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박헌영의 이런 노선은 여운형이 주장한 좌우합작노선과는 상반되는 것이었습니다. 여운형의 생각은 좌익의 결집체인 민전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복잡한 남한 정세를 풀 수 없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여운형은 온건우익세력 및 중간파와 합작을 추진함으로써 이승만과 한민당의 단독정부 노선에 대항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3당 합당도 좌우합작을 힘있게 추진하기 위한 방안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3당 합당에 대한 여운형의 입장이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7월 말까지 여운형은 박헌영이 제안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입장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운형이 암살되었을 때 발견된 문건에서 "인민당의 전술계획에 대한 솔직한 충고"와 "좌익통일의 실현과 통일의 시점에 대한 정직한 충고"를 원한다고 쓰고 있었던 점이 그 증거입니다.
그렇지만 여운형은 8월 3일 3당 합당에 대한 입장을 정하고 인민당 이름으로 공산당과 신민당에 합당 제의서를 보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운형은 어떤 계기로 3당합당에 대해 입장을 분명히 정리하게 된 것일까요?
이점과 관련해서는 여운형이 7월 31일 김일성과 회담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방정국에서 여운형은 5차례에 걸쳐 김일성과 회담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회동 시기와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제1차 회동(1946. 2. 9∼11): 해주·평양 방문. 북한 지역에서의 인민당 지부 조직문제와 북한 대표의 인공 참가문제에 대해 의견 교환. 조만식·김일성과 만나 미소 공동위원회 대처와 민족통일전선에 대해 논의.
▶제2차 회동(1946. 4. 19∼25): 김일성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해 모스크바 협정에 따른 임시정부 수립 문제 논의.
▶제3차 회동(1946. 7. 31): 연천군당 사무실에서 김일성과 회담. 좌익 3당 합당문제, 좌우합작운동, 미군정에 대한 대응전술 문제 등 논의.  
▶제4차 회동(1946. 9. 23∼30): 합당을 비롯, 남한의 현안문제에 대한 의견 교환을 위해 평양 방문.
▶제5차 회동(1946. 12. 28∼1947. 1. 8): 10여일간 평양을 방문해 좌익 진영의 단결과 중간좌익정당 결성, 정계복귀 문제 등을 논의하고 좌우합작운동, 미소 공동위원회 재개운동에 대해서도 의견 교환.
(정병준. {여운형 평전} 참고)    

해방정국 남한의 거물 정치지도자였던 여운형이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해 김일성과 5차례나 만났다는 사실이 지금으로서는 놀라운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때 일반적인 인식은 38선은 임시 조치에 불과하고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당면과제를 남과 북의 정치지도자들이 함께 논의한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물론 여기에는 여운형과 김일성이라는 남북의 중요한 정치지도자들의 이해관계도 연관돼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모두 동지이면서도 현실적 잠재적 경쟁자인 박헌영을 견제할 수 있는 중요한 패와 같은 것이었지요. 어쨌든 두 사람은 여러 차례에 걸쳐 만났고, 정국에 관련된 전반적인 문제들을 논의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3당 합당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3차 회동입니다. 이 때 두 사람은 대략 다음과 같은 합의를 하게 됩니다.

"1)좌익정치세력이 합법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므로 대중정당을 만들어 합법적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2)조공과 인민당의 미군정 대응전술은 같을 수 없고, 인민당이 미군정의 입법기구 창설과 단정수립, 그리고 좌익정치세력에 대한 분열·탄압정책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전제하에서 미군정과 타협을 위주로 하면서 투쟁해 나간다."(중앙일보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참고)

이러한 합의는 여운형의 입지를 강화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여운형은 북한 방문을 통해 3당 합당이 자신을 중심으로 추진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9월 23일부터 30일까지 이루어진 4차 북한 방문에서도 확인됩니다. 
이에 여운형은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인민당 중앙정치위원회를 소집하고, 합당문제를 제기해 만장일치로 동의를 얻어냅니다. 결국 여운형은 3당 합당이 인민당의 노선에 기초해서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그런 믿음 속에서 합당을 추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운형의 그런 입장은 8월 11일에 발표된 [민주정당활동의 노선]이란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운형은 이 글에서 합당의 필요성을 두 가지 들고 있습니다.
 
"첫째, 민전 체계가 정당 내부 활동까지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민주주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주도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당으로 통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공산당은 그간의 활동이 `현단계를 뛰어넘는 무산계급혁명투쟁`인 것으로 `군중이 오인`하기도 하고 또 `반동진영이 의식적으로 그렇게 오인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실정에 맞게 당명과 강령, 모든 전술을 인민적 정당과 정치노선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정창현, [1946년 좌익정치세력의 `3당 합동` 노선과 추진과정])
  
여기서 여운형이 제시한 인민적 정당과 정치노선은 대체로 인민당의 성격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에 따르면 인민전선적 당의 지도를 받는 인민전선을 결성해 인민적 민주주의를 실현하자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여운형의 주장에 대해 조선공산당의 박헌영과 남조선 신민당의 백남운도 기본적으로는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박헌영과 여운형은 강조점이 달랐습니다. 이를테면 박헌영이 3당 합당을 통해 민전의 주도체를 만든다는 점을 강조했으나 여운형은 민전이 양심적 우익세력을 포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포섭한 새로운 인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한 차이였지만 당장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로 동상이몽의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합당 과정에서 문제를 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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