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원` 작곡가 안병원 옹이 `북한 어린이돕기 자선전`을 오늘(22일) 서울 프레스 센터 1층 서울 갤러리에서 개최했다.[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89년 `통일의 꽃` 임수경씨의 방북으로 남북, 해외에 널리 알려지고, 불리워지고 있는 `우리의 소원`.
이 노래의 작곡가인 안병원(77세) 옹이 `북한어린이돕기 자선전`을 22일부터 오는 27일까지 서울 프레스센터 1층 소재 서울 갤러리 제 1전시실에서 개최하고 있다.
▶개막 행사를 갖고 있는 모습.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이번 전시는 안병원 옹이 2년 전부터 직접 그린 유화 61점이 전시됐으며, 이 전시의 수익금은 모두 한국복지재단을 통해 북한 어린이들을 돕는데 사용된다.
이번 전시는 지난 2001년 북측 문화성으로부터 평양축전에 참가해 `우리의 소원`을 지휘해 줄 것을 부탁받고 아내 노선영(67세)과 함께 `봄 예술대축제`에 참가한 후 북의 어린이들을 돕기로 결심하면서 마련되게 되었다.
▶이번 전시에는 61점의 유화가 전시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한국복지재단 김석산 회장은 "이번 전시의 수익금 전액을 북한에 지원하기로 했다"며 "이런 자리를 통해 통일을 앞당길 것"이라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우리의 소원` 노래는 지난 48년 3.1절 기념 어린이 노래극을 준비하며 작곡한 곡으로 이 노래의 노랫말은 안병원 옹의 선친인 안석주씨가 맡아 부자의 합작품이다.
민주평통 김민하 수석부의장은 "지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한후 남북의 모든 지도자들이 이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불렀던 감회를 가지고 있다"며 "이번 전시에서 뜨거운 동포애와 평화 통일 염원이 절절히 느껴진다"고 축하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또한 안병원 옹은 지난 2000년 재일본 조선문학예술가동맹 고문인 원로아동문화가 김아필씨가 쓴 노랫말에 곡을 붙여 남북 합작품인 `우리 동네 꽃동네`를 만들기도 했다.
안병원 옹은 지난 90년부터 유화를 그리기 시작해 95년 첫 개인전을 가진바 있으며 이번 전시가 두 번째이다.
"많은 후원으로 북한 어린이를 도울 수 있도록 부탁드린다"는 안병원 옹은 "너무 고마워서 말문이 막힌다"고 이번 전시에 대한 감회를 전했다.
▶전시장을 찾은 아이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안병원 옹.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현재 안병원 옹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상임위원과 한국복지재단 토론토후원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이날 오후 5시 전시관에서 가진 개막식 행사에는 민주평통 김민하 수석부의장을 비롯한 각계의 인사 150여명이 참석해 축하해 주었고, 테너 박인수(서울대) 교수를 비롯해 벨칸토 여성합창단 등이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고 안병원 옹이 직접 지휘했다. 지휘에 앞서 안 옹은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감상해달라"고 참석자들에게 말했다.
▶`우리의 소원`을 직저 지휘하고 있는 안병원 옹.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한편 이날 전시회에서는 작품이 즉석에서 20여점이 판매되는 등 관람객들의 반응도 매우 좋았다.
<미니 인터뷰> 안병원, "노래로는 통일했지만..." 한국복지재단이 북의 육아원 5곳을 돕고 있고 이북을 다녀온 많은 분들이 기아에 시달리는 어린이들에 대해 얘길 많이 했다. 그래서 2년 전에 북에 다녀와서 한국복지재단 회장과 의논해 내가 그린 그림을 기증할테니 전시회를 하자고 했다. 오늘 보니 성과가 좋다. 많은 분들이 날 도와 준거다. 전시회의 수익금은 북한 어린이에게 우유와 옷 등의 물품을 보낼 것이다. □ 방북은 어떻게 하게 됐나? 2년 전인 2001년 김일성 탄생을 축하하는 4월 축전에 `우리의 소원`의 지휘를 맡아달라고 해서 북한의 문화성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나 혼자는 갈 수 없다고 얘기해서 부부동반으로 처음 가게 됐으며, 북에서 여비, 식비 등의 경비를 다 부담했다. 북에 가서 문화관계, 예술관계를 구경시켜 달라고 요청해 관련 어린이들을 만났다. 하지만 가정집에는 못 들어가게 해 다른 아이들을 만날 수 없었다. □ 방북시 들었던 생각은? 허무했다. 벽에는 온통 선전문구가 있었고 두 사람(김일성, 김정일)의 동상들이 보였다. 이 두 가지 인상뿐이다. 음악하는 애들과 무용하는 애들을 만나 봤는데 여기 애들과 똑같다. 지하철도 타 봤는데 잘 해 놨다. 지하철에서 우리를 안내하던 안내원이 `우리의 소원` 작곡가라고 소개하니 주변사람들이 다 몰려들었다. 다들 이 노래를 알고 있었다. 일반 시민들이 통일을 염원하는 것은 우리와 똑같다. `우리의 소원` 노래 하나만은 진짜 통일된 듯 했다. 남녀노소 다 잘 부르고 어떤 노인은 내 손을 잡고 `내 맘을 대변해 주는 노래를 어떻게 지었느냐`고 얘기하기도 했다. 내가 노래로서는 통일을 했지만 경제적으로 도와주고 싶은데 여유는 없고, 마침 그림을 그리니 이를 통해 한번 해보고 싶어서 재단과 논의하게 됐다. □ `우리의 소원`은 어떻게 작곡하게 됐나? 그때는 교회에 열심히 했다. 성가대도 하고 애들 노래도 가르쳐 주고 방송국도 들어가고. 처음 가사를 받아 보고 금방 작곡이 안됐다. 1주일정도 생각하고 생각하며 작곡했다. 그때 마음과 똑같다. 일정 때 억압당하고 비참했는데, 감사하고 힘이 되는 데까지 나라를 위해 하겠다는 마음으로 했다. 89년 임수경이 방북한 후 계속 북쪽에서 초청을 했는데 계속 안 갔다. 내 고향이 서울인데 남북 이산가족의 교류가 있은 뒤 가겠다고 해서... 이산가족의 고통이 얼마나 큰가. □ 윤이상 선생님과는 친교가 있었나? 잘 안다. 윤이상 씨는 한국에 오고 싶어했는데 한국에 들어오면 서약을 해야 하는데 고집이 세서 서약을 안했다. □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독일 가기전 주로 중고등학교 음악 선생이 모이는 종로 다방에서 얘기를 많이 했다. 윤이상씨가 고문을 당해 다리를 절었는데 항상 쑤시고 아파했다. 그래서 한국에 가면 침이라도 맞고 싶다고 해서 도와주려 했는데 결국 안 됐다. □ 이번 전시 이후의 앞으로의 계획은? 아직은 없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데 너무 힘이 들었다. 잠을 한 잠도 못잤다. 잘 될지 걱정이 돼서. □ 이후의 바램이 있다면? 생존해 있는 동안 통일을 이룰지 걱정이다. 통일이 되면 판문점에서 남북 공동 합창단을 꾸려 지휘하고 싶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참여한 남북공동합창단과 함께. 윤이상 선생과도 그런 꿈을 얘기했었는데, 비용도 있고 윤 선생 건강도 안 좋아 못했는데 앞으로 꼭 해보고 싶다. 현재 대한민국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상임위원 |
[이모저모]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사인을 해주고 있는 안병원 옹.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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