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태(의학박사, 치과의원장)


이 기고는 지난 10월6일부터 3박4일간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 기념식 참관을 비롯한 평양 개성 육로관광에 관한 소감을 적은 네 번째 방북기입니다.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기념 남북농구대회 장면. 북측은 응원에서도 6.15공동선언을
크게 강조하였다. 이 카드섹션 팀의 일부가 대구U대회때 왔었다. [사진제공 - 이병태]
노랑머리와 짧은 치마


안내 李선생과 나는 주체사상탑에서 대동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제 말이오. 거 노래하던 젊은이들 노랑머리 어캐(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았어. '베이비 복스'라고 노래하는 구루빠('그룹'의 북한, 러시아식 발음) 말을 하시는군. 그리고 엉덩이가 반은 보일 만큼 짧은 치마 입은 것 보고 조금은 눈에 벗어나 보였을 꺼야."

안내 李선생이 궁금해하는 구석구석은 묻지 않아도 내가 다 이야기해 주었다.

"원래 그 처녀들 말야, 배꼽과 허리를 내놓는 상의를 입어야 하는데 아마도 여기가 평양이라서 그것만은 여기식대로 한 것 같더라구. 서울서는 여름이면 젊은 여성들이 윗도리나 바지 사이에 한 뼘씩이나 보이도록 입거나 살짝살짝 보이도록 입고 다닌다구.

참, 노랑머리 물어봤지. 남 얘기말고 내 집안 얘기할께. 지금 아홉 살 난 큰손자 녀석이 여섯 살때 하루는 '할아버지' 하면서 오는데 보니까 앞머리 한 주먹만큼 '노랗게' 물들였더라구.

'야아' 이걸 야단치나 마나. 그냥 '아 보기 좋다' 했지.

한 일년 하더니 안하더라구. 내가 그랬거든. 염색을 자주 하거나 많이 하면 피부병이 생길 수도 있다구 말야. 할아버지가 의학박사니까 이 놈이 알아들었는지 요즘은 안해. 그런데 요즘은 둘째 손자 놈이 또 뒤통수 머리꼬리 하고 다니는데 그만 둘 것 같더군. 하여튼, 가정부인들까지도 해. 노랗게, 빨갛게, 보라색 또는 갈색 뭐 여러 가지야.

나도 처음에는 뭐 저런 게 있나. 아주 어색하고 어떤 때는 역겹게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르다보니 그냥 그런가보다 그렇게 여겨지더군. 나와 관계없으니 뭐라고 할 수 있겠어? 이해가 되겠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머리를 염색하고 꾸며주는 사람들이 그걸로 돈을 번다 이거야."

그는 강 건너편 인민대학습당을 바라보면서 듣고만 있고 나는 계속 말했다.
"내 머리가 반백이 넘어 백발이 되다시피 했는데 李선생은 머리가 까맣고 손질을 잘했군 그래."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자 그는 눈을 흘겼다. 나는 또 해댔다.
"여보 李선생 내 육십이 갓 넘었다. 은여우 꼬리만 하게 꼬랑지 머리를 길게 늘이고 다니는데 의문이 많이 가지? 그런데 묻지 않는걸 보면, 李선생이 나보다 한 수 위야!"

"긴데(그런데), 머리가 길긴 길어."
"그래, 맞아. 내 나이 육십이 넘은 주제에 말야."

이쯤 되자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말을 계속 듣겠다는 눈치였다.

"李선생. 나는 처음부터 빨강 넥타이를 매고 다녔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 곧 검정 넥타이를 매고 다녔지. 그런데 주례(알아들었는지 모르지만)도 해야 하고 남의 결혼식장(잔치)에도 가야 하는데 주위에 어울리지가 않는 거야. 석달 열흘(100일)을 지내고 나서 다시 빨강 넥타이를 매고 그대신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모른 척할 인간이 어디 있겠나. 2004년 2월이면 3년째야. 그때면 짤라야지. 그런데 다 짜르고 싶지는 않아."

"어째?"
그는 의심쩍다기보다는 인간적이고 시대적인 그 어떤 흐름을 기록하는 것 같았다.

베이비 복스의 노랑머리와 나의 반백 '포니 테일'(꼬랑지 머리)에 관한 그의 의문이 얼마나 풀렸을까, 그리고 이해 정도가 얼마일까는 알 길이 없다.


평양의 '트위스트'와 '아, 옛날이여'


이 제목이야말로 세대와 이념 그리고 지역을 생각하게 한다.

이날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기념 축하공연에서 흔들어댄 남측 가수들을 북측 참관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짐작컨대 좋아하는 측과 그렇지 않은 측이 있다고 본다.

공연내내 나는 내 건너편의 북측 응원단과 참관단들의 표정을 보았다. 북측 참관단들은 조용했다. 내 옆의 안내 李선생도 그러했었다.

▶태극기와 인공기 대신 한반도기(단일기)를 세워 놓고 아리랑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무대. '베이비 복스', 설운도, 이선희, 조영남 등 남측 출연자들이 보인다.
[사진제공 - 이병태]
"여보 李선생. 거 젊은 친구들(베이비 복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뒹굴고 하는 것, 영 보기 싫었겠지. 지랄발광 한다고 말야. 李선생 어땠어. 나도 옛날에 대학에 들어가서 기타 치고 트위스트 추면서 뛰고 놀았다구.

그때 같이 놀아주던 2년 선배가 '세계치과의사연맹'(FDI) 회장이 됐다구. 그때(1960년대 초)는 트위스트가 유행했어. 그런데 내가 기타를 치고 반주하면 노래하고 놀았거든. '왕릉'에서 말야."

"왕릉?"

내가 치의예과 때는 동구능 서오능 등 이런 곳이 여가를 즐기는 곳이었다. 왕릉 위에서 뛰고 노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왕건왕릉에서 밥을 먹고 난 다음에 기억을 되살려서 다시 얘기해 주었다.

"앞전에 李선생이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기타를 치는데 손톱으로 치는 것이 아니고 '피크'라는 것으로 쳤지. 내가 칠 수 있는 것은 '댄스 위더 기타맨, 범블비 트위스트, 파이프라인, 아파치' 등이었어. 사실 조금만 더 했더라면 악단에 기타 연주자로 나갈 뻔했지. 당신 막내처럼 말야."
"......?"

안내 李선생은 말이 없지만 그는 내가 말하도록 유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내 기분에 이야기했다기보다 남측의 가수들이 한 것에 대해 보충설명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말야. 안내 李선생. '설운도'라는 가수가 '샹하이 트위스트'라는 노래를 부른 것 생각날꺼야.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내가 그렇게 놀았거든. 내가 대학에 들어와서 이렇게 놀 때, 그때에 지금 李선생이나 내 나이 든 분들은 '세상 끝났다', '망했다' 했거든. '동방예의지국'에서 말야. 여기(평양)서 '집체'라거나 '단체'로 하는 춤을 우리는 '포크댄스' 또는 '사교 춤'이라고 하는데, 꼭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고 할 수 없지. 장점과 단점이 있으니까."

나는 내가 하는 말을 안내 李선생이 많은 부문을 이해할 것으로 믿고 말을 '막' 그리고 많이 말했다.

"李선생. 내가 기타를 쳤는데, 1960년부터 1962년까지 이때는 악단연주자로 나갈 정도로 쳤다구. 눈감고 Am, Dm, A, F 등을 집는데 어려움이 없었거든. 그런데 나는 치과의사(구강과 의사)가 되야 했어. 그래서 손을 뗐지.

여기도 그렇겠지만 남측에서는 의과대학이나 치과대학 졸업하려면 개인적으로 돈도 많이 들지만 공부도 힘들고 시험도 많고 정말이지 청춘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것 같은 시절이거든. 그러다가 치과의사질 하다보니 나이가 이렇게 됐다구. 어느새 며느리도 손자 손녀도 생겼다 이 말야.

李선생. 남측 남자 가수 '설운도'가 부른 '샹하이 트위스트' 같은 것은 당신이나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 때 막 유행하던 것이야.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기념 공연때 나는 뛰어 나가 흔들고 춤을 추고 싶더라구.

그런데 그렇게 해봐. 그러면 '저 친구. 아니 저 노인이 나와서 주책 떠누만' 했을 꺼라구. 발바닥 비비고 무릎을 꼬면서 두 손을 옆으로 흔들면서 말야. 그리구 남측 여성가수 '이선희'라고 있었지. 'J에게'라는 노래를 불렀고 '아 옛날이여'를 불렀는데 생각날 꺼야.

李선생. 평양 여기 대동강을 내려다보면서 李선생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정말로 '아, 옛날이여' 하는 생각이 울컥 나는군. 지금은 아침이지만 저녁 노을에 대포(소주)나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으면 좋겠네."

버스는 李선생 그가 타야 떠났다. 우리는 개선문으로 향했다.


"거, 신 없나?"


"거, 신 없나?"

다음날 아침 그가 나에게 던진 첫 인사였다. 인사라기보다는 시비 비슷했다. 더 이상 친할 수 없는 그런 농담이었다.

검은 중절모, 무테안경, 검정양복(상하), 흰 와이셔츠, 빨강 넥타이, 까만 양말, 이런 상태면 검정 구두를 신었어야 한다. 모든 신사 숙녀들이 다 검정색 신을 신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 일찍 서울 우리집 현관에서 '검정 구두'를 신고 갈까, 아니면 캐주얼한 고동색 구두를 신고 '검정 구두'를 여행가방에 넣고 갈까, 하면서 망설이다가 순간 '짐을 줄이자'는 쪽으로 결심하고 신은 내 구두를 보고 안내 李선생이 시비(?)를 건 것이다.

▶버스안에서의 안내 李선생의 옆모습. 가운데에 '충성의 다리'에 세워진 한반도를
표상하는 '3대헌장기념탐'이 보인다. 李선생은 "우리가 저 다리(충성의 다리)를 건너
밀고 내려가갔다는 게 아니구, 여러분들 이렇게 오시구 가시라구 세운기야"하고 말했다.
[사진제공 - 이병태]
사실, 나는 허약한 체력을 보강하려고 대학에 들어오면서 등산, 암벽등반을 지독하게 하였다. 오늘날까지 내가 버티는 것은 산에서 수련했던 젊은 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평양에 신고 온 구두의 색은 고동색. 이 구두는 신사화처럼 생겼지만 자동차로 말하자면 벤츠 같지 않고 탱크 같다. 그리고 고동색 구두 표면이 긁히고 허옇게 까져서 남의 눈에 띄기 쉽다. 그러나 발이 얼마나 편한지, 아무도 모른다. 이것은 내가 등산에서 느낀 노하우였다. 하여튼 등산화는 아니었으나 행사장에서 정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구두였다.

"아니 헐어서 까지고 벗겨진 신을 신고 왔구만. 신 없나?"
나는 다정하게 듣기도 했지만 내게 말을 많게 하는 질문이었다.

▶자동차로 말하자면 벤츠같지 않고 탱크 같은 필자의 신발.
[사진제공 - 이병태]
"미안해. 내 정장에는 안맞지만 그냥 다닐 때는 좋아. 서울서는 '너 왜 그런 신을 신었냐' 이렇게 잔소리하는 사람 하나도 없는데, 평양 오니까 李선생이 지적하는구만. '당이 나한테 그 구두 신지 말라' 하지 않았거든. 그런 말 못들었단 말야."

"길지(그러지) 마라. '안전부'로 갈끼야?"

안내 李선생, 그는 내게 이런 정도로 말을 했다. 죽마고우(竹馬故友)처럼, 지극히 험한 어투지만 격의 없는 대화를 가졌다.

"야아, 붙잡아 가지 말라. 나는 약해. 나는 이제까지 싸운 적이 없어. 그냥 말로 하자."
"그래 이번에 방북했으니까니 내 참고하지. 사람 시켜 붙들라 할까?"

"정말, 그러지 말라구. 붙들어다 패면 난 못살아."
그는 웃었다.
"걱정 말라우. 여기 동무들 '이발'(이빨)좀 하고 내 이도 좀 고치고 그러구 지내라우."

여럿이 듣고 있었지만 아슬아슬한 대화였다. 휴전선, 철조망을 넘어 평양에 와서 이런 이야기를 옛친구처럼 대하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정도로 이상했지만 현실이었다.

안내 李선생이 내게 '공안', '안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말 파격적이었다.


런닝 셔츠 사건(1)


사건이라고 해서 범죄나 시사성이 있는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나는 땀을 잘 흘려 런닝 셔츠를 여름이면 하루에도 한 두 번 갈아입곤 한다. 점심때 뜨겁거나 더운 음식을 먹으면 머리와 가슴에 땀이 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여행이 계획되면 여행 날짜+α의 런닝 셔츠를 챙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코감기로부터 기관지염까지 직행하는 약질(弱質)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입은 것 외에 세 개를 가지고 떠났다.

방북 3박4일은 참으로 힘들었던 시기였다. 속담에 '시집갈 날 잡아놓고 등창 난다'는 식으로 평양에 오기 전 10월3일(개천절)에 밭과 뜰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낫질도 하고 삽질도 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 됐는지 목이 아프고 열이 나는 듯하면서 상태가 좋지 않았다. 평소에 나는 남들처럼 건강을 위해 하는 골프라거나 헬스 트레이닝을 하지 못한다.

나는 광화문에 내과전문의 K원장에게 진료와 처방을 받아 그 약을 가지고 여행(?)을 떠난 것이다. 그래서 입국카드에 항생제, 진통해열제, 소염제, 영양제 등을 자세히 쓰기도 했다.

방북 첫날 하루동안에 런닝은 벌써 세 번 정도 젖었었다. 그러니 새 런닝 셔츠를 입고 자려면 런닝 셔츠 수가 모자라게 되었다.

내 룸메이트는 손아래 동서였다. 금강산도 두 번이나 같이 갔고 나를 많이 이해하는 입장이었다.

"형님, 런닝 빨지 말고 시켜요."

사실 나는 결혼해서는 빨래를 해본 적이 없다. 동서가 이런 말을 하는 동안 룸서비스 여성이 드라이어를 들고 왔다.

"보세요. 이거 형님이 물 묻혔는데 이것 좀 빨아다 주슈."

비닐에다 내 젖은 런닝 셔츠를 넣어 주면서 李사장이 부탁했다. 나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구입한 서적을 들척이는데 벌써 동서는 코를 골았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나도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나는 추워서 웅크리고 있었다. 새벽 4시였다. 나는 다시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쥐죽은듯이 절대 안정을 취했다. 아프거나 몹시 피곤할 때면 '나죽었다'는 식으로 잠자듯 누워 있는 것이 내 지상의 요법이기 때문이다.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모닝콜 벨소리가 울렸다. 사실 잠들기 전에 동서 李사장과 스위치 이것저것을 만져서 뭔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도 하였다. 나는 약을 먹고 자서 체력의 상태를 걱정했으나 양호한 편이었다. 샤워를 했으니까 말이다.

"李서방, 이게 뭐야?"
"아 형님, 형님 런닝이예요."

와이셔츠 다리듯이 해서 곱게 접어 우리가 자는 동안 놓고 간 것이었다.
"우와, 나는 한번 더 갈아입을 수 있다."

이럴 수가 있을까. 너무나도 기뻤다. 더 더욱이 룸서비스 여성이 극구(極口)로 사양하였으나 동서 李사장이 사례를 했다는 것이다.

"나 추워서 잠을 깼어. 새벽 4시야. 그래도 그냥 웅크리고 또 잤지."
"아. 형님! 저기 이불 카시미롱, 저기 있잖아요. 오늘 밤에는 저거 더 덮으세요."


런닝 셔츠 사건(2) 그리고 빨강 양털 담요


평소에 뜨거운 점심만 먹어도 젖는 런닝 때문에 늘 걱정이다. 그래서 런닝을 준비해 두었다가 갈아입곤 한다.

여행중에도 마찬가지여서 아내와 같이 가면 그런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는데, 더욱이 목감기 약을 먹는 중이어서 이번 방북 3박4일 동안 런닝 셔츠와 팬티 때문에 신경을 많이 썼다.

나는 그냥 쇼핑센터나 기념품상 또는, 백화점만 다니는 단체 관광은  다니지 않는다. 그런데 북측에서는 너무나도 그런 것이 없다.

자본주의와 돈에 되바라진 사회의 잣대로 본다면 다소 뒤떨어 졌다고 보겠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순박하고 고요하다고 표현하면 좋다.

▶파란색 한반도 그림에 '하나'라고 쓰여진 런닝 셔츠. [사진제공 - 이병태]
우리 18번 버스는 일정에도 없는, 공식 기록에는 없어도 내정되었는지는 몰라도 '금강산 상품점'에 들렸다.  나는 잽싸게 파란색 한반도 그림에 '하나'라고 쓰여진 런닝 셔츠를 찍었다.

"보시오. 저것 세 개 주시오."
그런데 점원이 왔다 갔다 하면서 재고가 없는지 걸려 있는 것을 주었다.
"어쩌나 이것 밖에 없는데......"

그날 저녁 나는 예비 런닝 셔츠 수를 생각해서 상점에서 사온 한반도기 런닝 셔츠를 입고 자려는 참이었다.

"이 서방, 오늘 산 런닝 셔츠 보았지. 야, 런닝 셔츠를 사다니."
동서 李사장은 봉제 섬유 방면에 밝은 사람이다. 
"형님, 잘되었구려. 런닝 여유가 생겼으니."

아니, 이게 웬일인가. 포장 종이를 뜯고 침대위에 펴는데, 내가 본 한반도기에 '하나'는 등쪽이었나 보다. 앞가슴에 화투짝만한 '인공기'가 인쇄되어 있었다. 순간, 내 머리에는 20년전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있었던 일이 확 떠올랐다.

그날 저녁 샤워를 하고 무심히 가운을 걸친 채 거울 앞에 섰을 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어찌나 일인(日人)처럼 똑같이 보였던지, 얼른 벗고 그냥 런닝과 팬티 바람으로 있던 생각이 머리를 스친 것이다.

'인공기'가 있는 런닝을 빨아 달라고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옷걸이에 걸어 상점에서 한반도기가 보이도록 걸어 놓은 것처럼 해놓고 캐시미어 양털 이불을 가져다 덧덮고서 잠을 청했다.

등산, 군 생활, 단체여행... 일상에서 매일 아침은 나에게는 늘 시련이었다. 평양에서도 마찬가지였으나 두툼한 양털 이불 덕분에 따뜻하고 푸근하게 잠을 자서 유쾌하였다.

어느덧 그날도 하루의 행사를 마치고 호텔방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게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이제까지 여행을 다녀도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침대에는 그 새빨갛고 포근한 캐시미어 양털 담요가 보기 좋게 아주 포근해 보이도록 덮여 있었던 것이다.

장가들고 처갓집에서 처음으로 자던 날 장모님이 펴 주었던 포근했던 솜이불과 신혼초의 잠자리가 느닷없이 떠올랐다.

"형님! 거 보슈. 글쎄 가는 정 오는 정 이라니깐. 으하하하. 이젠 런닝 걱정 버리슈."
호탕하게 웃는다.

순간 내 머리에는 어머니, 고모, 이모, 장모, 아내... 나를 극진히 아껴준 얼굴들이 스쳐가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 또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대동강을 내려다보았다.


"열한시까지는 했나"


방북 첫날 나를 알아본 안내 李선생과 저녁에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희망을 억제하였다.

"여보시오, 안내 李선생, 오늘 저녁에 내방으로 오던가 아니면 내가 그 방으로 가던가 합시다."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웃기만 했지 답이 없었다. 나는 우리 현대아산 '나'조 직원 방과 금강산 사랑운동 본부 李대표의 방 전화만 적었을 뿐이었다. 3박4일 동안 행사장에서 치과의사, 산악인, 친지 등 여러 사람들을 만났지만 호텔방과 방을 연결하면서 만나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호텔을 나서자 저 쪽에서 벌써 손을 흔들어 보였다. 조금 춥게 자기도 했지만 몸 컨디션이 좋아진 느낌이어서 아주 상쾌했다.

"어제 11시까지는 했겠는지."
아차, 나는 두 가지로 생각했다.  '11시까지 기다렸다'는 것인지, 아니면 '방에 들어가더니 나오지도 않느냐'는 것인지, 둘 중에 하나였을 게다.

"11시까지 마실 거면 왜 마시나. 밤을 새워가며 마셔야지."

또 다음날 아침이었다.
"그래, 한 두시까지 마셨는가?"
"뭘 마셔. 내 몸 못 봐?"

▶양각도 국제호텔 '스카이 라운지'에서 내려다 본 풍경. 위로부터 양각도 축구장, 평양
국제영화관, 골프장(9홀)이 있다.  [사진제공 - 이병태]
사실 47층의 돌아가는 '스카이 라운지'와 지하에서는 매일 밤 담소와 취기가 연속되었다. 얼굴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 다음날 아침이다.  안내 李선생이 눈을 흘끗하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는 두세 시까지 했겠는지!"

47층 스카이 라운지나 지하 시설에서 한잔씩 하거나 담소를 나눈 자리가 있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두세 시까지 할 것 같으면 왜해. 밤새우고 그냥 놀아야지."

사실, 첫날 호텔에 도착하면서부터 '저녁에 나하고 한 잔 할까? 만나자' 했지만 안내 李선생이 얼마나 바쁘고 힘들겠나 싶어서 내 생각에는 그에게 죄송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뻥'을 치거나 '거짓'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뜻밖이었던 안내 李선생의 본성은 하늘을 나는 학과 같고 물속을 노니는 물고기와 같다고나 할는지. 나는 계속 그에 관한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 없다.

오른쪽으로 사리원 비료공장(카리공장)을 지날 때, 앞 좌석 몇몇이 들을 수 있는 분위기에서  李대표가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어제 밤에 말입니다... 스카이 라운지에서 술값 때문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대번 물었다.
"아니, 싸웠어요? 누가 다쳤어요?"

그런게 아니었다.
이 사람 저 사람 모이고 사회 각계 인사들이니까, 이 자리에서도 한잔, 또 저 자리에서도 한 잔 하다 보니까, 어느 테이블에서는 정작 술값을 낼 사람이 지정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남측 북측 가이드들도 동원돼서 해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했다. 누구에게 묻지도 않았다.

"여기 와서 술값, 돈문제로 체면들을 구기면 어쩌나!"하고 내가 안타깝게 말했다.

그때 李선생이 한 마디 했다. '당'의 지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안내 李선생의 말을 듣고 너무나도 놀랐다.

"술값? 그거 고의적이 아니고 악질적이 아니니까니 일 없어. 일 없다고."
나는 중얼거리듯 독백처럼 '그런 일이 있었구나' 했더니 안내 李선생은 즉각 입을 열었다.

"술 먹다 보면 그런 일도 있지 뭘 그래."
역정을 내려는 나에게 오히려 '덮어두지 뭘 그러느냐며 오랜 동네 친구의 허물을 덮자는 식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다.

▶서울 '남대문'이 불쌍했는데 평양  '보통문'도 불쌍했다. 왜냐하면 '교통섬'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일제 강점기였을게다. [사진제공 - 이병태]

"치과의원 큽네까"


나는 3박4일간 '이병태 치과의원, 원장 이병태'라는 글과 컬러 사진이 박힌 목걸이를 달고 다녔다.  안내 李선생이 내게 넌지시 물었다.

"치과 큽네까?"

이 질문이야말로 내 본색(本色)을 묻는 것이고, 이 대목이야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말하고 싶은 것이었지만 상대 李선생은 적절한 상대도 아니고 상황 또한 부적절하였다.

그러나 나는 적극적으로 대답하고 설명하였다.
"크지 않아. 여기하고는 다르니까. 내가 하는 거야 국가적인 것이 아니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그동안 펼쳐왔던 북측과의 교류가 아주 어렵고 불가능했고, 활발히 가동되지 않는 안타까움이 앞서는 마음을 억누르고 있다. 다만 현재 남측에서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북측을 지원하려고 하는 데에 장애가 있고 그래서 정체된 업무가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일념으로 쓰고 있다.

그래서 안내 李선생에게 이야기했던 것보다는 좀더 자세한 구석들이 있다.

1977년에 의료보험이 시작됐지만 치과의사인 내가 대학, 대학원(석사, 박사), 치대 부속병원(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보장제도, 의료보험제도, 사회주의 국가의료체계 등에 관해 한 시간도 강의를 받거나 귀동냥을 한 적도 없었다.

이러한 지경에서 나는 북한과 중국의 의료제도를 알고 싶었으나 분위기가 허락하지 않았다.
1980년 나는 미국 치과의사 한 사람이 중국 관광길에 중국치과계를 소개한 글을 읽고 흥분했고 이 흥분은 10년이 지나 1990년에 북경과 연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과 국교가 없었을 때였으므로 나는 말하자면 '밀입국'이거나 '잠입'이었다.

정치적 특사도, 큰 뜻을 품은 사회적 시민운동가도 아닌 나는 매년 한 두 번씩 중국을 다녔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심천, 광주, 우루무치, 난주, 제남, 북경, 심양, 장춘, 길림, 연길, 도문, 훈춘 등 이 모든 곳의 치과병원 또는 치과시설을 둘러보았다.

이전에 방문한 미국, 일본, 유럽의 치과시설과 우리나라 치과시설을 머릿속에 비교할 수가 있었다.

북한은 어떨까.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은 중국보다도 한국보다도 잘 사는 나라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상황이 역전되었다.

"안내 李선생. 나는 이미 북측의 의료제도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제도라고 남측에서 방송한 적이 있지. 제도는 나무랄 데도 없이 좋다 이거야. 그런데 내가 알기에 그 실상은 조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그렇게 알고 있다 이거지.

그래서 나는 남측에서 북측 지원 활동에 가담하고 앞장서고 있는데, 내가 하려고 하는 치과, 구강과는 의사에 치이고 건설, 토목, 전기 이런 사업에 말려서 힘을 못쓰고 있는 실정이라구.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겠는지..."

"긴데(그런데), 이가 중요하긴 중요한데 말이지."

안내 李선생은 내 말에 오랜만에 맞장구를 쳤다. 李선생은 건강에 '먹어야 한다'는 기본을 확실하게 느꼈던 것 같았다.

"여보, 안내 李선생. 서울서 내가 꾸리고 있는 치과는 내가 나 혼자서 개인적으로 하는 병원이야. 그러니까 李선생이 와서 치료받고 갈 때 돈을 내면 전부 내 것이지. 그런데 그 내 것중에서 내가 한 전문치료비, 약값, 재료비, 복무원(직원) 월급, 전기료, 수도료, 회비, 축하비, 세금... 이런저런 많은 것을 떼어내고 빼야 진짜 내 돈이 남지.

그런데 남측에서는 '세금'이 쎄지. 이것이 '사람 죽인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지. 몇 년전까지만 해도 한강 하류 개성쪽 산등성이에 '오라, 평양으로', '세금없는 나라' 등 이런 구호를 남측에서 볼 수 있도록 써놓았던 것이 생각나는군. 하여튼 사람들이 많이 와서 치료를 받고 가야 그만큼 나도 여유가 있게 되지."

안내 李선생은 그냥 듣고만 있었다.
"여보 李선생, 중국 연길(옌벤) 가 보았오?"
"아니 못갔오."


안내 李선생에게


李선생이 정말 못간 것인지 알 길이 없으나 그대로 믿고 북녘 평양과 개성을 오가면서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한 말들을 쓰고자 한다.

李선생, 나는 '당원'도 '공무원'(국가 일꾼)도 아니거든. 그런데도 나는 중국 '연변 조선족자치주 제2인민병원'과 10년이 넘도록 관계를 가지고 특히 구강과에 지원을 하고 있지. 매년 들러서 서로 토론하고 또 거기서 서울로 나오면 내가 접대하고 안배하면서 지낸다 이거요. 내가 연길에 가면 위생사업 간부들과 병원장 그리고 의사들 만나서 발전적인 이야기를 나누곤 하지.

▶왼쪽이 필자, 왼쪽에서 세번째가 안내 李선생. [사진제공 - 이병태]
그런데 이런 관계가 평양이나 개성과는 전혀 되지 않고 있으니 이게 문제지. 북측과 상대하기가 어렵고 복잡하고 그리고 약속대로 되지 않고, 약속을 하려면 나같은 개인은 불가능하다 이거야.

그런데 중국은 그 과정을 벌써 거쳤거든. 다른 방면 말고, 우리 방면만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까운 게 많아. 정치는 정치대로 하면서, 개인들은 개인들끼리 접할 수 있어야 하는데 李선생도 알 듯이 이게 글쎄 꽉 막혀 있다시피 하거든. 이런 가운데 지극히 제한적이지만, 이번처럼 오가는 현실이 발전되고 개선되는 것이라고 믿고 싶어.

북측 치과의사가 남측 환자를 치료하고 남측 치과의사가 북측 환자를 치료하고, '일인(一人)은 만인(萬人)을 위하고 만인은 일인을 위하는' 방식을 취할 때가 이미 와 있다고 보는 거야.

지금 남측의 치과 진료대들이 몽골, 카자흐스탄, 우즈벡스탄, 베트남 등 많은 나라로 가서 무료로 자비로 활동하거든. 이런 것을 보면 가슴이 찡 하단 말야.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어느 나라보다도 북측이 가깝고 친근해야 하는데 정반대니 말야.

하여튼 나는 연길시의 조선족 치과의사들과 주 위생사업 일꾼들과 매년 만났지. 내가 갈 때마다 서울에서 사용하는 여러 가지 기구, 약품을 그냥 가지구 갔어. 돈으로 치면 꽤 된다구. 비행기 타고 가서 먹고 자는 것도 내 자비로 다했다 이거요. 남이 보면 '미쳤다' 하겠지만 글쎄 두고 보면 알꺼야.

지금 와서 보면 연길의 모든 정황은 서울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확 변해있어. 사람들 입고 신고 먹고 자는 것, 길거리 자동차 왕래, 시장과 백화점, 도로와 건물, 전기와 수도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발전했다 이거요. 불과 10년 조금 넘는 사이에 말이오.

내가 다니기 시작했지만 지금 내 후배 치과의사들은 상호 병원건설을 본격적으로 꾸리면서 사업을 크게 벌리고 있거든. 호상간에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사업을 꾸린다 이거요. 지금 북측과도 그런 정황으로 가자는 것인데 잘 안돼. 너무나 문을 닫아 놓고 있다 이거야. 이제는 숨길 것이 없군 그래.

남한 치과의사들이 북측 동포들을 치료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그럴 수가 없으니 우리(남측)의 시설과 장비를 보내서 꾸려 놓고 북측 인민들의 구강병을 치료할 수 있도록 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런 부분적인 합의는 김일성 주석의 지시로 결정된 바가 있어서 '평양치과병원'이 건설중에 있는데 10년이나 가깝도록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 알고 있을거야. 나도 간접적으로는 관계가 있거든.

그뿐인가. 나에게 '남북치의학 교류협력위원회'라는 명칭이 있는데 이것은 남측에서 그야말로 나같은 개인(개체)끼리 만나서 만든 모임이거든. '당'이 시키거나 '조국'도 '나라'도 그 누구도 시키지 않은 아주 순수한 개인적인 동맹이거든. 이런 동지들이 나서서 북측 구강과 부문을 지원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그런데 잘 안되더라구. 그래서 맥놓고 있는 실정이지.

잘 안되는 것이 연락(통신, 전화)이 불가능하고, 내가 하는 것은 우리들(개인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 호주머니 돈을 쓰는데 서울-북경-평양, 평양-북경-서울, 이런 식으로 왕래해야 하는데 주로 북측에서 계획과 시간을 바꾸기 때문에 우리 같은 개인들은 날짜가 변경되면 아주 힘들고 어렵거든. 큰 사업가(예컨대 정주영 명예회장)이라거나 큰 정치인(예컨대 김대중 대통령)이면 몰라도 특히 생업(生業)에 종사하는 사람(인민)들은 힘들어.

▶한강 하류가 개성(위)과 김포를 경계로 흐르고 있다. [사진제공 - 이병태]
안내 李선생은 짐작은 하는지 모르겠으나 남과 북에 삶의 차이가 있음에 대해서는 전 세계가 알고 있고, 우리들은 그것을 크게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구료. 남측보다 잘 살던 북측이 아니었나 말이요.

안내 李선생. 이곳에서는 나같은 사람뿐 아니라 어떤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그리고 돈만 마련되면 세계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는데 오로지 북측(평양)만 그렇지 못하여 참으로 안타깝구료.

이 글을 마치자니, 짧았지만 같이 했던 추억들이 한여름의 창공에 떠오르던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릅니다구려.

내가 평양에 체류하는 동안 평양 밤거리가 캄캄하여 내 마음도 어두웠어. 달이라도 떴더라면 李선생과 호텔뒤 뜨락에서 대동강에 비친 그 달을 내려다보면서 소주라도 한 잔 하였더라면 하는 꿈같은 생각을 하며 지내는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리정수 仁兄.
만날 때까지 안녕히.


'로동신문' 스크랩에 쪼든 나
이래서야 어찌 自由를



평양에서 매일 아침에 내가 들었던 호텔방 앞 복도 테이블에는 '로동신문'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것도 무료였고 나는 빠짐없이 가져다 보았다. 신문에는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에 관한 기사가 계속 나왔다. 아울러 대표단들의 사진과 행사관련 사진만 초등학교 졸업앨범의 기념사진처럼 게재하고 있었다.

이 '로동신문'을 모아놓고 있다가 막상 짐을 싸면서 걱정거리가 생겼다. '로동신문'을 가져가려니 이것은 남측에서 문제가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남과 북 갈등이 곧 나의 갈등이 된 것이다. 결론은 '로동신문'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식 등을 알리는 북측 '로동신문'.  [사진제공 - 이병태]
스크랩을 하던 나의 평생습관은 평양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내가 치과대학을 다니던 1960년대, 그 중반에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서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만드는 <치대신문>에서 기자로 시작해 '편집인'이라는 자리에도 있었다. 발행인은 학장(李永玉교수), 인쇄인은 학생과장(劉鐘德교수)이었고 나는 본과3년 학생이었다. 이 두 분은 필자에게는 하늘과 같은 은사이시다.

이러한 나의 경력은 '신문을 보는 눈'(眼目)을 키웠다. 신문을 들면 먼저 한눈으로 면 전체를 본다. 짜임새를 보는데 이것을 일본말로 '와리쓰께', 우리말로 '조판/편집'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제목(타이틀, 미다시), 그 제목들의 가로 세로(요꼬/나까), 그리고 그 제목들의 크기와 사진들의 위치, 광고 등 이런 것들이 포괄적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늘 한눈에 들어와 내가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연습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신문지면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지면이 꾸려진 상황을 보는 습관이 꽉 박혀 있다는 뜻이다.

''로동신문'을 가져가는 것은 남에서 문제가 될테니 오려 가지고 가자.'

이런 순간적인 생각에 내 마음은 들떴다. 어지럽게 널려진 것들이 호텔방 바닥에 쫙 깔려 엉망인데도 마음이 편해지는 듯 했다.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에 관한 기사는 신문의 밑부분에 직사각형으로 실려 있었다. 접어서 꼭꼭 눌러 잡아당겨 찢었다. 칼이나 가위 없이 스크랩했다.

나는 국내의 어디나 늘 소형 다목적 등산칼(스위스제)을 가지고 다닌다. 거기에는 응급수술 칼도 달려있다. 이것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청소년시절부터 해온 산악활동에서 익혀진 습성이다.

그런데 9.11테러 이후는 비행기 탈 때나 외국 나들이 때 휴대가 불가능하여 놓고 다닌다. 그래서 허전하다. 거기에 늘 성냥개비만한 볼펜도 있다. 아주 우호적인 룸서비스 여인들에게 칼이나 가위를 빌려 달랬다가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그것도 그만두고 그냥 손톱과 손으로 스크랩을 했다. 스크랩을 하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런데 근심은 또 생겼다. 겁까지 났다.

지난 여름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에 왔던 북측 응원단이 탄 버스가 여천에서 대구로 올 때 비에 맞고 있는 김정일 위원장 현수막을 들고 '우리 장군님, 비를 맞으시면...' 울면서 안타까와 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 김정일 위원장의 이름 자(字)나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도 이것은 불경(不敬)이며,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는 사회에서 '로동신문'을 오린 것은 일단은 개운치 않다.

"여보, 이서방, 나머지 이 '로동신문'을 우겨서 휴지통에 넣었다가 문제되는 것 아냐?"
".... 글쎄. 우리에겐 아무런, 아무것도 아닌데."

짐을 쌌다가 다시 풀었다.
'로동신문' 스크랩은 <영.조.일 의학사전>사이에 껴있었다. 빼내어 한참 들여다보았다.

'아니, 북측 출판 의학관련 서적과 사전종류를 가지고 있는 나는 이미 보안법 위반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정말이지 이래 가지고서야. 북측 관광을 어떻게 할 수 있나. 북측 물건을 하나도 가지고 올 수도 없다는 뜻도 된다.'

쌌던 짐을 풀어놓은 채 스크랩에 해법을 찾았으나 별 방법이 없었다. 한가지 놓고 가면 그만이다. 이렇게 생각했으나 이것 또한 나의 신문 스크랩벽(癖)에 지대한 아쉬움만 남는다.

단체였기 때문에 호텔 방문을 나서는 것으로 그냥 '체크아웃'이 되었다. 호텔방을 담당해 주던 두 여성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해 주는데도 나는 괜히(?)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들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또 오시라요."

북측 철책선을 넘고 군사분계선을 통과하여 남측 철책선을 넘을 때, 가질 것만 같았던 느낌 즉 배꼽이 다 찌드는 듯한 긴장감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왜냐, 마지막 한 장을 남겼던 내 카메라로 안내 이(李)선생과 그야말로 기가 막힐 기념촬영 후, 악수를 하고 돌아서려 할 때 안경을 벗고 울어버린 그는 내 마음까지 울렸기 때문이다. 순간, 나의 모든 긴장과 근심은 서부 휴전선 하늘로 날아가 버렸던 것이다.

신문 스크랩에 겁이 나서 부들부들 떤다면, 북도 남도 이것에 대해 뭐라고 한다면, 북도 남도 눈과 귀와 입을 막는 것이고 그 결과는 경직과 대결만 있을 뿐이다.

두 동강난 조국의 산하(山河), 좌우(左右), 동서(東西)에 이미 길은 뚫렸다. 오로지 북과 남의 마음에 달렸다고 본다.

나는 남(南)에서도 북(北)에서도 자유(自由)롭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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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방북기 4편까지 읽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 지면에 터 놓고 말 못하는 것도 있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어느 사회나 어두운 구석이 있습니다. 저는 '치의학사전 출판'과 '치과의료'와 '인생살이' 그리고 '교통'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기회가 되면 글로 또 찾아뵙겠습니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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