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일제 말기 최소 200여개 이상의 소규모 비밀결사 활동

국내에서는 여운형의 건국동맹과 조선공산당의 재건운동 이외에도 소규모 비밀결사 항일활동이 있었다. 변은진의 연구에 의하면, 일제 말기 최소한 200여개 이상의 소규모 반일조직들이 국내외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주1) 여기서는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조선민족해방협동당과 전설적인 빨치산 대장 남도부(본명 하준수)가 조직했던 보광당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조선민족해방협동당(이하 ‘협동당’)은 일제 말 조선 국내에서 활동한 항일투쟁을 위한 비밀결사조직 가운데 건국동맹 다음으로 규모가 컸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성제대 1학 재학중 학병징집을 거부하고 조선민족해방협동단에 가입해 활동했던 계훈제(주2) 등 관련자들의 회고록이나 증언 등 관련 자료 등에서 이와 관련된 인원이 최소한 200〜300명에 이르고 검거된 인원만 1945년 초에 12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주3) 변은진은 “포천 국망봉 협동당 근거지에서만 60여명 가량, 인근의 흥륭사에서도 다수가 검거되었고, 경성제대 의학부생만 해도 10여명이 검거되었으니 인천·전남·함경도 등 여러 곳에서 이와 관련하여 검거된 인원을 종합하면 이러한 수치는 과장된 것이 아닌 듯하다”라고 했다.(주4)

건국동맹은 워낙 비밀리에 활동했고 일제에 의해 조직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규모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중앙조직과 지방조직, 해외 연락망 등을 포함하고 있었고, 공식 조직원 외에도 주변에 다수의 협력자들을 포섭하고 있었으므로 규모가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건국동맹은 여운형을 비롯해 오랫동안 항일투쟁에 참여한 노력한 혁명가들이 망라되어 있었으나 협동당은 학병 등 일제의 강제동원을 거부하는 반일의식을 가진 청년들이 빠른 시일 안에 만든 조직이었다. 오랫동안 훈련을 통해 단련된 혁명가가 아니라 초보적인 수준의 반일의식과 열정만으로 이처럼 대규모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움직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협동당은 일제의 강제동원에 대한 거부에서 시작되었다.

1943년 10월 20일 일제는 육군성령 제48호로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을 시행하였다. 이른바 조선인 대학생에 대한 ‘학도병지원제도’다. 이에 따라 조선인 전문학교 및 대학교급 재학생과 졸업생을 소집하여 특별간부로 채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규칙 시행이 공포된 바로 그날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학도의 병역지원 일정을 발표했는데, 10월 25일부터 11월 20일까지 접수, 12월 12〜20일 징병검사, 1944년 1월 20일 입영 등 매우 촉박한 일정이었다. 학도지원병제도(학병제)가 발표되자 이광수 등 친일인사들은 ‘당신의 아들, 오빠, 남편을 지원병에 보내라’며 선동하고 나섰는데, 말이 ‘지원’이었지 실제는 강제동원이었다.

학병제는 전문학교 학생과 대학생을 강제로 동원하기 위한 것으로 전문학교 이상 조선인 학생들은 조선보다는 일본에 유학하고 있는 숫자 더 많았다. 특히 도쿄에 가장 많았는데 조선 내의 적격자가 1,000여 명인데 비해 도쿄에 유학중인 조선인 학생은 약 6,000명이었다.

학병제로 강제동원될 상황이 되자 유학생들은 크게 분노했고, 국내와 마찬가지로 이를 기피하거나 거부하는 학생이 늘어갔다. 이런 분위기에서 1943년 6월 일본 도쿄에서 학병 거부자들이 모여 ‘조선민족해방협동당’을 결성했다. 일본 메이지 대학에 유학했고 대동아학원 서무계원 겸 강사로 일하고 있었던 ‘철저한 민족주의자’ 김종백은 경남 밀양 출신의 조춘일을 만나 서로 의기투합해 조직을 시작했다.(주5) 이들은 일본 도쿄에서 처음 시작해 산하에 ‘조선학생우의동지회’를 두어 조직원을 확보하는 통로로 삼았고, 국내에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몇 명을 조선으로 파견했다. 조선에 파견된 조직원은 징용·징병·학병·보국대 등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청년들이나 경성제대 학생 등을 대상으로 사전조사를 실시했다.(주6)

▲ 일제가 학도지원병을 강제 징집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 및 ‘진감(震撼)하는 학병만세’가 실린 매일신보 1944년 1월 20일자

조선민족해방협동당의 조직과 활동

1943년 10월 학병제가 공식 발표되면서 학병 거부자들이 늘어났고, 협동당 주위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에 협동당은 1944년부터 주요 활동무대를 조선으로 옮겼고, 국내의 징병·징병 거부자들을 끌어들여 조직을 강화하고 조선독립에 대비하여 무장봉기를 본격적으로 준비해갔다. 당수 김종백을 비롯한 핵심당원들도 국내로 들어와 서울 계동의 임시주택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백운동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각도에 세포를 구축하는 활동을 했다. 그들이 본거지로 삼은 백운동은 포천과 춘천의 경계에 있는 국망봉 산속이었다. 산림이 울창하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그곳 산속에 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한 백운이라는 호를 가진 김필제가 스님 노릇을 하며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징병·징용을 거부한 청년들이 확보되면 이들을 산으로 보내 훈련하였는데, 협동당 조직은 점차 확대되어 백운동 근거지에만 적게는 80여명, 많게는 200여명이 있었다. 1944년 7월에는 경성제대 의학부 학생 10여명이 가입하면서 협동당 활동은 한층 더 탄력을 받게 되었다.(주7)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3457410&memberNo=39087579(사진=네이버 블로그). 행정안전부의 일제 학도병동원 피해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4385명이 ‘학도지원병’의 미명하에 강제동원되었고, 이중 43명이 광복군에 합류했으며, 71명이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협동당은 당수 김종백을 비롯해 군사부장(산악대장) 염윤구, 조직부장 정준섭, 선전부장 정기섭, 학생부장 김준호 등 간부를 중심으로 산악대, 물자지원, 학생부 등을 운영하였고, 북부지방, 남부지방, 중부지방으로 구분해 조직 활동을 전개했다. 북부지방은 길주·명천·온성·함흥·원산·구성·승호리·고성·금강산·양양·장전 등에, 중부지방은 포천·양평 등에, 남부지방은 진해·김해 등에 조직 거점을 확보했다.(주8)

협동당은 일제 말 수많은 비밀결사와 마찬가지로 ‘결정적 시기에 무장봉기를 통해’ 독립을 쟁취하려 했고, 따라서 협동당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산악대를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의 준비였다. 그들은 포천의 국망봉을 비롯해 금강산·양주 등의 산속에 거점을 확보했으며, 포천 국망봉 인근의 왕방산과 철원의 보선산에도 굴을 파서 거점을 구축하려 했다. 이들은 거점을 확보할 때 주로 산속에, 특히 지원 가능한 사찰이 있는 곳을 택했다. 협동당이 국망봉에서 오랫동안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인근의 흥륭사와 그곳 주지였던 협동당원 김필제의 도움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 자료: ‘리암 트로츠키 네이버 블로그’(https://m.blog.naver.com/darkn/221656208738)

당시 조선 국내에서는 제2차 세계전쟁 막바지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는 1943년경부터 무장투쟁을 준비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광산, 공장, 산악지대 등을 중심으로 직접 무기를 제조하거나 조직 훈련을 실시하는 식으로 민중의 무장봉기를 준비하는 결사조직들이 속출했는데, 특히 징병·징용·학병 거부자들이 결합하면서 이러한 준비는 본격화·가속화되었다. 당시 총독부 고위관리가 “조선은 언제 어느 때 어디서 폭동이 일어날지 몰랐습니다”라고 회고했다시피, 폭동, 테러, 방화, 파괴, 습격 등 ‘폭력적’ 양상이 두드려져 갔다.(주9) 포천, 금강산 등에 조직된 협동당 산악대는 일종의 별동대, 행동대였다. 포천 국망봉에 모여든 당원들은 학생들과 정용·징병·학병·보국대 등에 꿀려갔다가 탈출한 사람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들은 국망봉에 12개의 굴을 파고 지내면서 집중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산악대에서는 낮에는 목재로 만든 목총(木統)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밤에는 조선역사·병술·정세분석·정신강화 등의 정신·사상 교양과 학습을 실시했으며, 지원병·징병에 응하지 않도록 선전활동에도 총력을 기울였다.(주10)

결정적 시기를 대비해 무장봉기를 준비했던 소규모 조직들

한편, 군사부장 염윤구에 따르면, “이른바 김일성(金日成) 장군의 훈련을 본받아 무력행동에 나서자는 실천 전투법을 훈련”시켰으며, 혹한과 눈 속에서 기술과 인내성을 양성하고, 모든 호령은 우리말로 했다고 한다. 1930년대에 조선과 국경을 접한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김일성은 이 시기 청년학생들이 중심이 된 소규모 비밀결사에서는 거의 ‘신화적’ 존재였다 특히 ‘보천보전투’ 등 국경지대에서 직접 일본 군경과 전투를 자주 벌여 일정한 성과를 거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주11) 각종 정신·육체적 강화 훈련은 지육(智育)부장 정기섭이 담당했는데, 그는 “우리가 한 가지 운동을 시작하게 되면 혁명적 시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매일 밤 노동자·농민 동지들을 모아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을 해득하기 쉽게 가르쳤다고 한다.(주12)

또한 협동당에서는 일본인 고관과 반민족친일행위자 처단을 위해 명단과 주소를 조사, 정리하고 단파방송을 청취하여 그 내용을 유포하는 한편, 연합국과 연결하려고도 했다. 그들은 결정적 시기 무장봉기할 때 쓸 목창과 목검, 화승총, 다이너마이트를 제작하는 등 민중봉기를 위한 준비작업도 진행했다. 철원 등 몇 개 경찰서와 형무소의 방화, 열차 전복을 기도하는 등 ‘초기 빨치산 활동’과 유사한 유격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45년 초에는 부평 병기공장의 조선인 군속(軍屬)을 포섭하여 폭발물을 입수하고 원산과 인천의 군사요새지 시설을 폭파할 것을 기획했으며, 이를 위해 휘문중학교 졸업생 신백우 등이 인천 앞바다에서 제포 폭발물 실험을 하기도 했다.(주13)

산속 생활과 훈련, 봉기 준비 등의 협동당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필요한 물품의 안정적인 공급이었는데 이는 주로 흥륭사 주지 김필제에 의존했다. 이밖에도 협동당원이자 명륜학원 관계자 박승방과 그의 조카 조원영, 개성의 거부 공성학 등이 거액을 기부했다. 시인 정준섭의 친구인 김상훈·이구영 등의 문인들도 상당액의 모금을 제공했지만 공출 등으로 식량 사정이 매우 열악한 때여서 산속 생활과 훈련은 늘 어려웠다. 그래서 산악대에서는 일상적으로 풀잎이나 나무뿌리를 먹거나 생식하는 습관을 들이는 등 생존 능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도 했다.

협동당 학생부의 의학부생들도 산악대와 연계하면서 봉기 준비를 위한 협력 활동을 진행했다. 이들은 평소 주로 서울 견지동의 견지의원이나 혜화동에 있던 김교명의 집을 중심으로 매주 모여 정세토의 등을 하면서 정세와 활동 방향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동지를 규합하는 활동을 했다. 이들에게 부과된 임무는, 산속 근거지에 합류하여 연합군인 미 공군이 무기와 탄약을 투하하면 이것으로 게릴라전을 벌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1944년 겨울에 협동당 본부로부터 “머지않아 입산(入山)할 것이니 생활비를 각자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고 준비하던 중 검거되었다고 한다.(주14)

그러나 협동당은 1944년 12월부터 1945년 2월 사이에 몇 차례의 대규모 검거사건을 통해 120여 명 이상이 투옥되면서 와해되기 시작했다. 경성제대 의학부생의 말실수가 발단이 되어 경기도경찰부에서 견지의원을 습격하면서 의학부생들이 차례로 검거되었고, 이어서 계동본부와 포천, 인천, 전남, 금강산 훈련본부, 평남 승호리 등의 각지로 파급되었다. 1945년 1월 초 경기도경찰부가 대규모 경찰병력을 동원해 국망봉 산악대 검거작전을 벌였다. 한밤중 공격을 알리는 총성 소리와 함께 시작된 경찰의 기습공격으로 12개 굴에서 정기섭·김석훈 등 60여명이 검거되었다. 흥륭사도 습격을 당해 주지 김필제 등 여러 명이 검거되었다. 당수 김종백은 1월 중순경 인천경찰서에서 검거되었으며, 인천 앞바다에서 폭발물 실험 중 경찰의 습격으로 15명이 검거되었다. 염윤구 등 일부는 피신해 강원도 춘성군 화악산 등지로 근거지를 옮겼다. 협동당에 대한 검거는 1945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포천에서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던 이조원은 울진에서 횡사했고, 당수 김종백은 고문 끝에 1945년 1월 32세의 나이로 옥사했다.(주15)

▲ 조선민족해방협동당에 참여했던 의학생들의 기념사진(1947년)(사진=네이버 블로그)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7048469&memberNo=1891127&searchKeyword=3.1%EC%9A%B4%EB%8F%99&searchRank=575)

다양한 사상적 경향을 내포했으나 민족해방에 대한 일치

협동당 사건은 1945년 8월 15일에 소멸되었는데, 포천 산악대에 200여명, 금강산에 약 100명, 경성의 학생들을 비롯한 각 도의 당원들을 감안하면 협동당 관련자는 최소한 300여명이나 되었다. 이 가운데 120여명이 검거되었고, 체포되지 않는 사람들은 산악대장 염윤구나 의학부 학생들처럼 전국 각지의 산속이나 탄광 등으로 피신해 해방을 맞았다. 8.15 직전 시기 조선에서는 건국동맹을 비롯해 보광당이나 결심대 등 크고 작은 수많은 비밀결사들에서 징병·징용·학병을 거부한 청년들이 모여 협동당과 비슷하게 산속에서 군사훈련을 하면서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 일제의 파시즘 체제 아래서는 이극로, 최현배 등이 주도한 정치적 성향을 배제한 조선어학회 활동도 일제의 탄압대상(1942.10.) 조선어학회 사건)이었다.

일제 말기 국내 및 일본에서는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소규모 비밀결사들이 200개 이상 조직되어 활동했다. 이러한 소규모 비밀결사들의 정세인식은 대체로 일치했는데, 조만간 일제패망이 도래할 것으로 보고 민중의 무장봉기를 통해 조선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은 독립된 국가는 ‘공화국’이어야 하고 이는 합법적 점진주의, 개량적 방법 대신 ‘무력에 의한 폭력혁명’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때문에 비밀결사에 참여한 청년·학생들은 “만주 등지로 건너가 무장부대에 합류하려는 의지를 보인 경우가 많았고, 국내에서도 국외 무장세력이 국내로 진격하는 ‘결정적 시기’가 오면 민중봉기를 일으켜 그들과 함께 일제 권력을 타도할 것”을 고민하였다고 한다.(주16)

이러한 조직들은 경륜 있는 민족운동가나 노련한 혁명가의 지도를 받지 못하였고, 참가자들도 대부분 체계적인 이론학습이나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념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채 다양한 요소들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미신이나 종교, 일제가 선전하는 국가주의적 파시즘 사상에서부터 자본주의체제와 국제 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직들은 그 바탕에 민족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질수록 그런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주17)

대부분의 조직들은 공화제를 지향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방향을 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조직 내에서 자본주의체제나 공산주의체제라는 지향성을 내걸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그 안에는 다소간 ‘절충적’인 견해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 시기 소규모 비밀결사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협동당의 경우에도 이 같은 절충적’ 내지 ‘중도지향적’ 경향성을 확실히 갖고 있었다. 당수 김종백에 따르면, 협동당은 이념적으로 자본주의도 아닌, 사유와 국유를 결합하는 제도를 지향하면서 이상적인 ‘협동’의 이념에 기초한 사회를 추구했다고 한다. 그는 협동사상이 서양의 유물론과 동양의 유심론을 절충한 새로운 철학이라고 보았다. 이에 기초한 사회는 자본주의의 단점인 착취와 민주주의의 과잉으로 인한 자유방임을 극복할 뿐 아니라 공산주의의 단점인 사유재산의 불인정, 파시즘의 단점인 독재 등을 모두 극복하고, 동양의 미덕인 가족제도까지 결합한 이상적인 사회라고 보았다.(주18)

그러나 이러한 협동주의는 당수 김종백의 견해였고, 참여자들의 이념은 다양했다. 마르크스주의를 가르친 지육부장 정기섭이나 만주로 가서 무장투쟁 세력과 합류해야 한다고 보았던 산악부장 염윤구 등은 사회주의에 가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협동당 내부에서는 이념과 노선을 둘러싼 투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제로부터 독립하는 민족해방을 일차적인 과제로 보았고, 이를 위해서는 결정적 시기에 민중의 무장봉기를 일으켜야 한다는 데 대체로 동의했던 것이다. 협동당은 이념적인 측면에서도 한계가 있었지만 조직 운영에서는 미흡한 부분이 더 많았다. 엄혹한 정세에서 보안에 취약했고, 조직의 확대, 운영에서 미숙하고 방만했던 것이다. 하지만 체계적인 학습이나 조직운동의 경험을 갖지 못한 세대의 자발적인 노력이라는 점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측면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놀라운 활동이 아닐 수 없었다.

남도부 일기의 주인공 하준수의 보광당 활동

일제 말기 학병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집단생활을 하며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무장투쟁을 준비한 소규모 조직 활동으로는 후에 전설적 남한 유격대장 ‘남도부(南道富 또는 南道釜)’로 유명해진 하준수(河準洙)가 이끈 보광당(普光黨)이 있다. 이 정도 규모의 활동 조직은 당시 한반도 곳곳에 산적해 있었지만 특히 하준수는 후에 ‘남도부’라는 이름의 전설적 빨치산 대장으로 활약했다는 점에서, 또 하준수의 친구였던 이병주가 그의 삶을 바탕으로 대하소설 『지리산』(전 7권, 1985, 기린원)을 창작, 탄생시킨 탓에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하준수는 1921년 경남 함양군 병곡면에서 천석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함양의 권세가였고 아버지 하종택은 오랫동안 면장을 지낸 유지였다. 진주중학을 다니던 하준수는 일본인 교사를 폭행하여 퇴학을 당한 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중학 중퇴여서 대학 입학 자격이 없었고 준일상업학교에 편입해 졸업한 후 일본대학 전문부에 입학했다. 당시 동경에는 경남 출신 유학생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재일본유학회를 조직, 친목을 다지고 민족의 앞날을 고민했다. 이때 함께했던 이들 중 일부가 후에 하준수의 빨치산 활동에 같이하게 된다.(주19)

▲ 자료: ‘리암 트로츠키 네이버 블로그’(https://m.blog.naver.com/darkn/221656208738)

하준수는 1943년 일본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중앙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는데, 그해 일제는 전문학교 학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도지원병제’를 실시했다. 지원병제는 말이 그렇지 실제로는 강제동원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준수는 학병 문제를 놓고 동료들과 의견을 나누었다. 그들은 토론 끝에 학병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실제로 행동에 옮기기는 쉬운 일이 아니어서 그들의 결의는 사실상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하준수는 조선으로 귀국한 뒤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대부분 학병에 참여하겠다고 말해서 혼자서 부산으로 내려와 몇몇 친구와 함께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지리산에 숨어 지내기로 했다. 당시 지리산과 그 인근 산악에는 징용과 징병을 거부하며 숨어든 청년들이 300여명이나 있었다. 하준수는 1945년 3월 지리산 근처에 위치한 괘관산에서 동지 70여명을 모아 ‘보광당’을 조직했다.(주20)

보광당의 활동 목표는 일제의 전쟁 수행을 방해하고, 장차 연합군이 조선에 상륙할 경우 이에 호응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들은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화약을 제조하였으며,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인근의 경찰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이 같은 조직들이 일제 말기 전국에 200여개나 산재해 활동하고 있었는데, 지리산 주변에서 활동했던 하준수의 보광당도 기본적으로 전국에 산재해 있던 다른 소규모 무장조직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만일 하준수란 인물의 그 후의 활동이 없었다면, 그의 보광당도 일제 문서의 한 귀퉁이에 기록되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운명은 그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 미국 국립문서보관서에서 발견된 동해남부전구 빨치산사령부 사령관 남도부 명의의 원호증(사진=박도)

일제 말기 하준수는 공산주의자도 아니었고 철저한 민족운동가라고 보기도 어려운 단지 강한 반일주의자, 양심적 민족주의자 정도 수준이었지만 해방 후 보광당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사회정치 활동에 나서면서 행로가 바뀌었다. 해방과 함께 그는 보광당 당원들을 주축으로 ‘조선건군준비위원회’라는 군사단체를 조직해 위원장이 되었으며, 함양군 경찰서와 행정조직을 장악해 마을 진입로 확장, 작은 교량 설치, 농가 지붕 개량, 우물 시설 개조, 하천 둑 개조 등 주민생활 개선 활동을 펴는 등 실질적인 권력기관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하준수의 활동은 미군이 함양을 점령하면서 타격을 받았다.(주21)

해방 후 민족주의자에서 전설적인 빨치산 대장으로

미군정은 초기에는 하준수의 영향력을 감안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으나 1946년 1월 사설 군사단체 해산 포고령에 따라 무장조직인 ‘조선건군준비위원회’가 해산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하준수는 조선공산당의 인물들과 친분이 있었고 끊임없이 입당 권유를 받았으나 여운형이 주도하던 조선인민당에 참여하는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는 1946년 공산당·인민당·신민당 3당이 합당해 남로당으로 변환할 때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하준수는 이때까지만 해도 뚜렷한 이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한의 상황은 그의 이념과 가는 길을 바꿔놓았다. 모스크바 삼상회담에 따라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고, 미국의 지원 아래 이승만과 한민당이 주도하는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가시화되면서 분단 위기가 고조되었다. 1947년 7월 27일 남로당은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압박하기 위해 ‘공위 경축 민주임정 수립촉진 인민대회’를 전국적으로 열었는데, 함양의 대회를 주도한 것은 하준수였다.(주22)

이후 하준수는 미군정의 좌익탄압과 단정 반대 투쟁에 앞장섰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야산대를 조직해 미군정과 경찰, 우익조직에 대항하는 폭력(무장)투쟁을 벌였다. 1948년 2.7구국투쟁은 남북 분단으로 치닫는 상황에 대한 좌익의 총공세였는데, 함양에서는 하준수의 주도 아래 지리산 천왕봉에 쌓아 둔 달집을 태우는 봉화를 신호로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2.7구국투쟁 후 하준수는 경찰의 가장 주요한 표적 인물 중 한명이 되었고, 하준수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의 유격투쟁을 지휘하였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 후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월북한 하준수는 한국전쟁 때까지 북한에 머물렀다.(주23)

하준수는 남로당이 무장유격대원들을 조직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만든 강동정치학원 군사교관 겸 부대장으로 활동하였고, 1949년에는 300여명의 ‘조선인민유격대 제3병단’(‘김달삼 부대’ 또는 ‘동해여단’으로 통칭)의 부사령관으로 38선 이남의 일월산, 내연산, 보현산 등을 거점으로 동해안 일대 태백산맥 줄기를 오르내리며 유격활동을 전개하며 명성을 떨쳤다.(주24) 한국전쟁 때는 유격대 제7군단 사령관에 임명되어 유격대원 700여명을 이끌고 ‘선제타격작전계획’에 따라 김일성으로부터 ‘남조선 경상남도 부산으로 선두 돌입하라’는 임무를 띠고 남하했다. 본명보다 더 유명한 ‘남도부’(南道釜)란 이름은 이 작전명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주25) 그러나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끊어지면서 북으로 철수하지 못하고 남쪽에 남게 된 남도부(하준수)는 미처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을 규합해 덕유산, 운문산, 신불산, 일월산, 팔공산 등지를 거점으로 경남북과 강원 일대에서 유격활동을 전개하였다.(주26)

▲ 동아일보 1954년 10월 16일자에 실린 남도부 사진

남도부로 불린 하준수는 6.25전쟁 기간 내내 이 지역을 무대로 대단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며 그 명성을 떨쳤다. 대한민국의 기록 자료에 의하면 그 기간 동안 남도부 부대는 7백여 회의 교전, 군경사살 1천8백여 명, 각종 무기약탈 8백여 정, 각종 실탄 약탈 2만여 발, 민가 방화 1백여 호, 민가기습 5백여 호, 군용열차 전복 20여 차량, 군용트럭 소각 또는 파괴 2백여 대 등 어마어마한 ‘전공’을 올리고 있었다. 전쟁은 막바지로 달렸고 휴전 협상으로 총성이 멎으면서 더 이상 유격활동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휴전 협정에서는 남쪽에 남은 인민군 잔병과 유격대의 운명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더 이상 산에서 버틸 수 없는 상황에서 하준수는 하산을 결정하였다. 그는 하산하면서 1953년 10월 경남의 만석꾼 대지주였던 창녕 성씨 집안에 잠복해 그동안의 활동 내용을 정리했다.(주27)

‘남도부의 노트’로 불리는 그의 활동 기록은 유리병 속에 넣어져 창녕 성씨 집안 어느 곳에 묻혀 있다가 2001년 10월 21일 성일기(주28)의 안내로 성균관대 교수 성대경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주29) 자신의 빨치산 활동을 정리해 은닉한 뒤 대구로 숨어들었던 하준수는 1954년 1월 21일 대구 시내 동인동의 한 민가에서 체포되어 10월 16일 사형 언도를 받고, 이듬해인 1955년 8월 어느 날 사형장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하준수(남도부)는 눈가리개도 사양한 채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주30)

▲ 남도부 등의 재판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 1954년 10월 13일자 신문 기사. 사진의 인물은 좌로부터 남도부, 홍영식(유응재), 홍만식(이원량), 지춘란, 문덕준(문일준).

협동당의 김종백이나 보광당의 하준수는 일제의 학병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었지만 당시 그들은 강한 반일감정을 가진 민족주의자였지 사상·이념적으로 준비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산속 활동을 통해 점차 해방과 독립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게 되었고 무장활동을 벌이며 독립의 그날을 꿈꾸었다. 김종백은 일제에 체포되어 해방 직전 고문으로 사망했고, 하준수는 해방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가장 유명한 빨치산 대장이 되었다. 일제 말기 학병이나 징용을 피해 산 속 등으로 숨어들면서 소규모 반일 조직을 결성해 활동했던 이들 중 많은 이들이 김종백, 하준수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반일감정에서 출발해 점차 강력한 반일민족주의자,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으로 진화를 이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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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변은진, 『일제말 항일비밀결사운동 연구: 독립과 해방, 건국을 향한 조선민중의 노력』, 선인, 2018, 6쪽

2) 계훈제는 일제 시기 협동당에서 활동했고, 해방 후에는 반탁운동에 앞장서며 우익학생운동에 참여했으며, 1960년대 이후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헌신하며 80년대 문익환, 백기완과 함께 재야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인물로 활동했다.

3) 계훈제·박순동, 『식민지시대의 지식인』, 청년사, 1984, 91쪽

4) 변은진, 위의 책, 289쪽

5) 심지연,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격랑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노촌 이구영 선생의 팔십년 이야기』, 소나무, 2001, 90쪽

6) 변은진, 위의 책, 295쪽

7) 변은진, 해방 전 조선민족해방협동당의 결성과 비밀결사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70, 2012, 311〜312쪽

8) 변은진, 위의 책, 303〜304쪽

9) 강만길 외, 『통일지향 우리민족해방운동사』, 역사비평사, 2000, 238쪽

10) 변은진, 위의 책, 305쪽

11) 이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변은진, 『파시즘적 근대체험과 조선민중의 현실인식』, 선인, 2013, 5장 3절(453〜466쪽)을 참조할 수 있다.

12) 변은진, 『일제말 항일비밀결사운동 연구』, 306쪽

13) 계훈제·박순동, 앞의 책, 90쪽; 심지연, 앞의 책, 385쪽

14) 임광세, 「조선민족해방협동당(학생부) 사건」, 2006.9.5.; 변은진, 앞의 책, 308쪽

15) 변은진, 앞의 책, 309〜310쪽

16) 변은진, 일제말 비밀결사운동의 전개와 성격, 1937〜1945, 282쪽

17) 변은진, 위의 글, 299쪽

18) 변은진, 앞의 책, 313〜314쪽

19) 허종, “하준수, 지주의 아들에서 빨치산 지도자로”, 내일을 여는 역사 20(2005.6), 171쪽

20) 허종, 위의 글, 171〜172쪽

21) 허종, 위의 글, 173〜174쪽

22) 허종, 위의 글, 175〜177쪽

23) 허종, 위의 글, 177〜178쪽

24) 임경석, 남도부의 노트, 역사비평 2006년 11월호, 366〜367쪽

25) 노가원, 『전설적 남한유격대 총사령관 하준수 일대기 남도부(상)』, 월간말, 1993, 321〜333쪽

26) 허종, 위의 글, 178〜179쪽

27) 임경석, 위의 글, 367〜368쪽

28) 창녕 성씨 집안 출신인 성일기는 ‘차진철’이란 가명으로 남도부의 연락병으로 활동했던 빨치산 출신이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부인으로 김정남을 낳은 성혜림의 친오빠이기도 하다.

29) 임경석, 위의 글, 382〜385쪽

30) 임경석, 위의 글, 388〜3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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