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수(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정책실장/통일뉴스 편집위원)



1990년대초 문익환 목사는 `통일은 됐어!`라고 외쳤다. 통일을 목표로 해서 힘차게 전진하고 있던 통일운동가들은 문익환 목사의 이런 외침을 느닷없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통일을 열망하는 의지의 강한 표현이라고 받아들였다. 통일운동가들은 너나 없이 `통일은 됐어!`라고 외치며 통일에 대한 의지를 가다듬었다. 우리는 95년 통일원년을 목표로 해서 뜨거운 마음으로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흘렀다. 그렇지만 아직도 통일은 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20-30년 후에 통일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통일보다는 평화공존을 주장하는 한국의 주류여론은 통일은 20-30년 후에 될 것이라는 김대중 대통령의 말에 마음을 놓는 듯하다. 통일논의 자체에 대해서 불온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통일을 20-30년 후에 하자고 하니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다.

각양각색의 통일개념

이미 10여년 전에 `통일은 됐어!`라고 외쳤던 문익환 목사가 살아계신다면 여전히 `통일은 됐어!`라고 외칠 것이다. 통일보다는 평화공존을 희망하는 한국의 주류 여론은 이런 문익환 목사가 참으로 불편할 것이다. 아니 불온하게 볼 것이다.

남녀노소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 부르는데 통일을 논의하는 것을 불온하게 여긴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임에 틀림없다.

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가? 왜 지금 우리 사회의 주류 여론은 통일보다는 평화공존을 희망하는가? 문익환 목사는 왜 통일은 됐다고 외쳐왔는가? 이런 점에 대한 검토가 통일론을 정립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통일인지 물어보면 각양각색이다. 김대중 정부도 통일은 20-30년 후에 하고 지금은 평화가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통해서 `사실상의 통일`을 추구하자고 말한다. 즉 20-30년 후의 통일은 하나의 강력한 통일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뜻하고, `사실상의 통일`을 말할 때는 남북의 결합이 매우 낮은 상태의 통일을 의미한다. 김대중정부가 사용하는 통일의 개념도 이처럼 두가지인 것이다.

국민들은 대체로 통일하면 하나가 되는 통일을 생각한다. 동서독이나 베트남과 같은 방식이다. 한편 분단상태를 빨리 끝내야 한다는 점에서 비롯되는 정서적인 통일을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할 때, 그 통일은 당위이고 목표로서 통일이다.

통일논의를 피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주류여론이 통일보다는 평화공존을 희망하는 것은 크게 보아서 두가지 이유이다. 급속한 통일이 가져올 혼란을 피하자는 것과 다른 하나는 북한에 대한 피해의식이다.

급속한 통일이 가져올 혼란을 피하자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 통일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따라서 통일을 과정으로 바라보고 점차적으로 통일국가를 만들어가면 되므로 통일논의를 피할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어떻게 통일을 이루면 될 것인가를 논의하면 되기 때문이다. `구더리 무서워서 장 못담근다`는 말이 있다. 통일논의를 피하는 것이 더 큰 손실을 가져온다. 급속한 통일을 반대하니까 통일논의를 반대한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평화롭게 공존하는 통일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두체제가 공존하는 통일을 이룰 것인가에 대해서 창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다른 한편 통일논의를 피하는 이유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북한에 대한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피해의식이다. 한국의 여론을 이끄는 세력들 사이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북한에 대한 피해의식이 통일논의를 피하게 만들고 있다. 그들은 북한 체제를 허약한 체제로 판단하고 있고 반면에 남한은 경제적으로 북한과 비교할 수 없이 성장하였으며, 국제적인 지위에서도 남북의 격차는 뚜렷하다고 보고 있다.

남북의 체제비교를 통해서 남한체제의 우월감을 만끽하고 있으면서도 통일논의만 하면 북한에 대한 피해의식이 발동한다. 북한하고 통일을 논의하면 북한은 여전히 적화음모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통일전선전략에 말려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여론 주도층의 시각에서 볼 때는 북한은 남한에 비해서 현저히 열등한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열등감을 극복해서 남한 체제를 자신들이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상당히 전지전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 되어버린다. 이는 객관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경우, 현실가능한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통일논의가 불온한 것이 아니라 여론주도층의 마음이 불안한 것이다.

이들은 문익환 목사 되살아와서 `통일은 됐어!`라고 외치면 혼비백산할 것이다. 문익환 목사가 통일은 됐다고 말한 것은 감상적인 통일관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통일에 대한 의지를 가다듬기 위한 선동적인 언술을 구사하기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문익환과 북측 조평통의 합의

문익환 목사의 `통일은 됐어!`라는 외침 속에는 매우 실사구시적인 통일관이 담겨져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문익환 목사가 1989년 4월 2일 평양에서 당시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장 허담과 발표한 `문익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공동성명`의 의미를 분석해야 한다.

문익환 목사는 1989년 4월 2일 평양에서 당시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장 허담과 `문익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이 성명은 크게 세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 정치군사문제와 교류협력을 병행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북측은 정치군사문제를 우선할 것을 주장했고, 남측은 교류협력을 우선할 것을 주장했는데, 남북의 입장 차이를 조율한 것이다. 1991년에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던 남북고위급 회담의 정식 명칭이 `남과 북의 정치군사문제 해결과 교류협력을 위한 고위급 회담`이었다는 사실에서 문익환 목사의 방북 의미는 더욱 빛난다. 둘째, 연방제통일을 서서히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북측과 합의하였다. 문익환 목사와 허담 위원장은 공동성명에서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선택해야할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통일방도가 되며 그 구체적인 실현방도로서는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할 수도 있다는 견해에 일치를 보았다"고 밝혔다. 기본원칙으로서 `공존`과 과정으로서 `점차성`이라는 측면에서 합의를 이룬 것이다.

셋째, 남북 당국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익환 목사와 허담 위원장은 "이상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합의가 금후 남북 사이의 다각적인 공식대화에서 협의의 기초가 될 수 있고 가교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인정하고 그 실천대책을 남북 당국과 제 정당, 단체들에게 건의한다"고 덧붙인다. 1991년에 김일성 주석이 느슨한 연방제를 밝힌 것은 문익환 목사와 허담 위원장이 합의한 연방제의 점차적인 실현방법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기본원칙으로서 `공존`과 과정으로서 `점차성`

문익환-허담 성명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성명의 내용을 북한의 당국과 제정당에 건의한 결과인지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으나, 문익환-허담 성명에 뒤이어 1991년 신년사에서 김일성 주석은 이른바 `느슨한 연방제`를 제안한다. 김일성 주석은 "우리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보다 쉽게 이루기 위하여 잠정적으로는 연방공화국의 지역자치 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며, 장차로는 중앙정부의 기능을 더욱 높여 나가는 방향에서 연방제 통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하는 문제도 협의할 용의가 있습니다"고 말함으로써 북한의 연방제는 지방정부의 권한이 강한 매우 분권적인 방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91년의 신년사에서 밝힌 연방제가 91년 당시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심의위원장이었던 윤기복의 발언과 91년에 당시 조평통 부위원장이었던 한시해의 잇단 발언에 의해서 느슨한 연방제라고 불리워진 것이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북한의 통일정책이 남한당국의 정책과 보다 쉽게 합의할 수 있는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문익환 목사와 허담 성명, 김일성 주석의 1991년 신년사 등에 담겨 있는 것은 `공존과 점차성의 원칙`이다. 통일에 대한 이 `공존과 점차성의 원칙`은 남한 역대 정부의 통일방안인 남북연합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통일의 `점차성`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김일성 주석이 1994년 4월 문명자씨와 `월간 말` 인터뷰에서 "궁극적으로는 민족이 하나 되어 오스트리아나 스위스 같은 중립적인 독립국가를 만들면 자자손손 번영할 것이다"고 말하면서 "그때까지는 상당히 시일이 걸릴 것이다"고 덧 붙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1국가 건설이 2국가 확립보다 쉽다는 아이러니

즉 공존과 점차성이라는 내용에서 볼 때 남북의 통일방안은 공통성이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런 내용의 통일방안을 북은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두고 연합하여 하나의 통일국가를 세우자고 표현하고 있다. 즉 북한의 이와같은 주장은 내용적으로는 `공존과 점차성`을 담고 있지만 형식적으로는 `1민족 1국가 2체제 2정부`이다. 반대로 남한의 주장은 `공존과 점차성`을 담고 있으면서 `1민족 2국가 2체제 2정부`이다. 즉 북의 주장이 1국가를 뜻하고 남의 주장이 2국가를 뜻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표현상의 차이일 뿐이다.

실제로 북이 주장하는 1국가가 강력한 국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북한은 2001년 신년공동사설에서 "온 민족이 화합하고 하나로 단결하면 그것이 곧 우리가 바라는 통일이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2000년 10월 6일 노동신문은 남북 현정부의 정치, 군사, 경제의 권한을 제도를 그대로 두고 `민족통일기구`를 만드는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즉 북한이 주장하는 1국가는 매우 추상적인 차원에서 통일을 상징하는 정도이다.

남한은 두 개의 국가인 국가연합단계를 거쳐서 하나의 국가인 완전통일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렇지만 남한의 국가연합단계는 남북정상회의, 남북각료회의, 남북 평의회를 구성하도록 되어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두 개의 국가를 말하고 있는 남한측 국가연합안이 하나의 국가를 말하고 있는 북한측 민족통일기구보다 결합력이 더 강한 통일방안이 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두 개의 국가를 추구하는 남북연합안에서 제기한 남북정상회의, 남북각료회의, 남북 평의회를 구성하는 것이 정치, 군사, 외교권을 양쪽 정부에게 그대로 두고 민족통일기구를 세우겠다는 북한식 하나의 국가 건설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의 1국가안이 남한의 2국가안보다 더 강력한 결합력을 가진 것이라거나, 북한의 1국가 건설이 남한의 2국가보다 더 어려운 문제라는 상식이 뒤집어지는 것이다.

이제 다시 `통일은 됐어!`

그렇다면 하나의 국가냐, 두 개의 국가냐 하는 문제는 정치학이나 국제법적에서 다루는 국가의 일반적인 성격과는 상당히 다른 논의가 되어버린다. 통일지향성을 대내외적으로 상징하는 성격인 것이다. 따라서 진보진영에서나 보수진영에서 북한의 `1민족 1국가 2체제 2정부` 방안과 남한의 `1민족 2국가 2체제 2정부` 방안이 차이가 있다고 논쟁하는 것은 이미 실사구시적인 논의가 아니다. 공존과 점차성에 기초한 남북 통일방안의 내용성 공통점을 살리는 통일방안을 표현할 언술체계를 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서 문익환 목사가 `통일은 됐어!`라고 외쳤던 것을 다시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문익환 목사가 통일이 됐다고 말한 것은 `공존과 점차성`이라는 남북통일방안의 공통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남북이 공존하면서 점차적으로 통일을 완성해 나가는 것을 합의한다면 통일은 되었다고 본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말하는 `사실상의 통일`, `과정으로서의 통일`과 북한이 2001년 신년사에 말한 `온 민족이 화합하고 하나로 단결하면 그것이 곧 우리가 바라는 통일이다`는 말속에 담겨 있는 공통적인 의미는 통일을 완성의 개념이 아닌 출발의 개념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문익환 목사가 `통일은 됐어!`라고 외쳤던 것도 통일을 완성의 의미가 아닌 출발의 의미로 바라본 것이다.

이제 정말 `통일은 됐어!`라고 외칠 때가 되었다. 615 남북공동선언을 실천하고 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있도록 거족적으로 준비하면 우리는 통일과정으로 첫발을 내딛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통일과정의 출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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