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일성(一醒) 이준(李儁, 1859~1907) 열사는 네덜란드 헤이그시에서 순국한다. 1907년 7월 14일이다. 그의 부실(副室) 이일정(李一貞, 1876~1935)은 1905년 봄에 서울 안현(지금 안국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부인상점'을 개업한다. 이일정 여사는 안현부인상점을 개설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기업인이라는 기록을 갖게 된다.

필자는 이준 열사의 순국 100주년을 맞던 2007년에 이준 열사가 거처하고 그의 처 이일정 여사가 ‘안현부인상점’을 개업한 장소를 찾기를 희망하였으나, 기념사업회의 전 모 회장의 독단으로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7년 순국 110주년을 맞아, 그 아쉬움을 갖게 되었고 당시 민족문제연구소의 박한용 실장에게 하소연한 바 있다. 이후 서울시 박원순 시장의 관심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순우 연구관의 노력으로 현재의 안국동에 있는 하나은행 안국동지점과 그 옆의 안국동 153번지가 ‘안현부인상점’ 자리라는 것이 밝혀졌고, 2017년 7월 14일 그 자리에 표석을 세웠다.

이준 열사의 「한성부 호적표」, 1906년 6월, 당시 이준 열사가 살던 “한양부 안국방 소안동 안현 11통 9호”의 호적표이다. 그 주소의 집은 기와집 6칸에 초가집 9칸으로 합하여 15칸이며, 그 집에는 남자 2명과 여자 3명 등 모두 5명이 거주하였고, 고용한 사람은 남자 1인과 여자 1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 열사의 「한성부 호적표」, 1906년 6월, 당시 이준 열사가 살던 “한양부 안국방 소안동 안현 11통 9호”의 호적표이다. 그 주소의 집은 기와집 6칸에 초가집 9칸으로 합하여 15칸이며, 그 집에는 남자 2명과 여자 3명 등 모두 5명이 거주하였고, 고용한 사람은 남자 1인과 여자 1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안현부인상점 터. 하나은행 자리와 ‘안국153’ 빵집 자리에 안현부인상점이 있었다. ‘안국153’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3층 건물로 실내가 1930년대 모습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안현부인상점 터. 하나은행 자리와 ‘안국153’ 빵집 자리에 안현부인상점이 있었다. ‘안국153’은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3층 건물로 실내가 1930년대 모습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현재 하나은행 안국동 지점 자리는 덕성학원(德成學園)의 소유이고, 안국동 153번지는 개인 소유의 3층 건물이 남아 있다. 바로 이 자리를 서울시나 국가가 매입하여 이준 열사와 이일정 여사의 구거지로서 ‘이준‧이일정 기념관’을 세운다면, 필자가 지난 40여 년간 수집한 이준 열사와 그 동지들의 유물 500여 점 가운데 중요한 150점을 영구 기탁할 수 있다.

현재 서울에 이준 열사의 기념관을 세울 수 있는 장소는 세 곳이 있다. 첫 번째 장소가 바로 이곳 안국동이고, 두 번째 장소는 ‘국민교육회’가 있던 돈화문 인근이며, 세 번째 장소는 수유리의 이준 열사 묘역 입구이다. 그러나 이일정 여사와 이준 열사를 함께 기릴 수 있는 가장 유서 깊은 장소는 안국동의 구거지가 유일하다. 서울시의 특별한 관심을 바란다.

그런데 ‘리준만국평화기념관’을 세울 서울 이외의 장소로는, 1907년 3월에 이준 열사가 시도한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제주도 함덕이라든가 삼도동, 또는 고향인 북청을 오가던 길목인 경기도 포천시나 강원도 철원군, 아니면 이준 열사가 1907년 4월 국내에서 마지막 날을 보낸 부산 서구의 북산 인근에 세우는 것도 한 방편이 될 수 있겠다.

한편, 헤이그의 ‘이준평화기념관’을 설립자 이기항‧송창주 관장에게 우리 재단이 합당한 대우를 해주고, 그 기념관을 인수하였으면 희망한다. 그리고 우리 재단에 여력이 있다면, 남북이 통일로 가는 과정이 시작되면 이준 열사의 고향 북청의 생가 지근(至近)에도 이준 열사를 기리는 문화관을 세웠으면 희망한다.

「리준열사 순국도」, 2007년, 유화.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이북의 화가에게 주문하여 그린 자결 상상도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리준열사 순국도」, 2007년, 유화.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이북의 화가에게 주문하여 그린 자결 상상도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준 열사의 행적은 이북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북의 김일성(金日成, 1912~1994) 주석은 청년시절이던 1930년대 초에 「혈분만국회」와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혁명극을 만들었고, 김정일(金正日, 1942~2011) 위원장은 1980년대 중반에 「돌아오지 않는 밀사」와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예술영화로 만들게 한 바 있다.

또한 이준 열사의 외아들 이용(李鏞, 1888~1954) 장군은 이북에서 초대 도시경영상을 지낸 열혈 독립운동가이다. 그러니 만치 이준 열사를 기념하는 문화관을 북청 시내나 함경남도의 도청 소재지 함흥에 건립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소동파 작「書李世南所畵秋景」, 이준 열사 서(書). [사진 제공 - 이양재]
소동파 작「書李世南所畵秋景」, 이준 열사 서(書). [사진 제공 - 이양재]

書李世南所畵秋景

                                         - 蘇東坡(소동파)

秋水參差落漲痕 (추수참차락창흔)
가을 들판의 물은 들쭉날쭉하게 흔적을 남겼고

疎林欹倒出霜根 (소림의도출상근)
메마른 숲은 쓰러질 듯 흰 뿌리가 드러났네.

扁舟一棹歸何處 (편주일도귀하처)
작은 배 노 하나로 어디로 돌아가는가?

家在江南黄葉邨 (가재강남황협촌)
집 있는 곳은 강남 황엽촌인데...,

국내에서 어느 지자체가 나서든 필자는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이준 열사 관련 자료를 영구 기탁할 수 있다. 박물관 등록 여건에 100점 이상의 소장품을 요구하는데, 우리 재단은 이미 500여점을 상회하게 수집하였으니, 두 곳 이상에 기념관을 세운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지난 5월 18일 오후에도 새로 구입한 1점의 독립운동가 자료가 재단 사무실로 도착하였다. 필자가 이준 열사와 그 동지들을 위시한 독립운동가 자료를 지속해서 모으고 관리하는 이유는, 힘들더라도 우리 재단이 ‘리준만국평화기념관’의 설립을 목표로 하는 데 있다. 독자분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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