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영웅은 나라의 방패와 성이요 인민의 지휘관이다. 영웅을 냉담히 대우하는 것은 나라의 방패와 성을 해치고 인민의 생명을 멸시함이니, 어찌 생존의 기초와 활동의 무대를 얻겠는가? 이는 우리 나라와 우리 백성이 오늘의 이 지경에 빠져든 원인이다.”

자기 나라의 역사적 영웅을 냉대하는 나라와 백성은 필경 망할 수밖에 없다는 백암 박은식의 탄식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당시의 참담한 심경이 담겨있다. 백암은 “4천년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고구려 시대의 영웅들을 당대로 호출해 ‘대륙사관’의 기틀을 다졌다. <천개소문전>과 <명림답부전> 등이 그것이다.

▲ 정호일, 『홍익인간의 꿈, 소설 최영 장군』(전 3권), 도서출판 우리겨레, 2020. [자료사진 - 통일뉴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지 못하고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을 어떻게 마주하여야 할까? 과연 21세기의 한국 사회는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홍익인간의 꿈, 소설 최영 장군』(전 3권, 도서출판 우리겨레)의 저자 정호일은 고려말 요동 정벌을 추진했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라는 ‘배신’으로 뜻이 꺾이고 죽임을 당한 명장 최영 장군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앞에 다시 호출했다.

부친이 유언으로 남겨준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좌우명으로 유명한 고려말 무장 최영(1316~1388) 장군은 “말 배우는 거리의 아이도 그 이름을 다 안다(學語街童盡識名)”고 할 정도의 영웅이었지만 지금은 민간의 무속신앙에서나 그 명성이 남아있는 정도다.

저자가 『고려사』와 『동국통감』에 철저히 기초한 ‘장편대하역사정치소설’이라고 명명하듯 이 책은 3권으로 최영 장군을 조명한 대하소설이지만 약간의 소설적 상상력을 제외하곤 역사책(史書)에 가깝다.

원나라의 속국에 머물던 고려 후기 공민왕 시기부터 명나라가 세력을 넓혀가던 우왕 시기까지의 정치군사적 상황 속에서 오랜 기간 문무 관직을 역임한 최영 장군의 ‘홍익인간과 요동 수복의 꿈’을 그린 역사서인 셈이다.

따라서 당시 왜구가 침략하면 방어를 위해 왕이 무장들을 임명하고, 원나라와 명나라에 여러 명목으로 사신들을 파견하는 등의 세세한 역사적 ‘사실(史實)’들이 최영 장군의 재임 기간 내내 깨알같이 기록돼 있다는 점이 일반 대하소설류와 크게 다른 점이다.

끊임없는 왜구의 침탈과 방어의 성공과 실패, 원나라의 난폭한 군림과 이에 발맞춘 친원세력의 발호, 친명세력의 등장과 무기력한 사대주의가 지치도록 반복되는 고려말의 정치군사 상황이 리얼한 정도를 넘어 독자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하다. 실제 당시의 상황이 그러했기에.

저자는 이 같은 난세에 최영 장군이라는 영웅이 어떻게 자신의 뜻을 키워가고, 지조를 지키며 마침내 요동 정벌을 성사시켰는지, 그리고 공민왕과 우왕의 한계와 이성계의 배신으로 좌절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역사적 사실들을 따라 추적한다.

여기에 한단선사와 고군기, 단고승 등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단군조선의 홍익인간 정신의 맥을 잇고, 유불선을 아우르는 우리 전통의 풍류도를 체화한 선인(仙人)으로서 최영 장군을 자리매김한 점이 이 대하소설의 특색이랄 수 있다.

“단군조선의 홍익인간의 정신을 구현한 풍류도는 최치원 선인의 말씀대로 자체에 삼교를 다 포함하고 있는 탁월한 사상인데, 어찌하여 우리 선대의 사상을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리고 각기 유고, 불고, 도교의 추종자로 전락했단 말인가? ... 홍익인간의 세상은 요동을 수복하여 고려를 중흥시켜서 강국으로 우뚝 세워야 가능했다.”(3권 329~330)

성세의 영웅 세종대왕과 난세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없다면 조선시대는 우리에게 얼마나 허전할까? 고려말 난세의 영웅, 그것도 결국 실패한 영웅 최영 장군의 길을 곱씹어 보는 일이 과연 지루하고 고리타분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미중 세력교체기에 처한 오늘의 한반도, 그것도 남과 북으로 갈라져 각기 다른 대외노선을 취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최영 장군이 던진 ‘단군조선의 홍익인간 정신’의 화두를 실현하는 길은 무엇일지 저자는 독자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단군 왕검』(전 2권, 리베르, 2009), 『천손의 나라, 소설 광개토호태왕』(전3권, 우리겨레, 2001) 집필 당시 사료의 부족에 목말랐던 탓일까? 저자는 『홍익인간의 꿈, 소설 최영 장군』에서는 사료에 파묻혀 정작 ‘소설’의 긴장감과 재미는 뒤로 미뤄놓은 것 같다. 욕심이라면, ‘소설’ 최영 장군을 한 권으로 다시 출간해 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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