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송(중앙대 문예창작학과 2학년)


지난달 19일부터 21일까지 중앙대학교 제2캠퍼스 국악대와 예술대 학생들은 금강산 기행을 다녀왔다. 이번 금강산 기행은 `금강산 관광 5돌`을 맞아 우리학교 국악대 학생들이 기념공연을 하기 위한 것으로, 국악대 300여명, 예술대 40여명이 남측 대학생대표로 북으로 향했다.

첫째 날(11월19일)

첫째 날 아침 7시, 학생들은 얼굴에는 웃음 한가득, 손에는 짐보따리 한가득 안고 `설레임 반 두려움 반`으로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에서는 다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피곤한지 덜컹거리는 버스의 박자에 맞춰 단잠을 자고 있었다.

▶[사진제공 - 김은송]
한참을 달리다가 금강산 콘도에 도착해 잠시 휴식을 취한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남측 CIQ에 가 북측으로 가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말로만 듣던 DMZ(비무장지대). 그 양 옆으로 줄지어 있는 군인들 사이로 지나는 버스는 남과 북이 서로 경계하고 있는 그 금지구역을 달리고 있었다.

우리나라 자연생태계의 보고라고 하는 DMZ는 생각과는 달랐다. 육로 관광을 위한 도로만을 다녀 그런지 차들이 지나는 주변은 황폐한 모습뿐이었다. 메말라 있는 나무와 풀들, 버스가 다닐 때마다 날리는 먼지들이, 북측과 남측이 서로 경계하며 총대를 겨누어야만 하는 양측 군인들의 마음을 이야기 해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한참을 그런 길을 반복해 달리다가 낯선 풍경이 눈에 띄었다. 빨간 깃발을 꽂은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줄줄이 달려오는 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공동작업장이라 불리는 북측 사람들의 일터였던 곳이다. 곳곳에는 이제 남측 군인들이 아닌, 북측 군인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북측 땅을 밟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TV에서 고향인 북측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눈물 흘리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렇게 얼마 걸리지 않아  올 수 있는 땅을 우리는 수십년간 눈물 흘리며 기다려왔던 것인가 하는 한탄과 함께.
 
북측 CIQ를 통과하기 위해 내린 곳은 해금강 호텔이 보이는 바다였다. 버스에 내리자마자 시원한 바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이것이 북쪽 바다라는 생각에 추운지도 모르고 마냥 기분이 좋기도 했다. 
 
저녁에는 온정각 옆에 있는 문화회관에서 국악대의 `금강산 관광 5돌` 기념 공연이 펼쳐졌다. 그리고 "북측은 전통음악 대신 새로운 음악들을 발전시키는 데에 비해 한국은 북측의 전통 음악을 계승하는데 더 발전되어 있다"는 사회자의 말을 시작으로 국악대 학생들의 아름다운 북측 전통 음악들이 펼쳐졌다.

본격적인 공연에 앞서 이번 금강산 관광을 준비한 국악대 회장을 비롯한 기획단들이 드라마 `대장금`의 주제가를 통일을 희망하는 노래 가사로 바꿔 부르는 순서가 있었다. `대장금` 주제가에 맞춰 흥얼거리는 관객들과 노래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공연의 순조로운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잠시 후, 곱게 차려 입은 한복과 더불어 등장하는 국악대 학생들의 모습은 북측 전통음악의 아름다움을 한껏 더했다.

공연이 계속되고 학생들의 노래와 전통 악기 연주가 이어질 때마다 공연장은 뜨거운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그런 학생들의 얼굴에서는 통일을 향한 염원이 가득해 보였다. 공연은 북측에서 우리학교 국악대의 공연이 또 다시 펼쳐질 날을 기대하면서 아쉬운 막을 내렸다.
 
공연이 진행된 문화회관 로비에서는 예술대 사진학과 동아리 `현장`에서 준비한 사진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사진전은 통일 관련 사진들로 한국에 방문했던 북측 응원단들의 사진과 통일선봉대의 활동사진 등 다양한 사진들이 공연을 관람하고 나온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었다. 사진전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사진 속, 학생들의 평화를 기원하는 모습에서 북측과 남측이 하나가 된 듯한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둘째 날(11월20일)

둘째 날, 부랴부랴 준비하고 올라탄 버스는 이미 내 마음보다 한발 더 금강산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곧은 소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긴 도로를 한참을 달리다가 도착한 금강산. 구룡연 코스를 밟게 될 우리는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서서히 산을 올랐다.

산의 입구에는 작은 돌에 빨간색으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이런 돌들은 산을 오르는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것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금강산을 오르며 한 어록들을 그 자리마다 적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금강산은 산을 오르기 전부터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11월 말의 개골산은 이름그대로 산의 속을 다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거대한 바위들 속에 뼈를 드러내고 있는 듯한 나무들. 게다가 바위들은 대리석마냥 하얀색을 띤 데다 오늘은 안개까지 함께 했으니 거대한 신선이 산에 자리 잡은 듯 했다. 그렇게 시작한 금강산 등반. 산삼과 녹용이 녹아 흘러내린다는 `삼록수`에서 목을 축인 후, 본격적인 등반에 나섰다.

낙엽이 떨어진 바닥은 고운 빛깔의 비단을 펼쳐놓은 것처럼 등반길에 수를 놓고 있었고, 서서히 등반길에 물이 오를 때쯤,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남녀 북측 직원을 만날 수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북측 직원에서 다가가 "안녕하세요"라며 말을 걸자 반갑게 웃어주면서 "그래, 어디서 왔시요?"라며 선뜻 인사를 받아주었다.

부끄러운 듯 말을 이어가는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는 북측 남자직원은 "무슨 열차 있잖아, 그거 한번 해 보라우"라며 직접 선곡을 해주기도 했다. 우리가 "정말 해봐요?"라며 뜸을 들이고 있을 사이에 지켜보던 한 여학생들이 재미나게 노래를 불러주자, 북측 직원 분들도 신이 나시는지 답가를 불러주셨다. 그렇게 북측 주민과의 첫 만남의 시간이 흐르고 함께 사진을 찍은 후, 우리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계속해서 산길을 올랐다.
 
수정같이 맑은 물이 구슬이 되어 흘러내린다고 해서 붙여진 옥류동, 연주담과 금강산 4대 명폭 가운데 하나인 비봉폭포를 보는 동안  금강산의 아름다움에 취해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 그리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가운데 오른 구룡대는 상팔담의 그 절경이 힘들었던 것을 보상해주는 듯 했다.

100여m 절벽 아래 여덟 개의 못이 산세를 따라 층층이 배열되어 있는 것이 과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물기가 듬뿍 담긴 구름과 안개가 상팔담의 아름다움을 시기하는 듯 상팔담의 절경을 가렸다 보였다 했다.

상팔담을 내려 온 후, 우리 일행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평양랭면은 먹어봐야지"라며 목란관으로 향했다. 친절한 북측 언니가 안내해준 테이블에 앉아 평양랭면과 산채비빔밥을 시켰다.

평양랭면은 남쪽에서 먹던 냉면과 겉보기에는 얼핏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그 맛은 전혀 달랐다. 남측의 냉면처럼 쫄깃쫄깃하지 않은 부드러운 면에 국물 맛은 담백했다. 화학조미료가 전혀 없는 북측의 양념이라 그런지 만들어진 맛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맛이 느껴졌다. 산채비빔밥 또한 그 맛이 일품이었다. 북측의 나물들이 고소하고 담백해 우리 일행은 음식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어버렸다.

그렇게 맛있게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야, 아침 등산길에 오르면서 맞았던 비에 젖은 옷에 점점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밥을 다 먹었으니 밖에 나가야 하는데 갑자기 밀려오는 추위에 선뜻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목란관에서 음식을 나르던 북측 직원이 그런 우리를 보며 "추우시면 여기서 좀 쉬어가시라요"라며 웃으며 배려해주는 모습을 보니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친근한 언니 같았다. 게다가 `남남북녀`라는 말이 맞던가. 목란관에서 잠시 보았던 북측 여성들은 꾸미지 않은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금강산 관광이 끝난 후, 저녁에는 평양 모란봉 교예 공연 관람이 있었다. 특별 공연으로 이루어졌다는 이번 공연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한반도기가 펄럭이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교예단의 놀라운 모습들이 계속 될 때마다 학생들의 손에 쥐어진 한반도기가 공연장 가득 펄럭이면서 통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있었다.

교예단의 공연이 끝난 후에는 모든 관객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한 동안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교예단 또한 우리 남측 관객에게 오랫동안 손을 흔들며 서로 아쉬운 마음속에 뜨거운 민족애를 확인한 듯 했다. 그리고 나서  교예단은 한참 뒤에야 무대 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공연장 오른편에서는 교예단 공연의 연주를 맡았던 악단의 인사가 이어졌다.

공연장을 빠져나가는 관객들에게 아무 말 없이 웃음만을 띤 채, 손을 흔드는 악단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흐를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공연장을 빠져 나오기 전까지 악단들에게 한반도기를 펄럭이며 끝없이 인사를 한 뒤에야 나온 공연장 밖은 가쁜 숨으로 가득했다. 갑자기 벅차 오르는 뜨거운 감정이 어찌 할 수 없었다. 이것이 우리 몸속에는 한 민족의 피가 흐름을 증명해주는 것일까.
 
마지막 날(11월21일)

그렇게 이틀이 흐르고 마지막 날은 해금강과 삼일포 관광이 이어졌다. 삼일포와 해금강 관광을 위해 가는 버스 안에서 북측의 마을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남측의 농촌마을을 연상케 하는 북측 마을. 넓은 평야 지대에 간간이 보이는 북측 사람들은 모두 도보나 자전거를 이용하고 있었다.

아직 자동차가 많지 않은 북측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생활이 넉넉한 사람이라 한다. 아침 일찍 어디론가 향하는 북측 사람들과 학교 앞 아이들. 남측으로 따지면 초등학교인 것처럼 보이는 학교의 아이들은 지나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버스 안에 있던 학생들은 아이들을 보고 반가워서 덩달아 학교가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고개를 뒤로 돌려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예쁘게 생긴 꼬마 여자아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 잠깐 서서 무엇인가를 보고 있던 남자 아이, 큰 보따리를 짊어지고 밭길을 걸어가고 있던 할머니, 그 자리 그대로 묵묵히 서서 앞만을 바라보던 북측 군인까지 그들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정겨움이 느껴졌다.

허락만 한다면 달리는 버스에서 내려 그들에게 달려가 한마디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다. 통일이 되었더라면 함께 손잡으며 다정한 이야기도 해봤을 사람들인데 이렇게 대화조차 하지 못하고, 서로 스치듯 얼굴만 봐야 한다는 것이 가슴 아팠다.
 
그렇게 금강산 관광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사실 이번 북측 방문에 계획되었던 북측 대학생들과의 만남이 취소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북측 대학생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더라면 더 의미 깊은 북측 방문이 되었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북측 친구를 사귄다는 것이 그 얼마나 귀한 인연이겠는가.
 
비록 북측 대학생들과의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잠깐이라도 얼굴을 마주한 북측 주민들과 나눈 대화 속에서 통일의 희망을 가슴속에 가득 담을 수 있었다. 다음에는 꼭 귀한 인연을 기약하며, 남측으로 돌아오는 동안 통일을 향한 내 마음은 누구보다도 앞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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