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8월 29일부터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남북장관급회담에 참가했던 남측 대표들이 단군릉을 참관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남측 언론들은 별다른 논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단군릉을 발견했다는 93년도와 단군릉을 준공했다고 한 94년 10월의 태도에 비하면 정말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 대부분의 남측 언론들은 단군릉 발견이나 준공이 `북한이 평양 정통설을 주장하기 위해 조작해 낸 억지정치놀음`이라고 하였으니까요.

현재 우리 나라에서 단군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역사적 인물도 드물 것입니다.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모두에서 그렇습니다. 단군 신화가 역사적 사실임을 교과서에 명확하게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젊은이들 사이에서 많아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남북장관급회담 참가자들이 단군릉을 참관하기 직전인 작년 8월 초에는 경남 밀양에서 교회의 장로와 목사가 중학교 교정에 설치돼 있던 단군상의 목을 쇠톱으로 자르고, 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단군상에 페인트를 뿌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단군상 훼손은 그 동안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단군이 신화 속의 인물이냐 아니면 역사에 실재하는 인물이냐 하는 논란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단군은 분명히 역사에 실재하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아는 단군은 신화 속의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라이든 건국 신화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무관하게 성립되지 않습니다. 동시에 완전히 실증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닙니다.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단군을 역사 속에 실재했던 인물로 기술합니다. 단군 왕검을 당시 지배자의 칭호라고 합니다. 따라서 단군을 한 인물로 보는 것이 아니지요. 80년대의 국사 교과서에서는 단군의 역사적 실재를 인정하기는 합니다만,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내용을 인용함으로써 신화의 차원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지 않았었습니다.

단군을 중시하고 부각하는 사상적 흐름은 우리 역사에서 어제 오늘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닙니다. 특히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그러한 경향은 더욱 강했습니다. 일연의 `삼국유사`나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단군 신화가 실린 것이 고려 시대에 몽고 침략을 받은 뒤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홍만종이 `동국역대총목`에 단군 시대를 서술한 것도 그러한 예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조선 말기에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단군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는데 박은식이나 신채호 등 민족주의 역사가들이 그러한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제국주의는 단군의 역사적 실재를 부정하려 하고, 단군 신화를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일제 시대의 실증사학자들이 `실증`이라는 미명하에 이러한 놀음에 같이 놀아났다는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단군과 관련된 사실은 아직 밝혀져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단군이 역사 속에서 분명히 실재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군이 세웠다고 하는 고조선의 존재가 분명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고조선의 존재는 고대 중국의 문헌상으로도 분명히 확인되고 있습니다. 다만 단군이 언제 어떻게 고조선을 건국하였는지는 기록을 통해 뚜렷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고기`나 `구삼국사`와 같은 책에 기록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러한 책들은 지금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보편적인 세계사의 발전 과정과 유물 및 신화를 통해서 추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하였습니다. 한반도에서는 대체로 기원전 10세기 경에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것이 기원 전 20여 세기이므로 이 시기는 대략 맞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먼 옛날을 보는데 천 년은 그다지 중요한 시기가 아닙니다. 고조선 건국 기록이 다소 과장됐을 수도 있고, 반대로 현재 청동기시대를 추정하는 것이 잘못 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실증`이 아닙니다. 지난 역사를 통해 단군을 부각했던 사람들과 단군을 폄하하거나 무시하려 했던 사람들이 민족과 반민족으로 나뉘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 앞에서 우리가 단군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는 자명해집니다.

그러나 단군을 무턱대고 숭배하고 심지어 단군 신화가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반드시 민족 자주의 관점에 서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980년대 이후 강조되기 시작한 대단군주의가 `단군 개천의 숭고한 이념`을 내세우면서 전두환 정권을 찬양하였고, 전두환 정권이 내세운 정치 구호인 이른바 `선진조국 창조`가 마치 단군사상을 실현하는 것인 양 주장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 최남선 같은 이는 단군 신화를 이용하여 일본과 우리가 본디 하나라는 해괴한 논리를 펴기도 했습니다. 그가 1925년에 발표한 `불함문화론`은 신채호 등이 내세운 대단군주의와 내용이 비슷하면서도 결론은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신채호는 본래 일본제국주의의 대일본주의에 대항해서 부여족 계승의식을 강조한 대단군주의를 주장했는데, 최남선은 단군이 지배하던 문화권이 저 멀리 발칸반도, 카스피해, 유구(오키나와)까지 이른다고 주장하면서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논리를 합리화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북한이 90년대 이후 내세우는 단군 강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일단 그것은 민족 대단결을 위한 충정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북한이 단군릉을 발견하고 준공했다는 것이 갑자기 튀어나온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평안도 강동현에는 대총(大塚)이 둘 있는데, 현의 서쪽에 있는 둘레가 410척인 무덤이 단군의 것이라고 전해진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무덤이 숙종 23년인 1677년에 단군의 무덤으로 공식 인정되고 있으며, 정조 10년인 1786년에는 그 무덤을 지키기 위한 총호까지 두었다는 기록이 `숙종실록`과 `정조실록`에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오래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평양 부근에 단군의 묘가 있다고 믿어 왔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우여곡절 속에서 묻혀 왔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북한의 주장을 `정통성 주장을 위한 조작`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그래왔듯 북한이 주장하는 것은 반대하거나 깎아 내리려고 하는 냉전시대의 타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단군을 통해 진정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민족이 인간 역사의 보편적 발전 과정에서 매우 앞선 시기부터 면면히 발전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더욱이 희석되어 가는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군 사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오늘의 우리 민족의 사상으로 구현하려고 해야 합니다.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 신화의 앞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본래는 첩의 아들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맏아들이 아니라는 뜻) 환웅(桓雄)이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몹시 바랐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을 내려다 보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민족이 일찍부터 인간 중심의 사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군 사상은 매우 현세적이고, 인간이 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위하여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단군 사상의 핵심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에서 무조건 단군 숭배만을 주장한다면 앞에서 보았듯이 또다른 문제를 낳을 수도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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