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북조선노동당의 권력구조와 그 의미

1946년 8월 30일 창립대회 마지막 날 13개 항으로 이루어진 당 강령과 41개조로 이루어진 당 규약을 채택하고, 당 기관지로 정로(북조선공산당 기관지)와 전진(조선신민당 기관지)을 통합해 로동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로써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합동에 의한 북조선노동당의 창립대회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러면 북로당의 권력구조와 세력 분포는 어떻게 돼 있었을까요?

북로당의 권력구조는 당연히 집단지도체제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의 최고권력기관인 당 중앙위원회는 각 계파간의 세력 안배가 철저했습니다. 북조선공산당 내의 각 출신 세력과 조선신민당의 지분 할당이 있었던 것입니다.

43명의 중앙위원 가운데 대략 독립동맹 계열(연안계)이 김두봉, 최창익, 김창만, 허정숙, 무정, 박효삼, 윤공흠, 한빈, 박일우 등 16명으로 가장 많았고, 소련계가 허가이, 박창식, 김재욱, 한일무 등 8명, 항일유격대 출신이 김일성, 김책, 안길, 김일의 4명, 국내 공산주의자가 주영하, 장순명, 한설야, 강진건, 장시우, 오기섭 등 10명, 기타 5명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위원장에 김두봉, 부위원장에 김일성이 선임됩니다.

이렇게 보면 북로당 제1차 당대회의 결과는 각 계파간의 권력분배에 의한 집단지도체제였을 뿐 아니라 김일성의 위치가 북조선공산당 시절에 비해 약화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상의 것일 뿐 실제로는 여전히 김일성이 최고 권력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독립동맹 계열의 김창만, 허정숙이나 국내계의 박정애 등이 김일성을 최고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었고, 허가이 등의 소련계도 김일성 중심의 당 운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또 항일유격대 출신은 당 중앙위원회에는 김일성을 포함해 4명밖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초기 국가형성의 근간이 되는 군대와 보안계통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김일성의 지위를 물리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었습니다.

최용건은 조선인민군의 모태가 되는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사령관이었고, 김책은 인민군 간부들을 양성하는 평양학원 원장이었으며 강건은 나남훈련소 제2소(제2사단) 소장이었습니다. 또한 안길(보안간부훈련대대부 참모장), 김일(보안간부훈련대대부 문화부사령관), 박성철(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 군사부교장), 오백룡(철도여단 부여단장), 박영순(보안간부훈련대대부 통신부장), 허봉학(보안국 강원도 보안부부장)을 비롯, 김창봉, 전문섭, 전문욱, 안영, 박우섭 등이 철도경비대 간부로 있었습니다. 그밖에도 최현, 김광협, 최용진, 최광, 김경석, 석산, 오진우, 이영호, 유경수, 최춘국 등이 군대와 내무성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형식적으로 북로당 위원장에 김두봉이 취임했지만, 실질적인 1인자는 김일성이었던 것입니다. 김두봉의 위원장 선출은 신민당의 합당에 대한 배려와 이름있는 국어학자 김두봉에 대한 원로 차원의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북로당 창립대회에서의 분위기에서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북로당 창립대회에서 대부분의 토론자들은 토론 말미에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불렀으며, 심지어 위원장으로 선출된 김두봉마저도 "우리의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초기에 김일성의 강력한 경쟁상대로 여겨졌던 무정도 "김일성 동지의 주위에 튼튼히 뭉치자"는 말로 토론을 끝냈을 정도이며, 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 위원장 박정애는 "남북 조선이 갈려 있는 것을 속히 통일해 전 조선 인민의 희망대로 김일성 장군을 지도자로 모시게 될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토론자 가운데 박병서라는 인물은 "우리의 유일한 령도자 김일성 동무를 내세워야 합니다. 만일 김일성 동무를 깍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반동분자요, 반역자라고 지적합니다"라고 주장했을 정도로 김일성의 위세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북로당이 형식적으로는 집단지도체제이지만 실제로는 김일성이 최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게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북로당의 탄생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북로당의 탄생은 북한 지역에서 좌파가 모두 결집한 단일정당이 출현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북조선 공산당원 27만여 명과 조선신민당원 9만여 명이 산술적으로 합쳐진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당 조직의 측면에서 보면 북로당의 창립은 노동자, 농민, 근로인텔리의 통일적 지지를 받는 당일정당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대외적으로 볼 때 그것은 북한 지역에서 "정당간의 경쟁적 관계를 사실상 해소시킨 사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북로당의 창립은 북조선에서 정당간의 정치적 경쟁이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그래서 "노동당이라는 이름의 배타적인 유일정당이 탄생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북로당 외에도 조선민주당(위원장 최용건), 천도교청우당(위원장 김달현)이 있었지만, 이들의 당세와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 당을 장악한 핵심분자들은 노동당원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것들은 노동당의 위성정당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이때부터 북한의 정치체제는 노동당에 의한 당 독재,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북한 지역에서는 좌파의 통일적인 결집으로 대중에 대한 당의 지도력도 강화됐으며 인민공화국 창건이라는 목표를 향한 발걸음도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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