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은 자만이 쓸 수 있는` 책

▶"JSA-판문점(1953-1994)"
[저자] 이문항   [출판사] 소화
이제 정전협정 50주년이 된다. 1953년 7월27일, 그간 3년 넘게 진행되어 온 6.25한국전쟁이 잠시 멈췄다.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이지만 전쟁이 멈춘 상태가 곧 평화는 아니다. 한반도는 이처럼 전쟁도 평화도 아닌 어중간한 휴전 상태로 근 반세기를 끌어왔다.`

50년이 지났건만 한국민 대부분은 아직 정전협정의 내용과 정전상태의 50년 역사를 잘 모른다. 잘 모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정전상태는 아직 현재진행형이고, 무엇보다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다. 이미 2년 전에 군사정전위원회와 판문점 등에 대해 서술한 책이 나왔었다. 바로 <JSA-판문점(1953-1994)>이다. 영화 <JSA 공동경비구역>과 달리 이 책이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리고 잘 소개돼 있지 않다는 현실이 이 나라 독서계의 천박함과 관련학계의 왜소함을 그대로 웅변해 준다. 이 책은 한마디로 `停戰 역사의 경전`이라 불릴만하다.

이 책을 소개하기 전에 먼저 저자에 대해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겪은 자만이 쓸 수 있는` 전형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문항 (李文恒, 미국명 제임스 리, 74) 선생이다.

`정전협정의 해석자`, `판문점의 산 증인` 이문항

저자 이문항 선생은 `많은 한국사람들과 마찬가지로 6.25 전쟁이 일어나서 부산으로 걸어서 피난 가 학도병으로 미 해병사단에 복무하면서 낙동강 전투, 인천 상륙, 서울 수복에 참전하면서 우리 민족이 겪은 많은 고난을 목격하고 다시는 그 같은 동족상잔의 전쟁이 나서는 안된다고 절실히 느끼면서 그 같은 재난을 방지하는 것도 역시 우리 한국사람들에게 달려있다고 절실히 느낀다.`

이문항 선생은 1966년부터 1994년까지 29년간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에서 근무했다. 초기에는 군정위의 전사 편찬관ㆍ분석관으로 근무하다 1982년부터 1994년 9월 군정위 기능이 완전히 마비돼 유엔사를 떠날 때까지 12년 동안 유엔군 총사령관과 수석대표의 특별고문을 역임한다.

저자에 의하면, 저자가 한 생을 바친 `판문점 군정위는 조국의 통일이나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임무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전쟁 재발을 방지하는 적대 쌍방 총사령관들이 합의한 휴전 유지 기구일 뿐`이다.

초기 판문점 군정위에서 근무할 때 저자의 임무는 `북한과 진행하는 판문점 협상에서 제기되는 그 어떤 제목, 안건, 관례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수석대표와 참모들에게 회의 준비 과정 또는 회의중에 알려주는 것`이었다.

이후 유엔사 특별고문직 맡았을 때의 임무는 `미국 연방 정부의 국제관계 고문으로 정전협정과 협상에 관한 모든 중요한 전략, 정책을 수립하고, 모든 회담계획서와 주요 발언문들을 영어로 작성했고, 유엔군 총사령관이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하는 정전에 관한 연례보고서를 작성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북한측 군정위 대표들과 비공개 협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이 책을 보면 당연히 눈치채겠지만, 저자는 1967년 이수근의 판문점 귀순을 도운 장본인이었고(뒤에 이수근은 위장간첩으로 판명돼 사형당하는데 이에 대해 저자는 의문을 표하면서 이수근이 `북에서도 남에서도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묘사한다), 1968년 `미 첩보함 푸에블로호 나포사건`과 1976년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에서는 북한에 대한 미국측의 협상과 대처를 이끌어낸 막후 참모였다.

이처럼 저자는 정전협정과 관계된 일과 판문점에서 일어난 일 등, 한미간 논의 과정을 거쳐 북한과 수많은 협상을 해온 남.북.미의 관계사 그 자체다. 그러기에 그가 `정전협정의 해석자` 또는 `판문점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것은 조금도 과하지 않다. 1994년 은퇴한 뒤 미 워싱턴 근교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한국인으로서는 매우 특이한 경력, 특이한 삶인 셈이다.

새롭지 않지만 새로운 사실, `군사분계선은 육지에만 있고 해상에는 없다`

이 책에는 우리가 익히 들었지만 그러나 정확히는 모르는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묘사와 설명 그리고 가끔 평가도 깃들어 있다. 1968년의 1.21사태와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의 원산 앞바다에서의 나포사건,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67년의 이수근 사건 그리고 1989년 임수경 학생의 판문점 군사분계선 통과 등 각 사건들의 전말이 자세히 실려 있다.

또한 책 내용중의 하나인 `김일성 장군은 카터 대통령을 좋아했다`에서는 1977년 미군 CH-47 헬기가 월북했다 격추당하자, 헬기사건 처리과정에서 당시 대통령인 카터가 사과 담화를 즉각 발표하고 이에 북한측이 부상자 1명과 사망자 3명을 아무 조건없이 유엔사측에 인도하였다는 대목에서는, 훗날 1994년 한반도에서 전쟁 발발 일보 직전까지 갔던 `북핵위기`때 카터가 특사자격으로 북한 김일성 주석을 만나 북미간 해빙분위기를 튼 역사적 사실이 왜 가능했는지를 시사해 준다.

게다가 이 책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실들이 있다. 이 땅의 우익.수구주의자가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한마디로 군사분계선(MDL)은 육지에만 존재하고, 서해와 동해에는 합의된 군사분계선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방한계선(NLL)이란 "유엔사/연합사 해군 및 항공초계활동의 북방한계를 한정짓기 위해 유엔군 총사령관이 일방적으로 설정"(97쪽)한 것이다. 즉, NLL과 정전협정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엔사는 1953년 7월28일에 있었던 제1차 본회의에서 정전위의 마지막 회의인 91년 2월13일에 있었던 제459차 본회의까지, 40여년간 판문점에서 있었던 본회의, 비서장 회의, 그리고 직통전화 전화메세지, 서한 등 그 어디에도 서해 해상침투사건, 도발사건 등 해상위반사건들을 다루면서 단 한 번도 `북방한계선 침범`이니 `북방한계선 위반`이니 한 적이 없다."(91쪽)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fact)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유엔사 특별고문을 지낸 `정전협정의 해석자`가 한 말이라 무게가 있다. 사실은 사실인 것이다.

사소할지 모르지만 `북한 당국이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중반까지 남한 어부들이 북한 어장에 들어와서 고기를 잡을 것을 공식제안한 것`(93쪽)이나, 저자가 군정위에 몸담고 있던 동안 보람 있었던 일중의 하나인 한강하구 비무장 수역에 한국의 준설선이 통과할 수 있도록 애써 `한강하구 DMZ 준설선 첫 통과`를 내온 일(105쪽) 등도 가벼운 사실은 아니다.

그리하여 특히 `남과 북이 대화를 하는 동안은, 또 그후에도 얼마 동안은, 남과 북 사이에 발생하는 충돌사건이 많이 줄어들고, 긴장이 완화된다는 사실이다. 결국은 대화를 통해서 얻으려는 목적이 달성 안되더라도 대화를 하면 긴장이 완화되니까 남북대화는 자주 하는 것이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즉 남북간에 긴장이 완화되는 것이다`(113쪽)는 대목에서는, 저자의 경험상 총화를 빌어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수없이 진행된 남북교류와 협력의 정당성을 확인해 주고 있다.

지나칠 수 없는 몇 가지 미덕

그런데 특히 `민족`과 `통일`문제에 관심있는 이들에게는, 이 책의 진정한 가치와 미덕이 다음과 같이 와닿지 않을까 싶다.

먼저, 1차 자료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이다. 물론 이 책 자체가 1차 자료가 될 수는 없고, 또 내용에도 1차 자료가 아주 많이 인용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에 관계없이 저자가 겪은 정전 역사와 군정위, 판문점에서의 사건들이 생생히 증언되고 있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1차 자료적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이 책은 한번 읽고 잊어버리거나 그냥 서가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꽂혀 있을 책이 아니다. 고기가 씹을수록 맛나듯, 이 책은 읽을수록 새로워지고 도 읽은 뒤에도 서가에 꽂아뒀다가 언제든지 펼쳐볼 만한 책이다. 특히 정전협정과 관련된 사안이나 혹시 매년 6월달의 꽃게잡이 철이 돌아오면 옆에 두고 언제고 참고해야 할 책이다.

다음으로, 이런 류의 책들이 범하기 쉬운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 자신이 서언에서 `단지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이처럼 판문점에서 일어난 일들과 협상 과정에 관해서 책을 발행하는 데 북한측 군정위 간부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못한 점`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그래도 이 책은 불편부당(不偏不黨)하다.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때 미국은 북한과 비공개(비밀) 협상을 했으며, 이 협상은 전적으로 미 국무성이 주관했고 유엔군 총사령관은 직접 지시를 하지 않았다(31쪽)는 곧은 지적이나, 군사정전위 마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한국군 황원탁 소장의 유엔군 정전위 수석대표 임명에 대해 `시기상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솔직히 밝힌 점 등에서, 저자가 왜 북한측 정전위 수석대표로부터 매년 연하장을 받을 정도로 북한측의 신뢰가 두터웠는가 하는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또한 무엇보다, 예상치 못하게 저자의 일관된 민족주의적 관점을 접했을 때의 놀라움이다. 저자는 미 해병 학도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며, 전쟁후 미국으로 가 대학공부를 하고, 미 국방성 정규직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미국시민이다.

역설적으로 고국을 떠나있기 때문에 민족주의자가 될 수 있다지만, 저자는 실제로 민족(북한)과 만나 대화하고 협상했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요소를 갖게 된 것은 아닐까? 저자의 민족주의적 요소의 절정은 이 책의 결론격인  `판문점의 한국화`에서 집약된다.

<JSA-판문점(1953-1994)>은 어렵거나 딱딱한 책이 아니다. 모르거나 궁금했던 사실들을 알게되는 흥미와 진지함이 있다. 그러나 그 흥미와 진지함도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저자의 다음과 같이 교훈성 언명(言明)에 잠시 멈짓해 진다. 사실 우리는 이처럼 어렵고 불안한 한반도에서 50년 동안 살아온 것이다.

"서해와 동해상에는 `군사분계선`이 없고, `비무장지대`는 세계에서 가장 `무장화`되었고, 또 `판문점`엔 `심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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