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태 / 출판기획자 겸 역사교양서 저술가
 

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이승만

이승만은 아직도 논쟁적인 인물이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극단적이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자유민주주의 수호자’라고 평가한다. 반면에 그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은 ‘극우 분단 체제의 책임자’ ‘민간인 학살의 주범’ ‘민주주의를 파괴한 독재자’로 평가한다.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엇갈린다. 그를 ‘위대한 독립운동가’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적을 음해하고 독립운동 진영을 분열시키고 없는 나라까지 팔아먹으려 한 형편없는 인물’로 보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과문한 역사 지식으로는 한 나라의 ‘초대’ 대통령(또는 왕)이 내부로부터 이처럼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역사적으로 ‘초대’라는 말이 붙는 인물의 경우는 다소 부정적인 요소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대체로 그 업적을 인정받은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경우는 여전히 극단적인 평가를 받은 문제적 인물, 논쟁적 인물로 남아 있다. 그것은 한반도가 분단되어 있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한반도가 분단되지 않고 통일국가를 이뤄서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면 이승만이 비록 독재정치를 폈고 독립운동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 해도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한반도의 분단이 이승만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승만은 분단·단독 정부 노선을 이끌었던 최고 정치 지도자였고, 분단 정부 수립으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정치인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의 출발점은 이 분단·단독정부 노선에 대한 평가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하면 지금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것은 여전히 분단·단독 정부 수립 노선과 통일정부 수립 노선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대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이승만이 분단·단독 노선을 걷게 되는 것은 해방 전 독립운동 과정에서 확보하고 있었던 자신의 정치적 기반과 무관하지 않다. 해방정국에서 활약한 주요 정치가들은 대부분 독립운동 시기에 확보한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해방 후 대중적인 영향력을 확대하며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해방 후 정치 활동과 그 성과는 해방 전 독립운동의 자산과 무관할 수 없었다. 이승만의 경우 해방 전 독립운동 과정에서 쌓은 정치적 자산은 다른 경쟁자들과 비교하면 매우 취약했다. 이승만의 정치적 자산은 대한제국 시기의 독립협회 활동과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미주 지역 한인 사회 활동, 국내외의 기독교 세력 등이 있었으나, 이것들은 대부분 오래 전의 일이거나 대중적인 영향력과는 거리가 있었다. 해방 직전 이승만에 대해 아는 한국민은 많지 않았고 그는 한국과 멀리 떨어진 미주지역에서 오래 전 활약했던 노정객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대중적인 인물로 부각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계기는 해방 후 좌익이 주도한 ‘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추대되면서였다. 이는 좌익세력의 최대 실착이자 이승만에게는 최대의 행운이었다. 이 문제는 뒤에 좀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이승만이 이처럼 국내의 대중적 기반과 인지도가 취약했던 데 비해 그의 정치적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은 이승만보다는 알려져 있었고 대중적인 기반도 확보하고 있었다. 27년 동안 임시정부 간판을 지키며 마지막에는 광복군과 좌우합작통합 임시정부를 조직해 이끌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 국내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며 청년·학생·지식인과 대중들로부터 많은 영향력을 확보하고 지지를 받았던 여운형, 다소 신비하게 포장된 면이 있었지만 일제 말기 국내 언론보도를 통해 대중들에게 전설적인 ‘항일 영웅’으로 알려졌던 김일성, 대중적인 명성은 부족했지만 해방과 함께 조선공산당이라는 가장 강력한 조직을 장악했던 박헌영 등은 이승만에 비해 훨씬 대중적인 기반이 있었다.

▲ 이승만 학당의 광고 포스터(인터넷)

이런 상황에서 복잡한 정치세력이 함께 하는 통일정부가 세워질 경우, 이승만이 제대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통합된 정치지도자가 되기는 사실상 어려웠다. 노정객, 원로 정치인으로서 상징적 인물로 추대될 수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당시의 모든 정치세력이 함께 부닥치며 경쟁하는 정치 상황에서 최고의 정치지도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기가 어려웠다는 이야기다. 이승만이 남북한을 망라한 통일정부를 세워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고 정치적 지도력을 확고히 장악할 수 있다고 봤다면 분단·단독 노선을 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방 후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고 한반도의 통합된 정치세력의 지도자가 될 수 없었던 이승만은 단독 정부의 지도자가 되는 길을 선택해야 했다.

해방 후 혼란한 정치적 갈등과 분열 양상을 생각할 때 그 어떤 인물도 쉽사리 통일정부의 합의된 지도자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다양한 정치세력이 통일정부를 세워 그 안에서 갈등·대립·경쟁하며 독립된 국가를 이끌어가는 시도를 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개인이나 한 집단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민족 전체의 이해를 우선한다면 통일정부의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통일정부를 지향했어야 한다.

▲ 이승만 동상 철거 요구 시위(사진=인터넷)

그러나 이승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승만은 통일정부를 수립할 경우 필연적으로 좌우 이념과 정치투쟁 과정에서 자신이 주도권을 장악하기 어렵다고 보고 확실하게 정치권력을 쥘 수 있는 단독정부를 추구했다. 오늘날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하는 이들도 사실은 이승만의 이 같은 정치적 판단에 동의하고 있다. 해방 후 미소가 남북을 분할 점령한 상태에서, 그리고 좌우의 이념 대립과 갈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반쪽 분단국가만이라도 장악해 확고한 반공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옳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 한반도는 이념 대립이 일차적인 문제가 아니었으며, ‘자유민주주의’ 또한 절대적인 가치가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방 후 한반도는 ‘자유민주주의’보다는 ‘사회적 민주주의’ 또는 ‘진보적 민주주의’, 좀 더 부연하자면 다양한 정치세력이 함께 경쟁하는 ‘혼합적 민주주의 경쟁체제’가 요구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보지 못하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오랫동안 독재정권을 통해 굳어진 과대반공국가의 관점에서 ‘자유민주주의’ 절대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해방 직전에 어떤 정치적 자산과 기반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어떻게 해방 후 이승만이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일까? 이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 멀더라도 이승만의 초기 활동부터 시작해서 볼 필요가 있다.

이승만의 도미와 프린스턴대학 철학박사 학위 취득

이승만은 대통령 시절에도 ‘박사’로 호칭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승만박사’(또는 ‘이박사’)라고 호칭하는 것은 이승만의 가장 큰 자랑 중 하나인 프린스턴대학 철학박사(국제정치학) 출신임을 드러내는 것으로써 대통령이라는 호칭보다 더 선호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언론이나 그를 호칭할 때 많이 사용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에게 평생의 가장 큰 훈장이 된 박사 취득하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이승만은 1898년 11월 21일 황국협회 보부상의 만민공동회 공격 때 도망가지 않고 맞서 싸워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박영효 일파의 쿠데타 음모 사건(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1899년 1월 9일 체포·투옥되었는데 감옥 수감 중 주시경이 건네준 육혈포를 갖고 탈옥하려다 실패하면서 옥리에게 총상을 입힌 혐의로 7월 18일 종신 징역수가 되었고, 1904년 8월 특사 석방될 때까지 5년 7개월간 대한제국의 수인으로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감옥 생활은 이승만을 사회로부터 고립시켰지만 독서와 학습을 통해 근대적 서양 문물에 대해 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독자적인 사유 체계를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주1)

▲ 한성감옥 수감 당시의 이승만(좌에서 세 번째)과 아들 태산(1904)(인터넷)

이승만은 감옥에서 파격적인 대우를 받아 옥중에 도서실과 학교를 설치해 운영하고 자유롭게 집필 활동을 하고 아들을 데려와 함께 지낼 수도 있었다. 이승만이 이처럼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던 것은 주한미국 공사 알렌, 선교사 아펜젤러·애비슨·벙커·헐버트·게일 등의 석방운동과 지원 활동,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엄비(순헌황귀비)의 후원 덕분이었다. 이러한 특혜에 힘입어 이승만은 옥중에서 집중적인 독서를 했고 이를 바탕으로 지적 사고를 성숙시켰으며 서구 지향적 사고의 틀을 만들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영어 실력을 향상시켜 출옥 뒤에는 훌륭한 영어 구사 능력을 가질 수 있었고 서구의 학문과 정세에 대해서도 나름대로의 사고 체계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승만은 옥중에서 평생 동지가 될 신흥우, 이상재를 비롯하여 이원긍(이능화의 부), 유성준(유길준의 동생), 김정식, 이승인(이상재의 아들) 등을 만났다. 또한 이승만은 감옥에서 검은 정순만(險隱 鄭i享萬), 우성 박용만(又醒 朴容萬)과 함께 유명한 ‘3만 결의형제’를 맺었으며 이때 맺은 박용만과의 인연으로 1913년 하와이로 망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주2) 후에 박용만과는 최대의 정적이 되었지만 이들은 끈끈한 옥중 동지로 인연을 맺었다.

이승만은 러일전쟁의 와중에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도움으로 1904년 8월 9일 석방되었다. 석방 직후 이승만은 잠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활동에 참여하고 상동청년회를 설립하는 등 기독교 활동을 벌이다가 11월 4일 미국으로 떠났다. 그가 미국으로 간 것은 유학 목적과 함께 민영환·한규설의 개인 밀사자격으로 외교를 시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승만의 외교 임무는 한미수호조약의 상호방위 조문을 발동하도록 미국에 청원하는 것이었다. 1904년 12월 31일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1905년 8월까지 전 주한 미국 공사 딘스모어 상원의원의 소개로 국무장관 헤이를 만났으며 8월 4일 테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도 만났다. 이승만의 ‘독립 외교’는 실패했지만, 이 경험은 이후 그의 진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만 30세 불과했던 이승만이 미국의 상원의원, 국무장관, 대통령 등 정관계의 최고위 관리들을 만나 한국 독립 문제를 청원해본 경험은 큰 자랑거리였고 그가 대미 일변도의 외교노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주3)

▲ 1909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신학부 학생들과 함께 한 이승만(셋째줄 왼쪽 끝)(인터넷)

이승만은 1905년 2월 조지워싱턴 대학에 입학해 2년 만에 학사학위를 받고 하버드 대학의 석사학위(1910년 3월)와 프린스턴대학의 박사학위(1910년 7월)를 취득했다. 정규 학력도 없이 대학에 진학한 이승만이 불과 5년 만에 미국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이 학위 과정은 최소한 12년이 걸리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이처럼 빠른 속도로 박사학위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주한 선교사를 비롯한 미국 기독교계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었다. 이승만이 정치가가 아니라 ‘크리스천’으로 목사가 되기를 원했던 미국 선교사들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배재학당 학력을 인정받아 조지워싱턴대학 학부 2학년에 편입해 1907년 6월 학사학위를 받았다. 이승만은 하버드대학에 입학해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에 필요하다며 2년 내 박사학위 수여를 요청했으나 이 과정은 미국인들에게도 평균 4년 이상 소요되는 것이었기에 하버드대학으로부터 거부당했다. 이승만은 1907년 가을부터 1908년 여름까지 1년간 하버드대를 다녔으나 학위를 얻지 못했고,(주4) 1908년 9월 장로교 선교사 홀(E. F. Hall)의 도움으로 그의 모교인 프린스턴대학원에 입학했다.(주5) 이승만은 2년 내에 박사학위 보장을 요구했고, 프린스턴대학원은 이에 동의하는 한편, 프린스턴신학원 기숙사를 무료로 제공했다.(주6) 이처럼 이승만의 박사학위 취득은 한국에 파송될 선교사 겸 교역자를 위해 특별히 허락된 것이었다. 이승만은 1910년 7월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이는 1776∼1872년까지 국제법상에서의 전시중립을 다룬 것이었다.(주7) 이 박사 학위는 이승만에게 평생 출세의 무기이자 자랑거리가 되었다.

미주지역 한인 사회 지도자 박용만·안창호·이승만의 차이점

이승만은 1910년 7월 18일 프린스턴 대학의 우드로 윌슨(W. Wilson) 총장으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은 뒤, 귀국하는 길을 선택했다. 1910년 10월 10일 귀국한 뒤 1912년 3월까지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한국인 총무로 일했다. 당시 이상재, 김정식, 이원긍, 유성준, 안국선 등 이승만의 옥중동지들이 YMCA의 요직을 맡고 있었으며, 이상재는 특히 이승만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이승만은 YMCA 총무로 있으면서 서울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는데, 훗날 자신의 추종자가 되는 임병직, 윤치영, 허정, 이원순, 김영섭 등을 가르쳤다. 이승만은 이 시기 순전히 종교 운동가로서 활동했으며, 박사출신의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부흥전도사, 웅변가, 조직가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러던 중 1912년 ‘105인 사건’이 터지자 이승만은 미국 미네아폴리스에서 개최되는 국제감리교대회(5월)에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3월 26일 서울을 떠났다. 이승만은 미국 선교사의 주선으로 무사히 출국할 수 있었는데 미국으로 가는 도중 동경에 들러 YMCA 회관의 기금모금운동에 참여해 연설을 했다. 이 자리에는 이인, 송진우, 안재홍, 김병로, 최두선, 현상윤 등 후에 민족주의 우파 지도자이자 한민당의 주류를 형성하는 인물들이 참석했다. 이때의 짧은 만남은 1920〜30년대 이승만과 국내 연락·연대의 기초가 되었다. 이승만은 미네아폴리스의 국제감리교대회에 참석한 뒤 미국 망명을 선택했고, 1912년 후반 뉴저지주 캄덴 시의 YMCA에 잠시 일했다. 1913년 1월 이승만은 감옥 동지 박용만의 초청으로 40년간 자신의 제2고향이 될 하와이로 향했다.(주8)

1910〜30년대 미주 한인사회의 유력한 지도자는 우성 박용만, 도산 안창호, 우남 이승만의 세 명이었다. 이들은 독립운동 방략과 관련해 무력투쟁노선(박용만), 실력양성노선(안창호), 외교노선(이승만) 등 민족운동의 중심 흐름을 대표하는 인물로 각기 동지회(이승만), 흥사단(안창호), 국민군단(박용만) 등의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고, 3.1운동 이후 수립된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지위에 추천될 정도로 명망을 얻고 있었다. 박용만은 이승만의 감옥 동지로 이승만의 아들 태산과 『독립정신』의 원고를 미국으로 반출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출간할 수 있게 했으며,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한 불러들인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1915년 이후 노선 및 주도권을 두고 하와이에서 심각한 갈등 관계를 연출하였다.

무엇보다 박용만과 이승만의 노선과 인간관계는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박용만은 네브라스카주 커니-헤이스팅스의 소년병학교(1909〜14)에서 출발해 하와이의 산넘어병학교-국민군단, 북경의 군사통일회의에 이르기까지 무장투쟁노선을 이어간 무력투쟁론자였다.(주9) 반면 이승만은 교회(감리교회·한인기독교회)와 한인기숙학원·여자기숙학원·한인중앙학원·한인기독학원 등의 학교를 중심으로 종교·교육 활동에 전념했으며 외교노선을 주장했다.

▲ 이승만의 정적이었던 박용만(좌)과 그가 창설한 대조선국민군단의 하와이 시가행진 모습(사진=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
▲ 이승만과 함께 미주 한인 사회 지도자로 경쟁 관계였던 도산 안창호와 흥사단의 1916년 연례 총회 기념촬영(사진=위키백과 사전)

1915년 이후 미주 한인사회의 대립·갈등은 박용만과 이승만의 대립이 주된 원인이 되었다. 국민회 일부 간부의 재정 횡령과 장부 기재 잘못, 무장투쟁노선의 무모함을 등을 공격하며 이승만이 하와이 국민회를 장악하면서 박용만 지지 세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민회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불법적인 수단과 폭력 동원, 소송 제기 등 ‘치졸한’ 수법을 동원하여 반대파들의 극력한 저항을 초래했으며 포용력 없는 독선적인 지도자의 이미지를 노출하였다. 하와이 한인사회에서는 1915년과 1918년, 1921년과 1930년에 걸쳐 대표적인 4차례의 사회적 풍파를 연출했는데(주10) 이는 재정 문제와 조직의 지도권을 둘러싼 분쟁으로 재판과 폭력 사태를 반드시 동반하였다.(주11) 이 모든 사건에 이승만 측이 관련돼 있었을 정도로 이승만은 미주사회의 주도권을 두고 극단적인 갈등을 연출하였다.

이승만과 안창호의 경우는 두 사람 모두 미주에 머문 1913〜19년에는 각각 하와이와 미국 서부에 떨어져 있어서 거의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두 사람이 직접 대면한 것은 이승만이 상해를 방문했던 1920년 12월〜1921년 5월 사이 6개월에 불과했다. 두 사람은 외교노선과 실력양성노선으로 구분되지만 실제로 이들은 기본적으로 한국의 즉시 독립은 불가능하므로 결정적 시기에 대비해 준비를 해야 한다는 준비론의 입장에 서 있었던 점에서는 유사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 안창호와 이승만의 차이는 분명해졌다. 이승만의 경우는 정세에 따라 외교 노선과 경제적 실력양성노선을 오고갔는데 미국의 대일관 변화를 바탕으로 세계 정세의 변화에 따라 달랐다. 이승만은 미일 관계가 원만하면 교육·경제적 실력양성운동을 주장하고, 미일 관계가 나빠지면 대일 외교를 통한 배일 의식 고취를, 그리고 미일이 전쟁을 하면 독립 전쟁을 개시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반면, 안창호는 점진과 개조의 관점에서 독립운동을 바라보았지만 준비를 통해 결정적인 시기에는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주12)

또한 이승만은 1921년 초반 6개월가량 상하이를 방문한 것을 제외하고는 해방 때까지 하와이와 미주에 머물렀으며 단 한 번도 체포의 위험이 노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안창호는 1919년 상해로 건너간 후 1932년 일제경찰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될 때까지 중국에 머물며 독립투쟁을 이어갔다. 이런 선택의 차이가 1920년대 중반 이후 국제 정세 및 독립운동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세 사람의 운명을 갈랐다. 박용만은 북경 군사통일촉진회를 중심으로 무장투쟁노선을 견지하다가 1928년 암살되었다. 안창호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임시정부 개조 운동과 민족유일당 운동, 이상촌 운동 등을 벌이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두 차례의 감옥 생활을 거쳐 1938년 병사했다. 안창호와 박용만은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싸우다 독립도 보지 못한 채 최후를 맞았지만 이승만은 하와이와 미주에서 활동하며 살아남았다.

임시정부 초대대통령 이승만과 탄핵

이승만의 명성을 높이는데 중요했던 것은 프린스턴 박사와 더불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라는 직책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임시정부 대통령 직위는 탄핵이라는 불명예 퇴직으로 인한 부정적인 측면을 포함하고 있어서 양면성이 있다. 이 아킬레스건을 중화하기 위해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가 아니라 한성정부 법통론을 내세웠다.

1919년 3.1운동 후 국내와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 조직이 필요하다고 보고 각각의 방식으로 임시정부를 추진하였다. 이름만의 임시정부까지 포함하면 대단히 많지만 실체를 가진 대표적인 조직은 세 개 정도였다.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러시아령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그리고 국내의 한성정부가 그것인데, 한성정부에서 집정관 총재로 선임되었던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한성정부에 그 법통성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 법통성이 한성정부가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에 있다는 걸 말해준다.

1919년 4월 10일 오후 10시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 22가의 한 셋집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회의가 시작되어 다음날 10시까지 이어졌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먼저 조직되어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 서기에 이광수·백남칠을 선출했다. 국호를 대한민국, 연호를 민국으로 정했으며, 정부조직은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고 6개 부서 총장을 두었다. 국무총리 이승만(국무원 비서장 조소앙),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 교통총장 문창범이 선출되었다.(주13)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공식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러시아령 연해주 니콜리스크(현재 우수리스크)에서는 2월 말부터 3월 초순 사이에 전러시아조선인회의를 개최하고 의장 문창범, 부의장 김철훈·김알렉산드로, 서기 오창환, 외교부장 최재형, 선전부장 이동휘, 재정부장 한명세를 선출하여 대한국민회를 구성하였으나(주14) 정부조직은 구성되지 않았다. 또한 국내에서는 3월 중순부터 4월 초순에 걸쳐 이규갑, 김사국 등 기독교 세력이 주동이 되어 한성정부를 추진하여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총재 이동휘, 내무부총장 이동녕, 외무부충장 박용만, 재무부총장 이시영, 교통부총장 문창범, 군부부총장 노백린, 법무부총장 신규식, 학무부총장 김규식, 노동국총판 안창호, 참모부총장 유동렬 등을 선임하였다.(주15)

그런데 한성정부는 실제로는 유인물 선포정부에 가까웠으나 집정관 총재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승만이 자신의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다고 보고 이를 자신의 정통성의 근거로 삼고자 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정부수반의 선출권과 탄핵권을 임시의정원에 부여하고 행정권을 국무총리가 중심이 되는 국무원에 일임하여 한 사람의 독주를 제도적으로 차단하고 있었기에 이승만은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에 집착했던 것이다. 그는 이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 명의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프레지던트’ 명함을 파서 활동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에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제로 바꿀 것을 압박했다.(주16)

1919년 5월 상하이에 도착한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는 미주와 노령을 대표하는 이승만과 이동휘의 취임을 위해 이들과 접촉했다. 이에 이승만은 “국무총리를 대통령으로 바꿀 것”과 “애국금을 폐지하고 공채만 발행할 것”을 요구했다. 안창호는 후자에 대해서는 거부했으나 전자에 대해서는 받아들였다. 안창호는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어떤 직함도 사용할 수 있으며 우리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회신했다.(주17) 결국 이렇게 해서 1919년 9월 6일 국내의 한성정부와 러시아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 임시정부를 통합한 통합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출범하게 되는데 이승만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정부 조직을 7부1국으로 확대했다.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외무총장 박용만, 군무총장 노백린, 재무총장 이시영, 법무총장 신규식, 학무총장 김규식, 교통총장 문창범, 노동국총판 안창호 등이 선출되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성립 기념사진(1919.10.11.).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왼쪽부터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사진=도산안창호기념관)

그러나 이 통합임시정부는 처음부터 삐걱거리며 원만하지 못했다. 러시아의 이동휘와 문창범이 상하이임시정부를 해체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성정부 형태로 개조한 것에 항의했다. 이동휘는 우여곡절 끝에 11월 3일 국무총리에 취임하였으나 문창범은 끝내 거부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 또한 이승만이 1919년 2월 25일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파리강화회의에 위임통치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해줄 것과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도록 해달라”는 내용의 위임통치를 제안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심각한 분란에 휩싸였다.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생기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사람”이라고 격렬히 비난하며 이승만의 대통령 선임을 반대하면서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에 터를 잡고 아예 임시정부 반대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주18)

처음부터 분란을 안고 시작한 임시정부는 1920년 러시아 혁명 이후 들어선 레닌정부가 지원한 자금의 사용처를 두고 임시정부 내부에서 심각한 갈등이 빚어지면서 결국 좌우가 갈라서고 말았다. 분란 끝에 이동휘는 이승만이 상하이에 도착한지 얼마 안 된 1921년 1월 임시정부를 떠났고, 1922년에는 이동휘의 오른팔이었던 김립이 김구의 수하 오면직·노종균 등에게 살해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또한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강력한 요구로 대통령제로 변경했으나 내각책임제 요소를 남겨두어서 최고 지도자 대통령과 행정권을 쥐고 있던 국무원과 수시로 충돌하는 일이 벌어졌고, 대통령인 이승만이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가 아니라 미국에서 자신의 측근인 안현경·장붕 등을 통한 원격지령으로 임시정부를 통제하려다 보니 심각한 상황이 발생해도 제대로 대처하지를 못했다.

임시정부가 이처럼 분란과 혼란을 거듭하게 되자 이승만에게 상하이로 와서 문제를 수습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승만은 임정의 빗발치는 요구에 마지못해 1920년 12월 상하이로 왔다. 당시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노선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최고지도자로서 분란을 수습하기는커녕 갈등만 키웠고, 이승만과 심각한 다툼을 벌인 끝에 이동휘는 임시정부를 떠나고 말았다. 이승만이 상하이에 온 뒤 임시정부는 더욱 깊은 내홍에 빠졌고 이동휘의 뒤를 이어 김규식 등 많은 사람들이 임정을 떠남으로써 조직은 더욱 약화되었다.(주19)

▲ 1920년 12월 상해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 환영식. 가운데가 이승만, 좌측이 이동휘, 우측이 안창호다.(사진=독립기념관)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도 이승만은 1921년 5월 상해를 떠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감으로써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주었으며, 대통령 자리를 사퇴하지 않고 버팀으로써 임시정부의 개편조차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승만이 상해를 떠난 뒤 임시정부의 진로를 두고 개조파, 창조파, 고수파로 분열되어 극심한 갈등을 노출하였다.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는 사태를 수습할 방법이 없었지만 이승만은 한사코 사임을 거부했다. 고사 직전의 임시정부를 살리기 위한 응급처방으로 이승만의 탄핵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된 것은 재정문제도 있었다. 1903년 하와이 노동이민에서 시작된 미주지역 동포사회는 임시정부 수립 직후부터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독립운동을 위한 애국금을 보내왔다. 그런데 통합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선임된 이승만은 미국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동포들로부터 애국금과 인구세, 애국공채 등을 거두어 임시정부로 보내지 않고 독자적으로 관리하면서 갈등을 일으켰다. 미주의 재정권은 이승만이 미주 동포 사회를 장악하고 자신의 외교활동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반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원거리에서도 임시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이 미주지역 재정을 장악하게 되면서 임시정부 재정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미주의 지원금을 제대로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임시정부의 운영이 이승만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주20)

미주의 재정 통제권한은 임시정부와 이승만 양측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이해관계가 있는 중요한 문제로서 이승만과 임정 사이에, 직접적으로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사실상 운영하고 있던 이동휘·안창호와 이승만 사이에 심각한 불신의 원인이 되었다. 이승만의 일방적인 공채 발행 및 애국금 수납이 상하이 정계에 심각한 풍파를 불러왔고,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상해 임시정부는 이동녕, 이시영 두 사람의 주장에 따라 1920년 3월 23일 공채를 이승만의 구미위원부에 위탁하기로 결정하였다.(주21) 이는 임시정부를 깨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지만, 이승만이 미주 동포들의 지원금을 장악하면서 임시정부로 보내지던 자금이 거의 끊어졌고 임시정부는 극도로 쇠약해졌다. 상하이임시정부(국무원)와 이승만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고 임시정부 사정은 날로 어려워졌다. 임시정부는 1921년 이후 위상이 크게 떨어지고 재정수입도 축소되어 사무실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주22)

▲ 국민대표회의 개최와 규정을 알리는 『독립신문』 기사(1923. 24)(사진=독립기념관)
▲ 임시정부 개혁을 위한 시도-개조파, 창조파. 이러한 개혁 시도가 결국 실패하고 이승만을 탄핵한 상태에서 임시정부를 유지하기로 결론이 났다.

위기에 부닥친 임시정부는 1924년 4월 이동녕이 국무총리를 맡으면서 난국 타개책으로 이승만의 탄핵을 위한 본격적인 절차에 돌입하였다. 임시정부 의정원은 8월 21일 ‘임시대통령의 유고’를 결정하였고, 12월 11일 박은식을 임시대통령 대리로 선임, 임시헌법 개정과 이승만 탄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1925년 3월 13일 최석순 등 10명의 임시의정원 의원들의 명의로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이 상정되었고, 3월 21일 탄핵 심판서가 제출되었다.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함”이라는 짧은 주문과 함께 그 이유가 덧붙여졌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승만은 7년 동안 취임 선서도, 행정도 맡지 않았으며, 각료들과 다툼을 벌였다.
둘째, 구미위원부를 세워 국무원과 다투고, 마음대로 법령을 발표하여 혼란을 일으켰고,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정부에 맞섰다.
셋째, 임시의정원을 무시하고, 대통령 자리를 황제로 인식하면서 이를 평생 직업으로 여겨 민주주의를 말살했다.
넷째, 미주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정부에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다섯째, 독립운동 단체 지도자들과 다툼을 벌여 정부를 고립시켰다.(주23)

3월 23일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탄핵안이 통과되었고, 후임 2대 대통령으로 박은식을 선출했다. 이승만의 탄핵안이 임시의정원에 제출, 통과되기 전인 3월 10일 임시정부는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내렸다.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중심으로 맡았던 외교 사무는 외교위원을 파견하여 처리하도록 하고, 재정에 대한 업무는 대한인국민회와 하와이교민단에게 넘기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 명령을 듣지도 않고 구미위원부를 1928년까지 끌고 가면서 동포들에게서 거두어들인 애국금과 각종 성금을 틀어쥐었다.(주24) 이 때문에 미주 지역 동포사회는 충돌과 반목을 거듭했다.(주25)

1925년 3월 탄핵 이후 단절되었던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관계가 재결합하기 시작한 것은 1933년 3월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9명의 국무위원 중 한명으로 선출하면서부터였다. 1932년 4월 29일의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장개석 정부와 함께 중국 대륙을 떠돌며 장정길을 이어갔는데, 이 무렵 임시정부의 실력자로 떠오른 김구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었다. 철저한 임정 고수파이자 기호파의 핵심이었던 김구는 이승만의 절대적인 지지자로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 ‘이승만 탄핵’ 독립신문 호외. 1925년 3월 이승만의 임시정부 대통령 탄핵 사실을 알린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호외가 2018년 12월 최초로 확인됐다.[장자크 홍 푸안 씨 소장자료/촬영=국사편찬위원회] 연합뉴스 2018.12.13.

임시정부는 1934년 초 이승만을 다시 주미외무행서 위원으로 선임했다가 1936년 7월 초 “그 직을 해임”하였다. 이렇게 필요에 따라 관계의 명맥을 유지하던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회복되는 것은 임시정부가 장정 과정을 거쳐 충칭에 자리를 잡은 상태에서 광복군 조직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면서였다. 충칭임시정부 시기 이승만이 그토록 바랐던 미일 교전(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이승만의 대미 외교가 활발하게 펼쳐질 공간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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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65〜74쪽 참조. 이승만과 관련하여 이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이하 출처를 밝히지 않은 주요 내용 중에도 이 책을 참조한 부분이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2) 정병준, 위의 책, 75〜80쪽

3) 정병준, 위의 책, 81〜86쪽

4) 1909년 여름학기에 하버드대학에서 추가학점을 이수한 후 1910년 2월 석사학위를 받았다.

5) 이즈음 이승만은 1908년 7월 16일 스티븐스를 저격한 한인 장인환·전명환에 대한 통역 변호를 거부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승만의 대일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6) 유영익 편, 『이승만 연구』, 연세대출판부, 2000, 54〜58쪽

7) 정병준, 위의 책, 87〜89쪽

8) 정병준, 위의 책, 91〜94쪽

9) 박용만에 대해서는 박영석, 「한인소년병학교 연구-헤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l집, 1987 ; 윤병석, 「1910년대 미주지역 한인사회의 동향과 조국독립운동 한인소년병학교와 숭무학교·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를 중심으로」, 『두계 이병도박사 구순기념 한국사학논총』, 지식산업사, 1987 ; 방선주, 「박용만평전」,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안형주, 「박용만의 소년병학교」, 단국대학교 한국민족학연구소, 『한국민족학연구』 4, 1999 등을 참조할 수 있다.

10) 김도형, 1930년대 초반 하와이 한인사회의 동향, 한국근현대사연구 9집, 1998, 204〜215쪽

11) 정병준, 위의 책, 138〜139쪽

12) 이명화,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과 노선: 최근 도산에 관한 연구를 중심으로, 『안도산전서(하)』(도산사상연구회), 범양사, 1993, 111쪽

13)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1-상해정부시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46〜57쪽

14) 김희곤, 위의 책, 40쪽

15) 이현주, 「임시정부의 수립과 초기 활동」, 『한국사 48』(국사편찬위원회, 2001), 114쪽.

16) 한철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 기념논문집(상)』, 국가보훈처, 1999, 130〜134쪽

17) 이현주, 위의 글, 122쪽

18) 김희곤, 앞의 책, 97쪽

19) 김희곤, 156〜157쪽

20) 윤대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운영과 독립방략의 분화(1919-1930)』, 서울대 박사논문, 1992, 72쪽

21) 윤대원, 위의 글, 72쪽

22)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사 1』, 155〜156쪽; 윤대원, 위의 글, 72〜74쪽

23) 김희곤, 위의 책, 208〜209쪽

24) 이명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 기념논문집(하)』, 국가보훈처, 1999, 482쪽

25) 김희곤, 위의 책,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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