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선 통신원 (2023 전국미군기지 자주평화원정단 단원)

 

전국미군기지 자주평화원정단. 원정단은 대추리 역사관 안에서 단체사진을 찍은 뒤 하루 일정을 마쳤다. [사진-통일뉴스 박희선 통신원]
전국미군기지 자주평화원정단. 원정단은 대추리 역사관 안에서 단체사진을 찍은 뒤 하루 일정을 마쳤다. [사진-통일뉴스 박희선 통신원]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색동옷 갈아입은 가을 언덕에 붉게 노을이 타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동요 <노을>의 첫 소절. 1984년 MBC 창작동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뒤 즐겨 불렀던 이 곡이 평택 대추리를 담은 노래라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 <노을>은 더 이상 아름답고 서정적인 노래가 아니라 가슴 아픈 노래가 되고 말았다.

이제 ‘허수아비 팔 벌려 웃음 짓고 초가지붕 둥근 박 꿈 꿀 때 고개 숙인 논밭의 열매 노랗게 익어만 가는’ 고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전 세계 최대의 미군기지가 들어앉아 있을 뿐이다.

평택 캠프 험프리스 정문 모습. [사진-통일뉴스 박희선 통신원]
평택 캠프 험프리스 정문 모습. [사진-통일뉴스 박희선 통신원]

2023 자주평화원정단이 첫날 일정으로 찾은 곳은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와 미군기지에 삶의 터전을 빼앗겼던 대추리 주민들이 공동체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애쓰고 있는 팽성읍 노와리의 대추리 평화마을이다.

7km 넘게 미군기지 주변을 걸었지만 그것은 기지의 반밖에 볼 수 없는 거리였다.

수많은 송전탑과 철조망이 주위를 에워싼 캠프 험프리스는 사격연습장에서 울리는 총성 소리와 막 이륙하는 헬기가 보이지 않았다면 그저 골프장과 멀리 보이는 멋진 건물들이 있는 어마어마한 공간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캠프 험프리스 안의 모습. 하얀색 벽이 보이는 곳은 소형무기범위 이동훈련장. 원정단이 답사하는 시간에도 사격 소리가 계속 났다. [사진-통일뉴스 박희선 통신원]
캠프 험프리스 안의 모습. 하얀색 벽이 보이는 곳은 소형무기범위 이동훈련장. 원정단이 답사하는 시간에도 사격 소리가 계속 났다. [사진-통일뉴스 박희선 통신원]

기지 안 중간중간 남아있는 물웅덩이에 앉은 철새들과 멀리 고라니가 보이는 풀밭, 그리고 옆에 높이 우뚝 선 흰색 물탱크에 쓰여 있는 ‘Fight Tonight / 캠프 험프리스’라는 구호는 이질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해설을 맡은 임윤경 평택평화센터 센터장의 “평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미군기지와 연관이 있다”는 말을 증명하듯, 미군기지와 평택항을 잇는 철도가 완성되어가고 있었고 평택항으로 가는 가장 빠른 도로를 만들기 위해 통행량과는 무관한 ‘국제대교’도 운행 중이라고 한다.

용산기지 이전 비용의 6% 밖에 부담하지 않은 미군기지를 위해 사회기반시설이 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어찌 평택뿐이겠는가. 대한민국의 모든 땅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언제든 미군이 필요하면 내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책이나 문서가 아니라 눈앞의 현실로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캠프 험프리스가 있는 평택이다.

캠프 험프리스를 답사 중인 모습. [사진-통일뉴스 박희선 통신원]
캠프 험프리스를 답사 중인 모습. [사진-통일뉴스 박희선 통신원]

자주평화원정단이 다음으로 찾은 곳은 <대추리 평화마을>이었다.

대추리 주민들은 1940년 일본에 의해, 1951년 미군에 의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대추리에 정착해 피땀 흘려 갯벌을 개간해 살만한 땅으로 가꾸고 벼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2000년대 초중반 미국의 동북아 정책 변화에 따라 기지를 확장하려는 주한미군의 요구와 그것을 집행하는 한국 경찰과 군인에 맞서 4년여의 가열찬 투쟁을 벌였지만 끝내 고향을 미군에 내어줄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이 내건 요구는 두 가지였다고 한다. 투쟁 과정에 발생한 구속자 석방과 마을 주민들이 이전하는 곳의 이름을 대추리로 해줄 것.

대추리 역사관에서 설명 중인 신종원 이장. [사진-통일뉴스 박희선 통신원]
대추리 역사관에서 설명 중인 신종원 이장. [사진-통일뉴스 박희선 통신원]

2007년 4월 고향을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주민들은 ‘매향제’를 지내며 대추초등학교 운동장에 마을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글귀를 함께 묻었다.

캠프 험프리스 안 어디가 대추리 마을이고 어디가 대추초등학교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지금, 사진으로만 남아있는 그 글귀들은 우리에게 주한미군에 의해 고통받는 이 땅 민중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도 선명히 보여주었다.

미군이 이 땅에서 나가는 날, 영혼이라도 고향을 찾아가겠다는 대추리 주민들의 염원은 지금도 우리에게 숙제로 남아 있다. 단지 법적 해결이나 이성적 호소만으로 가능한 일이었다면 이미 이루어졌을 일일 것이다.

대추리 역사관 안. 숫자 44는 현재 대추리로 이주한 주민 가구수를 의미한다. [사진-통일뉴스 박희선 통신원]
대추리 역사관 안. 숫자 44는 현재 대추리로 이주한 주민 가구수를 의미한다. [사진-통일뉴스 박희선 통신원]

하지만 미군은 점령군이자 자신들의 패권을 위해 필요하다면 언제든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이 땅에 주둔하고 있다. 올해 들어 더 심각해진 한미일전쟁연습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미국은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끝까지 자기 패권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벌일 것이다. 캠프 험프리스와 여전히 아픔인 대추리 주민들의 삶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민족과 미국의 물러설 수 없는 대결에서 반드시 승리해서 다시는 그런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 2023 자주평화원정단 첫날 활동이 우리에게 심어준 결심이었다.

“이 땅은 미국의 전쟁기지가 아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