에 갇히자 힘든 심경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일기의 일부이다.

여느 자서전이나 일대기와는 달리 김낙중의 일대기를 다룬 『탐루』(김선주, 한울, 2005)는 그의 딸이 썼을 뿐만 아니라 그 주인공도 사실상 그의 부인과 딸을 포함한 그의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더구나 김낙중과 그의 가족이 겪은 고난의 세월은 분단된 우리 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음으로 해서 이 책의 주인공은 그의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진보적 실천의 길에 나섰다 고난을 받은 모든 이들이라고 해야 더욱 옳을 것이다.

그가 갈 곳은 남북의 철창 뿐

한국전쟁의 혈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55년 스물 다섯의 열혈청년 하나가 임진강 격류에 몸을 맡겨 북행을 시도했다. 북측에 전하기 위해 소중하게 몸에 간직한 것은 자신이 마련한 ‘통일독립청년고려공동체수립안’.

그의 불꽃같은 순수한 열정은 북쪽에서도 이해받지 못했고 남쪽에서도 이해받지 못했다. 결국 그가 갈 곳은 남북의 철창 속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간첩’ 전력은 1964년, 73년, 92년으로 이어지며 모두 4차례 18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평범한 시골 교사로 김낙중을 만난 부인 김남기는 사랑하는 이의 사회정치적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수난의 배에 동승하게 됐고 이후 40여 년을 오롯이 ‘간첩 가족’으로서 모진 생활의 풍상을 겪어야 했다.

이 같은 특별한 부모 밑에서 자라난 맏딸, 저자는 어머니가 18살 때부터 써온 일기장을 들춰가며 4년간 일상의 피로를 이겨내며 밤을 도와 아버지의 일대기이자 가족의 고난에 찬 여정, 아니 우리 현대사의 한 귀퉁이를 엮어냈다.

내밀한 가족사를 통해 읽는 우리 현대사

엄혹하고 우매한 시대 상황이 그러했고 김낙중이라는 매우 독특하고 ‘무모한’ 인물이 그러해서인지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쓰라린 고통의 가족사는 독자들의 가슴을 짓누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그저 수난당한 자들의 고통의 기록으로만 기억되지 않는 이유는 때로는 울리고, 때로는 웃기는 살아있는 인간의 내밀한 희로애락과 역사발전의 도도한 물결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 앞에 당사자인 김낙중의 평범하지 않은 삶과 조선여인의 질긴 생명력으로 가족을 떠받쳐 가는 부인 김남기의 헌신, 힘겨운 부모의 삶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자신을 성장시켜 가는 자녀들의 모습을 이렇게 손에 잡힐 듯이 내밀하게 묘파한 글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정작 작가가 시도한 것은 자신의 아버지와 가족들이 겪은 고난에 찬 가족사를 현대사 속에 재조명해내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독자들은 저자의 안내에 따라 김낙중이라는 한 인물과 그의 내밀한 가족사를 통해 우리 현대사의 발자국을 함께 따라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탐루(探淚)', 눈물을 찾는다

그렇다면 본인은 물론 가족들에게 이토록 엄혹한 시련을 안긴 김낙중 그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저자는 아버지가 역사 속에서 간첩이 아닌 신념에 찬 ‘평화통일운동가’로 평가받기를 바랄지도 모르겠지만 김낙중이라는 한 인물이 사형선고를 받아가며 4번이나 간첩으로 투옥된 이유에 대한 답은 이 책의 제목 『탐루』에 담겨있다.

“머리를 빡빡 깎고 하얀 한복 차림으로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며 눈물을 가진 사람이 없느냐고 외치는 한 청년. 사람들은 아버지를 미친놈이라며 쫓아냈다.”

그는 임진강을 건너기 전에 이미 ‘탐루(探淚, 눈물을 찾는다)’라고 쓴 등불을 대낮에 켜들고 포연이 가시지 않은 부산 광복동 거리거리를 헤매고 다니며 외쳤던 것이다.

그런 그가 회갑을 훌쩍 넘겨 네 번째로 거물급 고정간첩이라는 죄목으로 92년 대통령선거를 목전에 두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건은 북에서 온 사람들을 1년 넘게 수십 차례 만나며 통일에 대해 논의하고 자금을 받은 일이다.

“저는 분명히 여러분이 악마로 생각하는 북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1955년 사선을 넘어 평양에 갔었던 사람이고, 또 1990년 2월 이후 평양에서 온 그들을 상대로 회합.통신 등의 행동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북한 사람들을 악마로 대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들을 우리와 똑같은 동포 형제로 대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머니가 지켜낸 것은 ‘평화통일 불씨’

김낙중 본인이야 남다른 신념과 열정, 무모할 만큼의 실천을 후회하지 않겠지만 정작 고난을 함께 겪어야 했던 가족들의 속내는 어떠했을까?

저자는 “우리 식구가 아버지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뛰어다닌 까닭은 아버지를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아버지’이기 때문”이었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그러나 “대책위 일을 하면서 아버지에게 닫혀있었던 내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저자는 마침내 “어머니에게 던져진 고통은 분단의 고통이었다. 어머니가 흘린 눈물은 암울한 우리 현실을 향한 통곡이었다... 어머니가 지켜낸 것 역시 단순히 ‘한 가정’이 아니라 ‘민족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불씨’였던 것”이라는 결론에 이름으로써 그들의 가족사가 더 이상 자신들만의 가족사에 머물지 않게 된 것이다.

특별한 자신의 가족사를 현대사를 아우르며 최대한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써내려는 저자의 의도가 돋보이는 이 책은  다소 저자의 역사인식의 제한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소중한 책이라고 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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