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중선 / 통일뉴스 상임고문

 

평화통일운동가 김낙중 선생이 지난 7월 29일 향년 89세에 별세했다. 고인과 평생의 동지이자 동료이자 후배였던 노중선 통일뉴스 상임고문이 고인의 운동적 삶, 그리고 고인과의 관계를 일별했다. 노 상임고문은 고인을 운동적으로는 ‘절대적이고 타협 없는 평화주의’로 평하면서도 인간적으로는 ‘순진무구(純眞無垢)하고 천의무봉(天衣無縫)한 화신’으로 명명하고 있다. 이 글은 필자의 고인에 대한 ‘뒤늦은 추도사’이자 ‘마지막 헌사’이기도 하다. / 편집자 주

 

▲ 2005년 9월 열린 평화연대 평화연구소 창립식에서 남북기본합의서 국회비준을 촉구하고 있는 김낙중 선생. [통일뉴스 자료사진]

1. ‘평화주의자 김낙중’과의 첫 만남

필자가 김낙중 선배와의 첫 만남은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勞硏)에서였다. 김 선배는 필자보다 정확히 1년 먼저 연구소에 부임했는데 1968년 11월 연구소장 김윤환 교수, 연구실장 권두영 박사, 총간사 김낙중, 간사 노중선으로 맨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만나 연구소 업무와 관련한 몇 날을 보낸 어느 날 오후 학교 교정의 잔디밭에서 김 선배와 나는 아무 격식 없이 마주 앉게 되었다.

그 때 김 선배는 경기도 파주군 금촌면 법흥리 출생이라는 것을 시작으로 자기가 노연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를 그야말로 숨김없이 다 들려주었는데 그 날 오후 시간은 그렇게 다 보내야 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그가 만든 통일방안의 내용이었는데 그 문건을 만들게 된 동기, 배경에서 부터 문건 작성 과정들에 관한 것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임진강을 헤엄쳐 건너가 1년 정도 평양에서의 생활, 그 뒤 서울로 다시 귀환해서의 복잡한 절차와 수난 끝에 풀려난 후 군대도 갔었고 결혼도 하는 등 이러 저렇게 해서 노연에 이르게 된 당신의 2,30대 일대기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같은 내용들을 지금 원고지로 옮겨 정리하고 있는 중이고 머지않아 세상에 내 놓을 것이라고도 했는데 1985년에 ‘굽이치는 임진강’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 바로 그 내용이었다.

그 날 필자는 김 선배의 이야기를 듣는 처음부터 끝까지 호기심과 흥미로움을 넘어 큰 감동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것은 통일방안을 작성해 낸 학술적 능력은 차치하고서라도 기본적으로 그의 지극히 선량한 심성과 스스로의 관심 분야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 그리고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그의 긴 이야기의 행간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야심이라든가, 소시민적 영웅심과 같은 객스러움도 전혀 느끼지 못했고 이념적 편향도 아니었다. 오직 ‘평화’와 ‘통일’에 관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진실’과 ‘열정’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이야기들을 다 끝낸 그 때 김 선배는 자기가 관심 갖는 주제는 ‘평화통일문제’라는 것과 이와 관련해서 통일방안을 가지고 북에 가서 실상을 확인하고 온 뒤의 자기 결론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을 지금 기억할 수 있다.

“… 평화통일은 사람들이 길을 몰라서 안되는 게 아니라 힘이 있는 자는 자기 몫을 더 많이 챙기는데 관심이 있고, 힘이 없는 자는 하고 싶어도 못한다. 그래서 평화통일이 안 된다. 평화통일이라는 것은 북쪽에 권력을 잡은 사람은 북쪽의 권력 확장을 구상하는 거고, 남쪽에 권력을 가진 사람은 북쪽까지 자기 권력을 확장하려는데 관심이 있지 평화통일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야. 자기 권세 확장이 목적이지, 서로가 자기 권력의 확장을 목적으로 하는 이 과정에서 남과 북의 백성들만 죽어나는 거야. 진심으로 통일이 필요한 것은 민중이야, 그런데 민중은 힘이 없어, 그 때부터 나는 민중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 …”

2. 이른바 ‘김낙중 월북 사건’의 전말

▲ 2005년 7월 15일, 가족사를 다룬 책 '탐루'의 출판기념회에서 꽃다발을 받는 김낙중 선생. 왼쪽은 '탐루'의 저자이자 김 선생의 셋째 딸 김선주 씨. [통일뉴스 자료사진]

김낙중은 자기의 관심 주제를 바탕으로 모든 역량과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통일독립청년공동체수립안’을 가지고 당시 경무대에 청원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북쪽 당국에 청원하고자 결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5년 6월 25일 자신의 고향집에서 멀지않은 임진강을 헤엄쳐 건너 ‘통일독립청년공동체수립안’을 가지고 밀입북 했던 것이다. 그 이후 평양에서 고차원의 취조를 받고, 몇 개월 동안 입원 치료를 받는 등 우여곡절 끝에 월북 1년만인 1956년 6월 2일 판문점 지역을 거쳐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귀환과 동시에 미군부대에 연행되어 온갖 과학적 장비와 수사 방법을 총동원한 조사와 취조 끝에 결국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 결과 1957년 1월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1957년 6월 21일 2심에서는 형집행유예 판결을 받아 정확히 고향을 떠난 2년 만에 부모님 품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뒤 다시 대법에 상고하여 1960년 10월 30일 3심에서 면소판결을 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김낙중 월북 사건’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한 재판에서 실정법상 아무 문제없음이 명쾌히 정리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낙중 선배 본인은 당신의 평화통일 의지는 그것이 양심적 가책을 받을 일은 아님은 물론 실정법에 저촉되는 일도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있어서 ‘월북 경력자’라는 굴레는 일생을 공안 당국의 관찰 대상으로 되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는 공안 문제의 먹잇감이 되어 몇 차례씩이나 ‘간첩 사건’으로 조작되곤 했던 신산한 삶의 역정이어야 했다.

3. ‘노연’에서의 직장 동료

▲ 2005년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선착장에서 열린 ‘7.27 한강하구 평화의 배 띄우기’ 행사에서 갈잎배를 만들고 있는 김낙중 선생. [통일뉴스 자료사진]

1960년대에 이르러 이른바 농촌 인구의 도시 진입 현상이 두드러졌는데 이에 따라 날로 피폐해 가는 농촌 현실에서 쫓겨나게 된 농민들이 살길을 찾아 도시 노동자로 이입되었다. 당시 이 같은 사회 구조는 군사독재정권의 산업화 정책과 맞물리면서 열악한 근로환경 문제, 저임금 문제 등 각종 노동 관련 문제들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시기 대학 부설 연구기관으로서의 노연의 존재는 단순한 학문 연구의 차원을 넘어서서 분단 구조의 본질적 개혁을 위한 여러 방면으로의 노력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매우 유의미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노연에서는 연구 기관으로서의 각종 사례들을 중심으로 『勞動問題論集』(노동문제논집)을 연구 편집 발행하는 일 이외에도 ‘정기노동교육 과정’(매 학기 별), ‘정기협동교육 과정’(집체 교육 형태)의 노동자, 농민 교육을 진행함과 동시에 기관지 형태로 『노동문제』, 『민주농민』 등을 격월간으로 발행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노동정책과 노동운동은 물론 기업윤리의 문제에 이르는 노동문제 전반의 구체적인 여러 현안들에 관한 논의의 활성화를 위한 ‘수요토론회’, ‘수요연구발표회’ 등의 활동들에도 주력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노조불인정 문제, 노조간부해고 문제, 직장폐쇄 문제, 체불임금 문제 등과 관련한 사용자 측의 온갖 부당노동행위와 노사분규 현장을 방문할 수 있었고 취재가 가능하였다. 또한 친목 모임, 야유회 행사 등 여러 형태로 현장 일꾼들과 교유하면서 노동 현장의 실상들을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김 선배와 필자는 이와 같은 노연 활동들의 현장 실무자로서 그에 따른 여러 행사들의 진행과 간행물들의 기획 편집 실무들을 함께 소화해내야 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분주한 일상이었지만 보람된 일이었다.

4. ‘민우지 사건’과 유신반대 운동

▲ 2008년 21세기민족주의포럼에서 발제를 하고 있는 김낙중 선생(왼쪽 붉은 체크 무늬 남방). [통일뉴스 자료사진]

1972년 7월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는 등 분단 4반세기만에 처음으로 남북 화해적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었으나 박정희 정권은 불과 3개월여 만에 소위 ‘10월 유신’을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하루아침에 국회를 해산하는 한편 전국의 각 대학들에는 휴교령을 내려 학생들의 학교 출입을 금지하고 고려대, 서울대, 연세대 교정에는 군인들을 주둔시키는 폭거를 자행했다.

이에 고려대 학생 동아리 ‘한맥회’ 학생들은 그 해 12월 당시 고대 정문 앞에 내걸렸던 “한국적 민주주의 우리 땅에 뿌리박자”는 유신 찬양 현수막을 대낮에 불살라버리며 정권 당국의 ‘유신 폭거’에 저항했던 것이다.

이어서 1973년 봄 새 학기가 개강되자마자 동아리 소속 학생들은 「民友」(민우)라는 유신반대 유인물을 만들어 총장실을 비롯한 강의실과 교내 곳곳에 배포하였다.

「民友」지는 학생들이 구속 입건될 때가지 3차례 배포되었는데 학생들은 각 언론사에도 「民友」지를 발송하여 ‘유신 선포’의 부당성을 보다 광범한 대중들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民友」를 통해 “민족통일의 횃불을 들자”, “민족민주학원을 수호하자”, “광주는 죽지 않았다”고 주장했는데 그 내용은 당시 사회 전반적인 구조적인 모순에서 비롯된 ‘전태일 분신 사건’, ‘광주 대단지(※경기도 성남시 단대리) 사건’에서 불거진 영세 빈민 문제를 여론화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와 관련한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유신 체제’를 1인 영구집권을 위한 총통제로 규정하면서 유신독재 정권의 본질을 분석하여 노동자 문제의 진상을 알리는 한편 유신 체제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내용들을 담아냈던 것이다.

이처럼 「民友」는 당시 고려대 내 학생동아리 유인물의 명칭이었고 그 내용은 박정희 정권의 ‘유신 선포’를 규탄하고 유신을 반대하면서 이를 위해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단결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고려대 ‘한맥회’ 동아리 학생들의 이와 같은 활동은 그 이후 70년대 유신반대 운동 활성화의 첫 출발이었다. 다시 말하면 ‘민우지 사건’은 이른바 유신선포 직후 박정희 정권의 불법적 폭거에 대해 가장 먼저 저항했던 유신반대 운동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당시 검찰은 ‘내란 선동 음모 및 반공법 위반’으로 조작 발표했고, 피고인들에게는 변호사 접견조차 일체 엄금한 채 재판을 진행한 불법재판의 전형이었는데 공안 당국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참조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①주동 학생들이 공안 당국에 의해 이미 불온 서클로 강제 해체된 고려대 ‘한맥회’의 후보 회원들이었다는 점, ②‘한맥회’ 지도교수가 초대 노연 소장이었던 김윤환 교수였던 관계로 학생들이 노연을 출입했었다는 점, ③노연 김낙중 총간사가 1950년대 중반 밀입북 경력자라는 점, ④노연 노중선 간사가 과거 손정박과 ‘전략당 사건’의 연루자였을 뿐 아니라 학생들의 탄광 체험 활동을 주선했고, 그 학생들과 반년 넘게 주기적으로 회동하여 노·학연대 문제를 논의했다는 점 등의 사실들을 공안 당국이 상호 연결 조합하여 ‘불순 세력의 내란 음모’로 만들어 재판에 회부했던 것이다.

5. 부잡(不雜)했던 인연 그리고 윤회(輪回)

▲ 고인 빈소에 걸린 약력과 생애. [통일뉴스 자료사진]

김낙중 선배는 당신의 충정과 진실에 대한 자신감에서였던지 스스로 결심한 사항에 대해서는 열정적으로 집착하면서 세상의 눈들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민족 분단 상황과 관련한 사회과학적 사고의 첫 출발은 ‘평화’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적이고 타협 없는 평화주의자였다.

따라서 그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과 북이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고,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 ‘통일’은 의미를 보장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으며 이 땅의 평화를 위해 통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절대적 명제였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과 관련된 것이라면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장마철에 강물을 헤엄쳐 건너 철조망과 지뢰가 뒤덮인 군사분계선을 넘는 목숨을 건 결행도 가능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자기 의지의 결정은 그것이 단순한 독서나 사색에 의한 지식의 축적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6.25 당시 스무 살 청년이 의용군으로의 전쟁 참여에 불응하는 한편 국군으로의 징집을 피해 다니느라 두려웠던 경험, 그리고 동족끼리 총질하면서 싸워야 하는 민족 분단의 참담한 현실에서 열혈 청년 학생으로서 이 비극은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는 일념에서 창출된 철학적 신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 선배는 ‘통일독립청년공동체수립방안’에 대해 사람에 따라서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주의자의 일탈된 넋두리에 불과한 행태로 폄하하는 것에 대해서도 크게 괘념치 않았다. 또한 분단의 원인 규명논의가 가능한 현실에서 통일운동 진영에서 논의되는 분단 적폐의 문제, 외세의 문제, 지역과 단체들 간의 연대 문제 등에도 초연한 듯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통일의 방법에 있어서 각자들의 생각과 편차 같은 것에 대해서도 심각히 고민하지 않았고 오직 평화와 통일을 위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그와 관련된 자기 의지와 지론을 일생 동안 일관되게 주장했던 것이다.

이제 김낙중 선배와의 세속에서의 부잡(不雜)했던 인연은 마침내 윤회(輪回)에 들게 되었다.

하찮은 이해관계에도 아귀다툼을 해야 하는 세속 현실에서 김낙중 선배는 감히 지극히 보기 드문 순진무구(純眞無垢)하고 천의무봉(天衣無縫)한 화신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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