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태(의학박사, 치과의원장)

이 기고는 지난 10월6일부터 3박4일간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 기념식 참관을 비롯한 평양 개성 육로관광에 관한 소감을 적은 세 번째 방북기입니다.


`여기는 평양교통방송입니다`

평양에도 택시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처럼 아무데서나 막 잡을 수는 없다. 외국인 전용과 일반시민용 택시가 있으나 외국인은 예약해야 한다. 내가 택시를 탈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없었지만 만일 탄다고 해도 안내인과 동승해야 한다. 안내인이 탄다고 해서 반드시 간섭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자세하고 더 많은 것을 안내 받는 것이 더 좋을 수가 있다.

나는 평양에서 3박4일 동안 지정된 행사장 외에는 다녀본 곳이 없다. 내가 묵던 양각도 국제호텔에는 우리말고도 영어를 쓰는 외국인을 두어 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호텔을 나가고 들어 올 때는 택시는 한 대도 보이질 않았다.

무엇보다도 북측에서 제공한 차량으로 정해진 도로만 다녀서인지 주유소(연료공급소) 간판을 볼 수 없었다. 짐작에 내가 본 평야거리의 자동차 수준이라면 주유소가 여러 개 있을 필요성이 없다고도 보았다. 수년전 북측 기자들이 서울을 다녀가 북측 TV 대담중에 `서울과 전국 여기저기 곳곳에 주유소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전쟁준비`라고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택시는 전부가 외제(예 : 토요다, 닛산, 크라운, 볼보 등)이지만 방문중 `평화자동차`에서 내놓은 `휘파람` 소형 승용차를 보았다. 이 `휘파람`이 앞으로 자가용이나 택시로 평양시가지를 누빌 때가 올 것이다. 자동차가 늘고 교통량이 늘어나면, 지금처럼 미모의 여성 교통경찰의 수신호는 전자감응 방식과 가변차로로 변할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이면도로, 둔치길, 자전거길 등 설계는 지금처럼 넓은 도로에서는 아주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본다. 체류중 한 대도 못 본 오토바이가 봇물 터지듯 공급된다면 교통사고도 증가할 것이니, 이미 남측에서 겪어온 교통사고 사망률 세계 1위 같은 것을 미리미리 예방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는 평양교통방송입니다. 평양 서울간 제2고속도도로가 공기를 3개월 단축시켜 다음달 초에 개통될 전망입니다.` 이런 `평양교통방송` 출현도 발치에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궤도전차의 낭만

나는 서울에 전차가 없어진 것에 대해 통탄의 정을 가지고 있다. 지금 청계천 복개를 철거하는 것에 대부분의 시민들이 반겨하고 있다.

서울서 사는 20대, 30대 사람들이 평야거리의 궤도전차와 무궤도전차(버스)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평양시내의 궤도전차와 무궤도전차가 보인다. [사진 - 이병태 제공]

`신기하다`
`낯설다`
`뭐 저런 게 있나`
글쎄 뭐라고 할는지 궁금하다.

평양은 완벽한 `대중교통도시`이다. 지하철을 포함해서 모든 대중교통 수단이 전기이므로 매연 때문에 오는 공기오염은 없다. 교통량이 아주 적다. 그리고 인공수로처럼 이리 꾸불 저리 꾸불 돌아가는 대동강과 보통강은 그림이다.

평양의 시가지를 조금만 꾸미고 궤도전차들과 무궤도전차들을 조화있게 도색하여 쾌적하게 승차할 수 있도록 한다면 엄청난 관광 수입을 확보했다고 본다. 샌프란시스코의 언덕길 전차, 인터라켄ㆍ샤모니 등의 산악열차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평양에서 궤도전차를 보는 순간 알프스의 산간을 달리는 낭만의 열차가 떠올랐다. 평양의 모든 명소를 궤도전차를 타고 안내인의 열정과 정성어린 안내를 들으며 돌 수 있도록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일 이렇게만 된다면 늘 막히는 교통 때문에 짜증스러워 하는 남측 수도권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이 결과로 올 수 있는 혼잡과 불편은 미리미리 방지하자면 무엇이든지 합리적으로 하면 된다.

지금 평양의 전차 차비는 어린이 1원, 어른 2원이다.


지하철에서 넘어진 나

평양지하철은 북측이 자랑할만한 시설이다 비록 한 구간을 탔지만 지하철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지하철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보다 에피소드 한 가지를 써야겠다.

원래 평양시내 관광일정에 지하철 승차는 없었다. 그러나 남측 참관단의 요구가 많은 것을 알았는지 북측은 계획에 넣어주었다. 그래서 겨우 한 구간을 타고 내렸다. 그러니까 지하철역 두 곳을 둘러 본 셈이다.

▶평양 지하철의 에스컬레이터. 북측 시민들이 올라가면서 반대편에서 내려가는 남측
참관단을 보자 웃으며 반갑게 손뼉을 치고 있다. [사진 - 이병태 제공]

주민들은 느닷없이 부닥친 우리들을 보고 처음엔 멈칫했다가 `南에서 왔습니다` 하니까 `반갑습네다. 잘 가시라요` 하며 만난 모두가 손을 흔들었다. 때로는 손도 잡았다. 내가 잡았다기보다는 앞에 가는 일행이 악수를 하고 가니까 뒤 따라 가는 나에게도 北동포들은 손을 내밀고 악수를 하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오른쪽에서 내려오는 北동포들과 누가 먼저 흔들었는지 모두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가 손까지 마주쳐 순간적 만남을 나누며 우리는 올라가고 北동포들은 쭉 내려가고 하는 순간이다.

내게 팔을 내밀기에 쭉 내밀어 손바닥이 탁 닿는 순간, 그는 내 손을 꽉 잡았다. 내가 탄 에스컬레이터는 올라가고 北동포가 탄 것은 내려가기 때문에 나는 뒤로 넘어졌다. 만일 내 뒤에 건장한 일행 두 분이 없었다면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하여튼 아찔했지만 기쁨의 순간이었다. 지하철 역사를 빠져 나오니 오른쪽 가운데 손가락의 손톱이 찢어져 있었다. 나는 즉시 일일반창고를 붙였다. 언제 보았는지 안내 李선생이 물었다.

"아니, 손가락에 뭘 붙인 게야?"
"지하철 올라오는데 악수하자길래 꽉 잡혀서 뒤로 넘어질 뻔했어, 평양 왔다가 머리 깨지는 줄 알았다구."

"그 놈에 악수는 왜 해!"
"뭐라구! 악수는 왜 하느냐구?"
"이러는 것 보면 또 아니란 말이야."
하여튼 안내 李선생은 엉뚱한 구석이 있고 사귀고 싶은 남자였다.


<<의학대사전(영조일)>>을 사들고

첫날 낯설은 평양에 들어와 양각도국제호텔에 내렸다. 짐을 챙겨들고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호텔 직원들이 양쪽에 일렬로 서서 박수와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반겨 주었다.

방 열쇠(카드)를 받자 소변이 급했으나 서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로 직행했다. 내가 구하고자하는 책은 없었다.

그 매장에서 제일 큰 책이 눈에 뜨였고 책 모양새가 많이 보던 모습이었다. 재빨리 그 곳으로 가서 제목을 보니 바로 <<의학대사전(영조일)>>(22.5×30.5/ 머리글 2+일러두기 6+본문 2502+조영색인 333+일영색인 349+부록 43쪽/ 과학백과사전출판사, 평양/ 2002년 7월 10일 발행)이었다. 영어로는 <<English-Korean-Japan MEDICAL DICTIONARY>>이다.

▶의학대사전(영조일). [사진 - 이병태 제공]

딱 한 권이 있길래 얼른 집어들고 계산대로 갔다.
"억하나, 한 분이 보고 가셨는데."
"얼마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요. 팔면 되지."
"55달러입니다."

나는 이 사전을 들고 올라와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1982년에 <<치과의학사전>>(500쪽)을 낸 적이 있다. 그 이후 보다 완벽한 치의학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일생을 전심몰두하고 있다. 북한에서 발간된 사전도 참고하고 있다. 이번에 산 것까지 나는 6종류의 북한사전을 가지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의학대사전(영조일)>이 간행 또는 인쇄중이어서인지 해부학용어 표기, MeSH 표기, 그리고 발음에 따른 분절법에 다소 미흡한 것이 눈에 뜨였으나 방대한 어휘수록과 한글표현에 대단함을 느꼈다.

평생 가제 <<이치의학대사전>> 편찬에 나홀로 전력해온 입장에서 찬사를 보낸다. 아마도 내가 펴낼 사전이 나오면, 그 때 두 가지를 놓고 보면 만감에 빠져 왈칵 눈물이나 쏟아지지 않을까, 생각을 하면서 양각도국제호텔 24층 객실에서 대동강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지금 5교(10교 목표)를 보면서 수정ㆍ교열ㆍ첨삭하고 있는 가운데 이 <<의학대사전(영조일)>>의 (영조일)에서 `갸우뚱` 하는 딴 생각을 가지게 됐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하고있는 체제는 영한(English-Korean) 사전인데 한글용어 뒤에는 (  )속에 한자(漢字)를 넣었다. 그런데 (영조일)에서는 한글용어 뒤에 漢字를 (  )없이 써놓고 그 漢字 위에 일본어(히라카나)를 가늘고 작은 글자로 써놓았다.

나는 이번 평양ㆍ개성 3박4일 방문에 크나큰 고민을 안고 돌아오게 되었다.


평양김치와 지배인 安여사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등산은 더 말할 것 없고 여행 중 먹고 자고 하는 일처럼 힘들고 말도 많지만 또 그 만큼 추억에 남고 재미있는 것도 없다.

▶양각도국제호텔 대식당 지배인 安여사(맨 우측). [사진 - 이병태 제공]

우리는 특별한 행사가 아니면 아침과 저녁 식사는 양각도국제호텔 1층에 있는 대식당에서 한식 뷔페로 하였다. 평양을 다녀왔다니까 `음식이 맛있더냐 어떻더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나는 북한 음식을 중국의 두만강과 압록강 주변 도시에서 13년이나 익혀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맛을 짐작하고 있었다.

만일 중국음식에 다소간 거부감을 가지셨던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개성이나 평양 어디든 음식 때문에 고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첫날부터 식판을 들고 병목현상을 일으키는 곳은 초반의 양상치와 드레싱이 있는 곳이 아니라 가운데쯤 있는 상치가 있는 곳에서 병목, 정체현상이 일어났다.

"야아, 남측에는 상치가 없는가? 어찌 상치만 잔뜩 가져가시는지!"

종업원이 넓은 판에 잔뜩 가져오면 몇 사람 지나면 금방 없어져 상치를 가져가려고 서있는 바람에 줄은 식당 밖 로비 한가운데까지 밀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安지배인까지 나서서 배식과 식객의 흐름 그리고 식사를 돌보며 점검하기도 하였다.

나는 한 가지씩 다 먹어 보았다. 입에서 거부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특히 서울서는 아침이면 계절에 따라 물김치, 오이지, 동치미 중 한가지만 있으면 되는 나였기 때문에 평양 물배추김치는 아침마다 두 그릇씩 먹었다. 이 닦아도 냄새가 날까해서 되도록이면 남이 모르도록 우물거리며 껌을 씹었는데 이것도 북측 동포들은 이상하게 여기지나 않았을지 궁금하다.

준비된 음식마다 팻말에 써놓아 좋았다 눈에는 설지만 조개젓, 명란젓도 입맛을 돋우었다. 아침마다 바뀌는 아욱된장국, 배추된장국, 까나리된장국은 조미료 없이 담백하고 그렇게 짜지도 않아 무척 좋았다.

그리고 보기는 가날펐지만 콩나물과 녹두나물은 왜 그렇게 씹는 맛이 좋은지. 중년에 들어서면서 입에 대지 않던 떡도 먹었다. 백설기보다 희고 말랑말랑한 `술떡`, 이 술떡이 내 유년시절을 불러일으키고 세월을 돌이키는 방아쇠가 되었을 줄이야.

특히 둘째 날부터 식탁 주위를 돌아준 지배인 安여사는 후덕한 풍모에 편안하게 식사하도록 환한 얼굴로 대해주어 더욱 좋았다. 더욱이 내가 구하고자하는 책을 못구해서 어쩌냐며 걱정까지 하여주었다.

"맛있게 드셨습니까? 그 책 없으니 어쩌나! 다음에 또 오시라요."
安여사는 구강과(치과)에 이해가 많은 듯 하였다.


"푸에블로호, 셔먼호 격침시킨 쑥섬에 매놨지"

방북 3박4일 동안 어떤 곳에도 반미구호나 비방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북측 안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는 한번도 들은 적이 없으나 `우리는 하나`라는 표현을 많이 강조하였다.

10월9일 아침 8시, 양각도국제호텔 앞에서는 南으로 떠나는 우리를 취주악단과 호텔 전직원이 환송하였다. 그네들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모자를 벗어 휘저으며 답례하였다. 서운하였다.

평양의 보통문을 왼켠에 두고 천리마거리를 달렸다. 곧 대동강을 가로지르는 `충성의 다리`에 진입하였다. 이 다리를 반쯤 지나면서 나는 왼쪽 뒤로 보이는 푸에블로호를 가리키며 안내 李선행에게 말을 걸었다.

▶대동강의 푸에블로호 [사진 제공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안내 李선생. 저게 푸에블로호 맞지?"
"아니, 李박사선생님, 정치 얘기 안 하갔다 해놓고 끝날에 어찌 하라는 기야."

"이게 무슨 정치 얘기야. 여길 지나다보니까 언뜻 푸에블로호가 보이길래 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거야. 아니, 당신이 그 때 그 배 끌어다 놨어, 대포를 쐈어, 그만 관두라구."
일부러 나도 투정하듯 튀기듯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 한 수 더 뜬다.

"여기, 이 선생님들 다 알아. 다 알고 있겠는데 뭘 얘기 하라는기야."
안내 李선생의 입에서는 남북체제에 관한 불편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거 푸에블로호 우리가 몇 방 안쏘고 끌어왔다구 미제 갸들 종이호랑이야. 우리를 때린다 때린다 하면서 못 때리는 것 보라우."
그는 소신있게 말을 이었다.

"큰 얼굴 큰 코(미국) 가운데(콧등 제일 낮은 부분을 가리키며)에 있는 작은 사마귀지 뭐. 성가신 파리처럼 보는 기야. 긴데(그런데) 우리가 58년간 이 고생하면서, 더 잘 살 수 있었는데, 58년이나 했으면 됐지 후손 대대로 더 고생시키면 억 해(어떻게). 또 물려주냐말야."

"...아니 푸에블로호 어떻게 된거야."
"음, 그치. 미국? 맥 못추어. 때리고 싶어도 못 때리잖아. 푸에블로호 매어놓은 데가 미제 상선 셔먼호를 불태워 까부셔 침몰시킨 `쑥섬` 바로 그 자리라구."

그는 신미양요의 원인이 된 1886(고종3)년 7월 11일 셔먼호 사건을 설명하였다. 일행은 버스창 뒤로 멀어져 가는 푸에블로호를 보았다.

사실 1968년 미국 정보함이라고 알려진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었을 때 세계는 놀랐고 한반도 정세는 불안했다. 그 불안은 지금도 연속 상연(?) 되고 있는 실정이다.

푸에블로호에는 미스테리가 있다. 어떻게 동해에서 대동강까지 옮겨졌냐는 것이다. 나는 그냥 배이니까 바다를 통해서 했을 것(공해견인설)이라고 아무런 생각 없이 여기고 있었는데 만일 공해상으로 견인해 갔을 때 미국이 가만 뒀겠느냐는 의문이다. 글쎄, 흥정이 있었다면 가능하겠지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하나는 푸에블로호를 해체(분해운반설)해서 운반하여 대동강변에서 다시 조립했다는 것이다. 정보함이기 때문에 분해하면 재조립이 어렵지 않겠냐는 반문도 있다.

나머지 하나는 원산 정도까지 끌고와 들어올려 대동강으로 그대로 이동(육로운반설)하였다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주 흥미롭다.

"푸에블로호 그런기야 몇 방 안 쏘고 끌고 왔다구."
안내 李선생이 오랜만에 이야기를 했다.
끌고 왔다고 했는데 어떻게 끌었는지 아직도 궁금하다.


"핵 있소 없소"

안내 李선생이 푸에블로호에 관해 이렇게 입을 떼자 일행중 교육자(교장선생님) 한 분이 물었다.
"李선생님, 그러면 한 가지 물어 봅시다."
"거저 모르니까니 잘 물어 보시라요."
안내 李선생이 되받았다.

나와 안내 李선생이 이야기하다 보면 안내 李선생의 한두 마디로 내가 궁지에 몰릴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교육자 그 분은 `지셨습니다` 하면서 대화중 안내 李선생편을 돕곤 했다. 그런 교육자 그분이 이번엔 한 방 맞은 셈이다. 내가 설명했다.

"잘 물어보라는 것은 복잡한 국제정세나 남북관계에 대답하기 어려운 그런 질문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자 모두 안내 李선생의 재치에 웃고 말았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이 물었다.

"여기에 核 있소? 없소?"
"여기? 버스에?"

그는 넌센스 퀴즈 대답이거나 수수께끼처럼 몇 마디도 하지 않고 또 웃겼다. 내가 뛰어 들었다.
"교장선생님 저 안내 李선생이 이렇다 저렇다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이 버스 안에서..."

대화가 이쯤 되자 안내 李선생이 순서를 이었다.
"내 개인적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구 있는가, 이렇게 묻는 것이겠구만. 그렇지? 선생님"
그는 잠시 시간을 끌었다.

"나는 그저 가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있지. `있다` 이렇게 믿는 게야. 아니 우리가 억해 버티갔수."


농구와 평양올림픽

나는 농구에 대한 아주 큰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으로 택했던 운동이 농구였다. 슛 시늉은커녕 농구공을 링을 향하여 던져도 그 반까지도 못 미쳤다. 당시 코치는 고대 농구선수였고 지나놓고 보니 우리들을 위해 무보수로 봉사했던 것 같다.

그는 `앞으로 농구는 키 큰 사람 둘만 있으면 그 팀이 이긴다. 상대방이 슛해서 들어가지 않았을 때 리바운드 볼을 키 큰 선수 하나(A)가 잡으면 또 다른 키 큰 선수(B)는 상대편 링 밑에 있다가, A가 공중으로 높이 던진 공을 B가 받아 내려꽂거나 우겨 넣으면 꼴(덩크슛)이 되는 거야` 하던 때가 겨우 1956년경이었다.

이번에 북측 리명훈 선수가 바로 그 중 하나였으니 그 형은 혜안을 가진 선수(코치)였다. 코치는 런닝과 지구력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나는 물주전자를 들고 다니고 잔심부름을 많이 하였다. 그래도 나는 좋았다. 그러다 어느 날 쓰러졌다. 허약하지만 투지만은 살려 보려던 나를 부모님은 포기시켰다.

같은 반에 이병구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 때문에 큰 공, 농구공에 매력을 느꼈다. 그 애는 종로 YMCA 운동장에서 농구공을 가지고 이미 많은 실력을 쌓은 터였다. 이병구는 참으로 잘했다. 농구에 관해 내가 1을 가졌으면 그는 9, 아니 99를 가진 터였다.

이병구는 타교로 스카웃 당해갔다 그때 `병구`는 `병태와 같이 간다면` 했다는 이야기를,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후에 들었다.

내 부모님께서는 물에 가는 것도, 산에 가는 것도, 운동을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학교만 다녔다. 공부를 했지만 공부 잘하는 애들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원예반이라거나 생물반처럼 과격한 것을 피할 수 있는 과외활동을 하면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1964년, 어느새 나는 서울대 치대 본과 2년이 되었다 엄청난 전공과목에 세수할 시간조차 빠듯하여 촉각이 아쉬운 시기였다.

이 해 동양에서는 처음으로 도쿄(東京)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이때 이병구는 한국농구 대표선수(베스트 5)로 출전하였고 큰 활약을 하였다.

"야, 이병구가 뛰는 구나. 나는 이제 재시험과 실험실습에 눈코 뜰 사이 없는 본과 2년생인데 말야."

그후, 내가 인턴이 되었을 때 병구와 나는 소공동(당시 한국은행과 치대병원은 이웃에 있었다) 인도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지금까지 서로 연락이 없고 그래서 농구는 나에게 아주아주 깊고 깊은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다.

개성 왕건왕릉 숲속에서 북측이 제공한 곽밥(도시락)을 맛있게 먹을 때 우연하게도 나는 우리 여자농구팀과 바로 옆에서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바로 옆에는 북측 안내 李선생도 있었다.

▶왕건왕릉 숲속에서 현대 여자농구팀과 식사를 같이 했다. 우측이 전주원 선수.
[사진 - 이병태 제공]

나는 농구와 동경올림픽 농구 그리고 이병구 이야기를 했고, 심부름만 하다가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를 전주원 선수에게 하였다. 동양에서는 일본 동경에서 `1964 도쿄올림픽`, 그 다음에 `1988 서울올릭픽`이 있었고 앞으로 `2008 베이징올림픽`이 있을 예정이다.

언젠가는 평양올림픽이 열릴 것이다. 그때가 오면 바로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단일팀 농구가 세계에 우뚝 서서 한반도가 빛나기를 고대한다.

내가 그 때 한반도 하늘밑에 생존해 있게 된다면 나는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평양구장에 앉아있을 모습, 그리고 보고 싶은 장면들을 이미 머리 속에 새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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