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국내의 조선공산당 창당과 1,2차당의 파괴

해방 후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최대의 조직역량을 확보한 것은 조선공산당이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사회주의·공산주의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조직 역량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선 내에서는 짧은 기간 동안 조선공산당이 비밀리에 조직되어 활동했으나 일제에 의해 조직이 파괴된 이후 해방 전까지 통합된 조선공산당 조직을 재건하지 못하였고, 공산주의운동은 여러 세력들이 분산된 형태의 다양한 그룹으로 존재했다.

그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역량을 갖고 있었던 것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경성콩그룹이었다. 그러나 이 경성콩그룹조차도 1941년 중순 와해되면서 조직을 유지하지 못하였다. 조직원들이 대부분 감옥에 있거나 최고 지도자였던 박헌영은 전라도 광주의 벽돌공장 노동자로 위장한 채 숨어 있어야 했다. 일제 말기 조선 내에서는 경성콩그룹을 비롯한 여러 소그룹들이 존재했고, 적색노조와 적색농조 등 대중운동과 결합된 형태로 잠복해 있었다. 일제 말기 국내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에 대해서 간략히 돌아보도록 하자.

1925년 4월 17일 오후 1시 서울 시내 번화가에 자리잡은 중국음식점 아서원(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서 19명의 사람들이 모여 조선공산당(조공)이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일본 경찰이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조선기자대회 등에 감시망을 집중하고 있는 틈을 타서 조직 결성에 나선 것이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김재봉, 조봉암, 김찬, 김약수, 주종권, 조동호, 박헌영 등 화요회와 북풍회의 핵심멤버들이었다. 반면, 당시 사회주의운동의 주요 단체의 하나로 화요회와 경쟁 관계에 있었던 김사국, 이영 등의 서울청년회 계열은 배제되었다. 그 때문에 이 제1차 조선공산당에는 ‘화요회공산당’이란 좋지 않은 이름이 따라 다니기도 한다.(주1)

제1차 조선공산당은 비서부(책임비서 김재봉), 조직부(조동호), 선전부(김찬), 인사부(김약수), 노농부(정운해), 정치경제부(유진희), 조사부(주종건) 등 7인 중앙집행위원으로 지도부를 꾸렸다. 4월 18일에는 당의 외곽단체 고려공산청년회(공청)가 조직되었다. 책임비서 박헌영, 조직부 권오설, 선전교양부 임원근, 정치 김찬, 조사 홍증식, 연락 감단야, 국제 조봉암이 선정되었다.(주2) 5월 조선공산당은 조동호를 대표, 조봉암을 부대표 겸 공청대표로 삼아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해 모스크바로 파견했다. 그러나 제1차 조선공산당은 대중 속에 뿌리를 내리기도 전인 1925년 11월 말 이른바 ‘신의주 사건’(신의주의 공청원들이 술을 마시다가 싸움이 붙는 바람에 경찰에 조직이 탄로난 사건)이 터지면서 지도부가 대부분 검거되고 조직이 와해되었다.(주3)

이후 조선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은 3차에 걸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다.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한 2차당은 1차당의 와해 직후인 1925년 12월 서울에서 극비리에 재건 활동에 들어갔다. 조선공산당 신임중앙집행위원회는 1926년 3월 코민테른에 146명의 당원과 119명의 후보당원으로 2차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다고 보고했다. 공청은 정회원과 후보회원을 합쳐 527명이었다. 당지도부는 책임비서 강달영, 내무부 이준태, 조직부 김철수, 선전부 이봉수, 검사부 홍덕유 등이었다. 역시 화요회 중심의 당조직이었다. 3월 31일 코민테른 집행위는 조선공산당을 정식지부로 승인했다.

▲ 조선공산당 검거와 재판을 다룬 당시의 신문기사(1927.9.13.일자 동아일보 보도). 이 사건은 1925년 말에 일어났으나 일제의 보도 통제로 전혀 보도되지 않다가 1927년에야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책임비서 김재봉을 비롯한 재판 피고인에 대한 사진과 조직표가 신문 전면을 채우고 있다.

2차 강달영당은 1차당과는 달리 민족주의자들과의 민족통일전선에 유연한 입장을 취했다. 강달영은 노농총동맹 상무집행위원의 직함으로 민족주의 세력들과 접촉을 했다. 1926년 3월 10일 그는 천도교 권동진파(권동진), 사회운동자파(강달영), 기독교파(유억겸·박동완·오상준), 민족주의 비타협파(신석우·안재홍) 등과 비타협적인 민족해방운동 단체의 조직문제를 논의하였다. 단체 조직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이러한 시도의 연장선상에서 6.10만세운동이 추진되었다.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5.1메이데이 기념시위를 포기하고 장례일에 맞춰 6.10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한 것이다. 당의 중앙집행위원 겸 공청책임비서 권오설이 책임자로 선정되어 6.10운동을 준비했다. 그러나 1차당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권오설이 6월 7일 체포되면서 시위운동에 차질이 생겼다. 6.10만세운동은 처음 예상했던 만큼은 아니었으나 수만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전국에서 전개되었다.(주4)

6.10만세시위운동과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7월 25일까지 2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심문투쟁 덕분에 공산당 사건은 축소되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혹독한 악형, 고문 때문에 몇 번씩이나 죽다가 되살아났는데, 오직 당을 위하여 생명을 희생하겠다는 각오 아래서 이 사건을 축소”시키는데 성공했다. 책임비서 강달영의 체포에 혈안이 된 일제에 그의 흔적이 포착된 것은 7월 초였다. 강달영은 일제의 끈질긴 추적으로 7월 17일 체포되었고, 일제가 암호를 해독하면서 7월 22일부터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일었다. 전국에서 49명의 당원이 체포되었고, 이로써 조선공산당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주5)

▲ 1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재봉(1928.1.21. 서울서대문형무소)과 1925년 12월 7일의 비밀편지(사진=임경석, 국사편찬위원회, 한겨레21, 제1262호, 2019.5.16.)

▲ 평상시 강달영, 옥중의 강달영, 일본관헌이 해독한 '비서부일기'(1926.3.17.일자)(사진=임경석, 한겨레21)

3차, 4차당 사건으로 조선 국내 공산당 조직 붕괴

1925〜1926년 1,2차에 걸친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운동가들이 대거 검거되거나 해외로 도피하면서 국내 공산주의 운동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최대의 파벌이었던 화요회(화요파)는 1,2차당 사건과 6.10만세사건으로 대거 검거되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반면 서울청년회(서울파)와 일월회는 이 사건과 관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직역량을 보존할 수 있었다. 1926년 여름 이후 화요파가 약화된 틈을 타 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서울파와 일월회가 경쟁하게 되면서 파벌싸움은 더욱 복잡하고 격렬해졌다.

▲ 서대문 형무소에서 찍은 권오설(1928.2.17.) 모습과 권오설과 김동명이 쓴 1925년 12월 3일자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사건 보고서 첫 페이지(사진=국사편찬위원회, 임경석/ 한겨레21, 1265호, 2019.6.6.)

▲ 경성주재 소련총영사관 건물(왼쪽), 적기 게양식(1925.9.24.).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 권오설은 이곳을 통해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았다.(사진=동아일보, 한국근대외교사전/ 한겨레21, 1265호, 2019.6.6.)

1926년 9월부터 2차 당 사건에서 검거를 피한 김철수와 그의 몇몇 동지들이 후계당을 조직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했다. 김철수는 10월 자신을 책임비서, 일월회원 안광천을 선전부장, 화요회원 오의선을 조직부장으로 하는 임시중앙지도부를 구성했고, 화요파뿐만 아니라 서울파와 ML파, 정우회 등 여러 파벌을 끌어들이고자 노력했다. 1926년 12월 6일 안광천을 책임비서로 하는 새로운 당 지도부가 조직되었다. 조선일보 편집국장이던 김준연이 선전부장, 일월회원 하필원이 조직부장, 상해파의 한위건, 정우회의 양명, 서울파의 권태석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공청 책임비서에는 양명이 선출되었고, 김철수와 고광수는 후계당 조직을 보고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파견되었다.

사회주의 내부의 파벌을 청산하고 여러 세력을 통합한 3차당이었지만 파벌싸움이 끝나지는 않았다. 당에서 요직을 차지하지 못한 서울파는 일월회를 두고 도쿄에서 귀국한 유학생들이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해 아무런 구체적 지식도 갖지 못한 채 추상적인 이론만 숭배하는 거만한 먹물들이라고 끊임없이 비난했다. 이에 맞서 일월회는 서울파가 이론적인 면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공산주의운동을 지도할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일월회와 서울파·화요파 일부가 결합해 ‘마르크스-레닌주의동맹’(ML파)이라는 새로운 사회주의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 때문에 3차 조공당 중앙은 후일 ‘ML파’로 불리게 되었다.

파벌투쟁이 가열되면서 당 지도부에도 잦은 변화가 생겼다. 책임비서가 안광천에서 김준연으로 교체되었고, 다시 일월회원인 김성현(김세연)으로 교체되었다. 책임비서 당시 김준연은 서울파의 사주를 받은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심한 폭행을 당하는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김준연은 후에 자기를 폭행한 사람들이 코민테른이 조공에 보낸 자금의 사용처를 알아내려고 했다고 말했다. 반면 김두정은 『조선공산당소사』에서 이 사건이 일반적인 당권투쟁의 한 부분이었을 뿐이라고 서술했다.(주6)

1927년 12월 21일 서울청년회 지도자 이영은 서울과 지방의 대표들을 소집했고, 이 자리에서 이들은 서울파로 구성된 새로운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이어 서울 춘경원에서 서울파로 구성된 당조직을 결성했다. 일명 ‘춘경원당’으로도 불리는 이 당의 책임비서로 이영이 선출되었고, 정치부, 조직부, 선전부, 검사부의 책임자도 각각 임명되었다. 춘경원당은 1928년 1월 별도의 공청조직도 결성했다. 새 당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해 모스크바로 대표를 파견했다. 서울파 공산당이 별도로 출현함으로써 공산주의운동의 파벌투쟁은 절정에 달했다. 서로가 서로를 팔아넘기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또한 있을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의혹이 제기될 정도로 파벌 싸움의 폐해가 극심했다. 1928년 2월 일제경찰에 의해 제3차 조선공산당(ML당)의 핵심간부들이 검거되었다. 4월에는 서울파 공산당원들 또한 일망타진되었다.(주7)

3차 조공사건에서도 검거를 모면한 조직원이 있었다. 당조직 지도자들이 검거, 투옥되고 3주 후인 1928년 2월 27일 조선의 8도, 일본총국, 만주총국, 체포되지 않은 당의 중앙간부 대표들이 서울에서 모임을 가졌다. 여기서 새로운 당중앙집행위원회를 재구성할 전형위원 3명을 선출했으나 바로 다음날 3인의 전형위원 중 2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런데 체포된 2명의 전형위원은 옥중에서 간부를 인선해 석방되는 동료를 통해 이 명단을 바깥에 알렸다. 노동자 출신의 차금봉이 책임비서에 지명되었고, 안광천이 정치부장, 김한경이 조직부장, 한위건이 검사위원장, 김재명이 공청 책임비서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해서 4차 조선공산당이 옥중에서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 노동자 출신의 제4차 조선공산 책임비서가 된 차금봉.

그러나 신임 당중앙집행위원회는 일제의 감시로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했다. 파벌 싸움과 내부 분열로 일제경찰의 프락치가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는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당 활동을 계속하는 것은 일제경찰에 조직을 가져다바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4차당 지도부는 총사퇴를 결정하고 상해에 있던 양명에게 당을 재조직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같은 극도의 소심한 행보도 당지도부의 검거를 막지는 못했다. 8월 20〜22일에 전국에서 175명이 구속되었고, 이때 검거를 피한 사람들도 가을에 줄줄이 체포되었다. 조선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은 사실상 마비상태에 빠졌다.(주8)

노동대중 속에서 혁명적 당 건설 요구한 코민테른의 ‘12월 테제’

한편, 조선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이 내부의 파벌투쟁과 일제경찰의 극심한 탄압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코민테른에서는 중요한 지침을 내렸다. 1928년 1월 이정윤을 통해 상해를 거쳐 국내로 전달된 코민테른의 결정서는 “조선의 전투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임무는 통일된 당의 실현이며 현존하는 모든 프락숀(파벌) 및 그룹의 즉각적인 해체이다”라고 하여 파벌투쟁을 맹렬히 비판했다. 이 문서는 결국 서울파의 파당적 당 조직을 비판한 것으로서 코민테른이 조선공산주의운동에서 파벌싸움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코민테른 결정서는 “당은 모든 공장 내부에 깊숙이 파고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적 과업을 성취할 수 없다”면서 대중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릴 것을 주문했다. 또한 모든 민족적 단체는 공산당의 지도 아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파쟁이 청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코민테른과 조선공산당 사이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조선의 공산당·공청 대표가 파견되어 코민테른으로부터 우대를 받았다.

그런데 제4차 공산당 검거사건이 있고 몇 달 뒤 조선공산당과 관련한 매우 중요한 결정이 코민테른에서 내려졌다. 1928년 12월 10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치서기국은 과거의 조선 공산주의운동을 전면 부정하고 새로운 지도자, 새로운 정책, 새로운 조직 원리를 통해 새로운 운동을 전개할 것을 요구하는 한국문제에 관한 결의안(이른바 ‘12월테제’)을 채택했다.(주9) 기존의 파벌을 해소하고 혁명적 당을 노농대중 속에서 토대를 구축해 새롭게 건설하라는 것이었다. “지식인 서클 조직이라는 옛 방법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공장과 노동조합에서 볼셰비키 대중사업을 하며 빈농을 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주10)

이와 함께 코민테른 ‘12월테제’에는 1927년 2월 15일 신간회의 운명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간회는 민족협동전선에 입각한 좌우연합체로 1920년대 중반 이후 내내 논란이 되었던 민족유일당 건설을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25년 이래로 코민테른의 결의안들은 중국의 국민당을 모방한 민족혁명당 건설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그런데 ‘12월테제’는 이러한 입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민족운동, 소부르주아지에 대한 ‘공산당의 헤게모니’를 강조하였다. 또한 민족해방투쟁과 더불어 토지혁명과 같은 혁명적 입장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결국 코민테른의 1928년 ‘12월테제’는 공산주의자들이 민족협동조직인 신간회를 해소하게 만드는데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고경흠 등 ML파의 주도 아래 국내의 신간회 해소 운동이 전개되었고, 1931년 5월 15일 창립 이후 경찰이 허가한 첫 번째 전국대회에서 신간회 해소가 결의되었다.

▲ 조선공산당 ML파 기관지 <계급투쟁> 창간호에 실린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조선문제에 대한 결의’(12월 테제) 첫 장. 모두 6쪽에 걸쳐 게재되었다.(자료사진=임경석/ 한겨레21 1295호, 2020.1.7.)

▲ 신간회 평양지회 관련 신문 기사. 코민테른 ‘12월 테제’ 이후 공산당 측에서 해소론을 제기하였고, 결국 민족협동전선으로 조직된 신간회는 해소되고 말았다.

1929년 이후 조선 국내에는 공산당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만주와 상해, 일본 등지에 총국이 있었으나 이 또한 해체되었고, 일국일당원칙에 따라 해외에 있던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은 그 나라 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하게 되었다. 만주와 상해에서는 중국공산당에, 일본에서는 일본공산당에 입당해 활동해야 했다. 그러나 남의 땅에서 남의 당에 들어가 혁명운동을 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내에서는 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진행되었으나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끝내 통합된 공산당을 재건하지 못했다. 국외, 특히 만주에서 활동하던 조선인들은 모두 중국공산당원이 되어 중국혁명과 조선의 해방이라는 두 가지의 과제를 동시에 안고 싸워나가야 했다.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은 ‘12월테제’에 따라 노동자·농민에 뿌리를 둔 당을 재건하기 위해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전개하며 토대를 만들고자 했다. 프로핀테른(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에서는 1930년 「조선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임무에 관한 테제」(‘9월테제’)를 통해 혁명적 노동조합·농민조합이 왜 요구되는지에 대한 기본 뼈대를 제시했다. 또한 1931년 프로핀테른 산하의 ‘범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에서는 「조선의 범태평양노동조합비서부 지지자에 대한 동 비서부의 서신」(‘10월서신’)을 발표했다. 이 ‘9월테제’와 ‘10월서신’은 조선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과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1930년대 조선 국내의 공산주의운동과 적색노동·농민조합운동은 이 세 개의 테제를 지침으로 삼았다. 결국 1930〜1945년 국내에서는 조선공산당 재건의 토대를 닦는 일이 바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었던 셈이다.(주11)

여러 재건운동과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은 ‘코뮤니스트 그룹’의 재건운동

1928년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6차대회가 열리자 조선의 사회주의 파벌들은 서로 대표를 보내 대표권을 얻으려 했다. ML파에서는 양명과 한빈, 서울상해파에서는 이동휘와 김규열을 보냈으나 어느 쪽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9년 3월 20일 서울상해파는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회를 발기했고 6월 20일 조선공산당준비회가 성립되었다. 1930년 2월 이동휘와 김규열은 김영만을 통해 코민테른에 보고문을 제출했고, 1931년 1월 16일 김규열은 코민테른 동양부에 도착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서울상해파는 1930년 6월 1일 책임일꾼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그동안의 당재건운동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조직기초를 공장, 광산, 철도, 부두에 둘 것을 결의했다. 조직계획도 좀 더 치밀하게 마련했다. 조선 국내로 공작원도 파견했다. 1931년 1월 서울상해파는 2차 간부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해체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서울상해파의 당재건운동은 막을 내렸다.

ML파의 경우 1929년 5월 31일 길림에서 한해·고광수·이경호 등이 만나 ‘조선공산당재조직중앙간부’(중앙간부)를 만들고 각지로 흩어져 당재건운동을 펴기로 했다. 한빈은 조선 국내로 들어와 공장노동자를 중심으로 당을 조직하려다 체포되었고, 다른 사람들도 잇따라 검거되었다. 1931년 2월 국내로 들어온 고경흠은 권대형, 이종림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재건동맹)을 만들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외에도 ML파는 1931〜1932년 다양한 방식으로 당재건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조선공산당 3차당 책임비서를 지낸 안광천은 중국으로 망명한 뒤 1929년 가을 김원봉과 손을 잡고 북경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했으며,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졸업생을 국내로 파견해 지하공작을 하려 했다. 안광천의 활동 모임을 ‘레닌주의 그룹’으로 불렀다.

김단야, 조두원, 김정하의 세 사람은 1929년 모스크바에서 국내로 들어와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조직준비위)를 조직했다. 일제 관헌자료에는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로 나와 있으나, 해방 후 재건된 조선공산당은 1928년 코민테른 12월 테제 이후 한국 공산주의운동을 ‘대표할 만한 기관’이 1929년에 결성된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였으며, 이 위원회가 “지하에서 비합법적 활동을 계속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경성콩그룹도 이를 계승했으며, 1945년 8월 20일에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로 결집하였다고 보았다. 이 조직과 ‘대립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장안파공산당’이라고 정리하였다.(주12)

서울, 평양, 대구, 부산, 함흥, 원산, 인천, 마산 등지의 공장과 광산, 노동현장을 중심으로 조직을 구성해 활동하려 했던 이 조직은 1931년 3.1운동 11주년 격문이 단서가 되어 대부분 체포되었다. 조직준비위 활동을 하다가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1930년 2월 모스크바로 되돌아간 김단야는 9월 상해로 가서 코민테른의 재정지원을 받아 『콤무니스트』 잡지를 발간하면서 재차 당재건운동에 뛰어들었다. 이 잡지는 김단야 개인이 아니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산하 조선위원회에서 발간한 것이었다. 이 위원회는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총괄하는 최상급기구였다. 따라서 『콤무니스트』는 말하자면 이 조선위원회의 기관지였던 셈이다.(주13)

▲ 박헌영과 부인 주세죽, 두 사람의 딸 비비안. 박헌영은 고려공청 사건으로 1925년 11월 체포됐다가 1927년 11월 병보석 석방 뒤, 일제의 감시를 피해 1928년 러시아로 탈출했다.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와 동방근로자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코민테른 동양비서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콤무니스트’ 발간에 관여하였다.

▲ 조선위원회 기관지 ‘콤무니스트’ 발간의 편집책임자였던 김단야(본명 김태연). 박헌영의 가장 가까운 동지였으나 후에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과 결혼해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던 중 1937년 11월 ‘스파이’ 혐의로 체포돼 1938년 2월 처형되며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

▲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 중 찍은 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부터 김단야, 박헌영, 양명이 나란히 앉아 있다. 두 번째 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주세죽이다.(사진=위키백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산하 조선위원회는 1930년 1월 31일 첫 회의가 열렸는데 참석자는 6명이었다. 쿠시넨, 미프, 마쟈르, 최성우, 박애, 박헌영 등이었다. 조선위원회 위원 가운데 조선인 세 사람을 이들은 ‘트로이카’라고 불렀다. 세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를 일컫는 러시아어였다. 이 트로이카는 코민테른에 의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이끄는 최고위 지도부 성원으로 간주되었다. 1930년 3월 4일 조선위원회에서 처음으로 『콤무니스트』 발간안이 마련되었다. 처음 김단야, 최성우, 김정하가 책임 편집국원이었다.(주14)

잡지 『콤무니스트』 발간에는 상해파, 화요파, 이르쿠츠크파 등 여러 파벌의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들은 『콤무니스트』를 발간, 국내로 반입해 전국으로 배포할 계획이었다. 김단야의 책임 아래 1931년 3월 창간호가 발간되었으나, 1931년 5월에야 신의주와 접촉점을 마련해 2·3호 150부를 이불과 베개 속에 숨겨서 국경으로 보냈다. 김단야, 박헌영, 김형선, 홍남표, 김명시 등을 중심으로 한 ‘코뮤니스트그룹’은 1933년까지 유지되었으나 박헌영, 김명시, 김형선, 홍남표 등이 체포되면서 조직이 와해되었다. 코뮤니스트그룹은 서울, 부산, 마산, 대구, 인천, 신의주, 평양 등에 배포자를 두었고, 이들을 통해 기업 내의 독서반 등에 『콤무니스트』 잡지를 배포했다.(주15) 『콤무니스트』는 7호까지 발간되었다.

코뮤니스트그룹은 자신들의 기관지 『콤무니스트』를 고리로 삼아 선전과 선동, 나아가 조직 활동을 하나로 연결, 통일시키려 하였다. 이들은 『콤무니스트』 연결망과 배포망을 구축하고 공장신문을 발행하여 현장으로 자신의 정치적 지도를 전달하려 했다. 또한 ‘콤무니스트 독서반’을 조직하고 『콤무니스트』에 ‘노동자 통신란’ 등을 두어 공장과 전국을 연결하려 했다. 이들은 기관지 『콤무니스트』를 중심으로 공장과 지역, 지역과 전국을 잇는 ‘세포체계’를 실핏줄처럼 연결함으로써 당을 재건하려 했다.(주16) 이는 레닌이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의 기관지 『이스크라』를 통해 혁명적 전위조직을 건설하고 지도체계를 유지하려 했던 방식을 계승한 것이었다.

한편, 코뮤니스트그룹은 코민테른의 지도선 외에는 다른 어떤 독자적 조직도 인정하지 않았다. 당대의 사회주의자들은 이들을 가리켜 ‘국제선’이라고 불렀다. ‘국제선’은 조선공산당 해체 이후에 코민테른으로부터 존립의 의의를 인정받은 유일한 공산주의그룹이었던 셈이다. 이 그룹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내에 설치된 조선위원회의 정치적, 조직적 지도를 받았으므로 코민테른의 직접적인 지도 아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민테른은 1920년대에 조선공산당을 승인했듯이 1930년대에는 국제선 공산주의그룹만을 인정했다.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 지부 승인을 취소한 1928년 12월 이후 모든 공산주의그룹을 ‘종파’로 규정하고, 기존의 분파적 전통과 절연한 기초 위에서 새로운 공산당을 재건하고자 했다.(주17) 코민테른은 코뮤니스트그룹을 통해 새로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혁명적 노동조합 및 농민조합 운동 등 대중운동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 대공황과 일제의 만주침략 등 국제정세의 변화와 함께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노동자·농민 등 대중운동의 혁명적 성격도 강화되었다. 국제공산주의운동을 체계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1919년 3월 국제공산당(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이 결성되었고, 국제노동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외곽조직으로 1921년 7월 모스크바에서 프로핀테른(Profintern: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을 조직했다. 프로핀테른의 지도하에 중국·소련·일본·자바·조선·프랑스·영국·미국의 노동조합들이 참가하여 1927년 5월 상하이에서 범태평양노동조합이 탄생하였다. 급박하게 변화하는 정세와 함께 1928〜1931년 사이 코민테른과 프로핀테른 등에서 조선의 공산당 건설과 대중운동에 대한 지침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1928년 12월 10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치비서부는 ‘국제공산당의 조선문제에 대한 결의’(12월 테제)를 채택하였다. 이는 그해 7〜8월에 개최된 코민테른 6회 이후 이 대회에서 채택된 방침에 기초하여 작성된 것이었다. ‘12월 테제’는 조선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을 강화하고 소부르주아 민족혁명운동에 대한 독자성을 유지하며 타협적인 민족개량주의를 분리시켜 민족혁명운동을 강화할 것을 결정했다.(주18) 또한 과거 조선공산당이 지식인과 학생들로 구성되었던 한계를 극복하고 노동자와 빈농을 기반으로 한 공산당을 재건할 것을 결의하였다.(주19) 이에 따라 조선공산당의 후계조직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노선에 따라 재조직할 것을 결정, 지시하였다.(주20)

▲ 김단야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서' 필사본(자료=임경석, 사진=한겨레21, 1295호, 2020.1.7.). 당시 공산주의운동에 가장 중요한 문건이었던 ‘12월 테제’는 각 공산정파별로 다양한 번역본이 존재했다.

‘12월 테제’는 코민테른 조선문제위원회에서 작성했는데, 위원으로는 취추바이(瞿秋白, 중국공산당원, 집행위원회 간부회원, 정치서기국원), 사노 마나부(佐野學, 일본공산당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원), 미프(Mif Pavel, 소련공산당원, 코민테른 동양부 서기국원), 윌터넨(Wiltanen, 불가리아공산당원) 등이었다. 조선문제위원회에 조선인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조선공산주의운동이 분파 갈등으로 국제공산당의 불신을 받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해되는 측면도 있지만, 한국공산주의운동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위원회에 한국인이 한명도 포함되지 않았던 것은 이 결정이 한국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12월 테제는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던 중요한 문건이었고, 해방 후 박헌영에 의해 기초된 ‘8월 테제’도 이러한 사고의 연장선 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서중석은 이 12월 테제가 “식민지 한국의 현실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 좌경 관념주의의 성격이 강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일제의 이식 자본주의가 식민 경제 수탈 구조의 중핵을 이루는 가운데, (…) 노동자 계급 의식 또한 제한적으로밖에 성장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은 항일-반일 의식은 강렬했지만, 아직 철저히 볼셰비키화되지 못했고 분파성이 강했다. (…) 국내에서 무장 투쟁은 물론 장기간의 지속적인 지하 조직도 갖지 못하게 한 일제 관헌의 탄압 능력을 고려해 볼 때, 한국에서의 민족 해방과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제기된 바 있는 차르 치하의 러시아와 같은 제국주의 국가 또는 사회혁명만이 요구되는 ‘독립 국가’, 그리고 독자적인 해방구와 무장력을 가질 수 있는 중국과 같은 광대한 반식민지 국가와는 달리, 한국의 특수성에 맞게 적용되어야 했다. 그것은 농민-노동자의 사회 운동이 기본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가운데, 3·1 운동에서 표출된 바 있는 각계각층의 반일 민족 감정을 최대한 활용하여, 변혁을 수반하는 민족 해방 운동에 모든 민족적 역량이 결집되는 통일 전선의 형성에 있었다.”(주21)

12월 테제는 코민테른의 극좌적 노선의 산물이었다. 코민테른은 1928년 제6차 총회에서 1935년 제7차 총회 사이에 극좌노선이 득세하며 서구의 온건한 좌익 정당(사민주의)에까지 ‘사회주의 파시스트’라는 딱지를 붙이며 온건 좌파에 대한 파괴, 공격에 열을 올렸다. 1928년 소련과 코민테른 지도자들이 대공황을 “자본주의 최후의 붕괴단계에 접어들었”다며 ‘세계혁명의 기회’로 반기며 비타협적 극좌노선을 주창할 때였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극좌노선이 신간회 해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7차 대회가 열린 1935년에는 이탈리아와 독일 등 유럽에서 파시즘이 대두되면서 위기감을 느낀 코민테른이 극좌노선을 포기하고 연합전선(인민전선) 노선으로 되돌아왔지만 국내 공산주의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극좌적인 노선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였다.(주22)

1929년 12월 테제에 이어 1930년 9월 프로핀테른은 「조선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임무에 관한 테제」(9월 테제)를 발표하였고, 1931년 범태평양노동조합은 「조선의 범태평양노동조합 비서부 지지자에 대한 동비서부의 서신」(10월 서신)을 발표하며 노동자·농민에 기초한 당재건운동을 지시하였다. 1930년대의 당재건운동을 비롯하여 적색노동조합, 적색농민조합 등 혁명적 대중운동 또한 이러한 지침들에 근거하여 전개되었다.

▲ 1929년 원산총파업 광경. 이 사건 후 이처럼 대규모의 조직적인 파업은 힘들었지만,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혁명적 농민조합운동 등 대중운동을 지속되었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기존의 공업지대인 경인지역과 1930년대 이후 중국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화 정책에 따라 발달한 함경도 등 서북부 지역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공산주의자들과 각성한 선진노동자들은 공장과 지역을 기초로 하여 야체이카(세포), 공장위원회를 조직하고 그를 바탕으로 지역 산업별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전국적인 산별 노동조합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이러한 혁명적 대중운동을 기반으로 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하였으나 일제의 감시망과 탄압으로 계속 검거, 파괴되었다. 1931년부터 1935년 사이 혁명적 노동조합운동과 관련해 70건에 1,759명이 연루, 검거되었고, 농민조합운동과 관련해서는 103건에 4,121명이 연루되었다.(주23)

이 시기 대표적인 혁명적 노조운동관련 사건으로는 함흥에 본부를 두고 청진·원산·서울·평양·신의주·광주·목포·부산 등의 공업도시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조선좌익노동조합 전국평의회’(1931)를 비롯하여 김호반·이문홍 등의 활동으로 4차에 걸쳐 추진된 ‘태평양노동조합사건’(1930〜35), 계경순 등의 ‘신의주 비합법공장노동조합사건’, 김태석·정달헌 등의 제1,2차 ‘평양 적색노동조합사건’, 주영하 등의 ‘겸이포제철소 적색노조사건’, 김용환 등의 ‘여수 적색노조사건’, 장규경·이승엽 등의 ‘마산 적색노조사건’ 등이 있다.(주24)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노동조합보다 더욱 광범위하고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30년대를 통해 전국 220개 군과 섬 가운데 80개 군과 섬에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함경남도의 경우 전체 군과 섬의 81%에서 운동이 일어났으며, 함경북도는 46%에 달했다. 이 시기 전국에서 검거된 농민은 1만5천〜2만명에 이르며, 검사국에 송치된 인원만 해도 약 6,000여명, 공판에 회부된 인원이 1,770명이었다.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함경남북도와 전남, 경북, 강원 등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군별로는 명천, 성진, 홍원, 정평, 영흥, 문천, 단천 등에서 특별히 활발했다.(주25)

일제의 압박과 통제가 강화되어 가는 가운데서도 전국적으로 노동자·농민 등 대중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는 해방 후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 등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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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지음/ 한홍구 옮김, 『한국공산주의운동사』, 돌베개, 2015, 144쪽

2)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2』, 청계연구소, 1986, 323〜325쪽

3)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지음, 위의 책, 144〜147쪽

4) 임경석, “강달영,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역사비평 58, 2002, 265〜270쪽

5) 임경석, 위의 글, 269〜272쪽; 임영태, 강달영 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매일노동뉴스, 2020.2.24

6)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위의 책, 183〜184쪽

7)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위의 책, 184〜185쪽

8)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위의 책, 185〜187쪽

9) 로버트 스칼라피노·이정식, 위의 책, 192쪽

10) 최규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9쪽

11) 최규진, 위의 책, 23쪽

12) 신주백, 박헌영과 경성콩그룹: 재판기록을 통해서 본 경성콩그룹의 조직과 활동, 역사비평 제13호, 1991년 여름호(1991.5), 294쪽

13) 임경석, 잡지 《콤무니스트》와 국제선 공산주의그룹, 한국사연구 126, 2004.9, 199쪽

14) 임경석, 위의 글, 184쪽

15) 최규진, 위의 책, 103〜116쪽

16) 최규진, ‘콤뮤니스트 그룹’의 당재건운동,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 역사비평사, 2000, 144〜145쪽

17) 임경석, 위의 글, 200쪽

18) “현 발전단계에서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주요 방침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을 강화하여 소부르주아지의 민족혁명운동에 대해서는 그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는 한편, 민족혁명운동에 계급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타협적인 민족개량주의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민족혁명운동을 강화하는 것이다(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으로부터 이러한 운동의 동요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무자비하게 폭로해야만 한다).”

“모든 공작과 활동에서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적 노동운동의 완전한 독자성을 엄격히 유지해야 하며, 이것은 모든 소부르주아 당파들로부터 확실히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혁명투쟁이 요구할 때에는 언제나 잠정적인 제휴는 허용되며 어떤 조건하에서는 운동이 혁명적이라면 공산당과 민족혁명운동의 잠정적 동맹도 허용된다.’(코민테른 6회 대회 식민지테제). 그러나 이 제휴가 결코 ‘공산주의운동과 부르주아 혁명운동의 연합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코민테른 6회 대회 식민지테제).”

19) “과거 조선공산당은 거의 전적으로 지식인과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한 기초 위에 수립된 공산당은 지속적으로 볼셰비키적인 당도, 조직적으로 건강한 당도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조선공산당의 첫 번째 과제는 그 자신의 대열을 강화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적 소부르주아 지식인으로 당을 구성한 점과 노동자와의 연대가 부족했던 점은 이제까지 조선공산당이 가지고 있는 영구적인 위기의 주원인이었다.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공장노동자와 경작을 포기할 수 없는 빈농을 당으로 끌어들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지식인 서클의 조직이라는 옛 방법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특히 공장과 노동조합에서 볼셰비키 대중 작업에 착수할 경우에만 이 거대한 과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집중적인 작업들은 노동자·농민조직 내에서, 그리고 신구(新舊)의 민족혁명 대중조직들-신간회·형평사·천도교 등-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 중 몇몇은 반(反)종교단체들이다. 이들 단체내의 투사들을 획득하기 위해 분투하면서, 공산주의자는 민족개량주의자나 여타 기회주의적 지도자들의 냉담성과 우유부단성을 폭로해야만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조직작업에서 세포의 기계적 조직 등과 같은 기계적 방법을 피해야 한다.” 「조선문제에 대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결의(조선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결의)」(임영태, 『식민지시대 한국사회와 운동』, 사계절, 1985 수록) 참조

20)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조선의 현재 상황에서 기인하는 과업들에 대한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성실하고도 진지한 태도가 그들로 하여금 과거의 병폐들을 극복하고, 코민테른집행위원회 결정의 기반 위에서 조선의 공산당을 복구·강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21)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126쪽

22) 김기협, “[해방일기][ 1946년 8월 24일: 박헌영 극좌 노선의 뿌리”, 프레시안 2011.8.24

23) 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1984, 109쪽

24) 강만길, 위의 책, 109〜110쪽

25) 강만길, 위의 책, 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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